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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 속의 검정에 대하여
강영숙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6월
평점 :
서울을 테마로 한 소설집에서 강영숙의 단편을 읽은 기억이 전부다. 그러니까 <빨강 속의 검정에 대하여>를 통해서 강영숙를 처음 만난 것이나 다름없다. 우선, 강렬함과 은밀함을 암시하는 표지에 대해 언급해야 겠다. 무언가 비밀을 말하려 하는 한 이미지는 어떻게 소설에서 연결될까. 그러나 책에 수록된 9편의 단편은 사실, 모두 울적했다. 일부러 명랑한 척 위장한 소설도 있었지만, 은밀함보다는 울적함이 더 잘 어울리는 소설들이었다.
소설은 도시라는 테두리 안에서 일어나는 에피소드의 모음이라고 할까. 그러나 일반적인 평범함이 없었다. 삶에 지쳤기 보다는 의욕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소설 속 인물들은 주변 사람들과의 불편한 관계였고, 어울리지 못했다. 무언가 말을 하고 있어도 ,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있어도 타인과의 소통이 아닌 독백이나 방백 형태였다.
편지글로 이뤄진 <스쿠터 활용법>을 시작으로 소설은 무기력했고, 어지러웠으면, 난해하기도 했다. 모두가 나의 이야기를 이끌어 가고 있지만, 들어주는 이 없는 혼자만의 이야기와 같았다. <안토니오 신부님>, <K에게>도 그렇다.
소설의 화자는 <K에게>를 제외하고 모두 여자들이다. 그들은 대부분 누군가과 이별했거나, 떠나보냈고 혼자의 삶을 지탱하려 노력한다. 그렇다 하여 이야기가 슬프거나 고통스럽지 않다. 오히려 담담했고 조용해서 독자가 더 긴장하게 된다. 그녀들은 도시 한 복판에서 수영복을 입고 뛰어다니기도 했고, 유부남과 사귀어 집안이 발칵 뒤집혔을 때도, 외국인 남자 친구에게 돈을 떼였을 때도 안토니오 신부에게 전화 한 통만 걸면 해결될 꺼라 믿은 <안토니오 신부님>의 그녀처럼 철이 없기도 했으며, 60세의 생일에 영정 사진을 찍는 등, 엉뚱한 면을 가졌다.
단편 <빨강 속의 검정에 대하여>와 <령>의 주인공 이름은 모두 령이다. 하여 두 소설은 마치 동일 인물의 과거와 현재를 그린 듯 착각한다. 아니, 어쩜 그럴지도 모른다. <빨강 속의 검정에 대하여>속 령은 아버지가 유산으로 남긴 매립지 위에 고가의 아파트로 이사를 한다. 근처에 여전하게 넓은 매립지가 있고, 전차가 다니고,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령은 언제나 혼자다. 혼자 밥을 먹고, 산책하고, 직장에서도 혼자다. 퇴근 후 상가를 어슬렁 거리는 것도 사람들의 무리속에 가까이 있고 싶기 때문이다.
<령>의 령은 낡은 빌라에 살고 있고, 생필품도 떨어지고 있으며, 전기도 가스도 공급이 중단될 처지에 놓였다. 그녀 역시 혼자다. 앞집 할머니가 말 상대의 전부이고 심지어는 청소기와 대화를 나눈다. <빨강 속의 검정에 대하여>는 화려하고 거대한 공간을 그렸고, <령>의 낙후되고 더럽다. 두 명의 령은 외롭고, 지루한 삶을 살고 있다. 어디에 살든, 누구든 외롭고 그 삶에 점점 동화되기도 한다.
‘구름이 가리고 남은 하늘보다 이 매립지가 훨씬 더 넓을거야. 그러니까 바다는 매립지 속으로 흐르고 있는 거야, 그렇지 않고서는 왜 보이지 않겠어.’p 56 령이 검은 매립지에서 바다의 존재를 믿는 것처럼 나름대로의 어떤 몸부림을 하고 있을 테다.
죽은 자들을 초대하는 독특한 소재의 <자이언트의 시대>는 특히 인상적이었다. 자살한 친구, 아들을 선호하던 할아버지, 결국 딸만 낳은 엄마는 모두 화자에게 초대받은 사람들이다. 죽은 자의 혼령이라지만 그들은 음울하지도 무섭지도 않다. 오히려 산자인 화자를 압도한다. 죽은 자만이 알 수 있는 암호를 대야하고, 거인이 된 화자에게만 보이는 그들이다. 지난 날을 힐책하기도 하고, 현재 그들의 세상을 이야기 하기도 한다. 평범하지 않은 화자, 하여 그는 평범한 사람들 아닌 죽은 영혼들과의 대화만 가능했던 것일까.
‘골반뼈가 시원이 걷고 나면 체중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고 몸이 가벼워지면서 골반뼈가 시원해져요. 그러나 그런 시원함 뒤에 몰려오는 피로는 다시 사람을 조금은 우울하게 만들죠. 아침에 일어날 때는 희망에 가득차 있다고 느끼다가도 퇴근할 무렵이 되면 극도로 우울해져요.’ p 11
<스쿠터 활용법>에 한 부분이다. 아침에 희망이, 저녁엔 우울함이 있다는 것이다. 강영숙의 소설을 대변하는 문장이 아닐까 싶다. 밝은 듯 어두웠고, 가벼운 듯 무거웠다.우울함이 지나 아침이 온다는 것을 알기에 적잖이 희망을 노래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누군가 내게 <빨강 속의 검정에 대하여>가 어땠냐고 묻는다면, 대답 대신 직접 읽어보라고 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