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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명의 달인 - 2014년 제45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구효서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9월
평점 :
가까운 사이일수록 함부로 대한다. 그래서 가족과 친구에게 받은 상처는 회복되기 어렵다. 두고두고 마음 깊은 속에 자리 잡아 그것은 거대한 괴물처럼 자라기도 한다. 곁에 있어 소중한 줄 모르고 산다는 식상한 말로 대신할 수도 없다. 구효서의 『별명의 달인』은 이처럼 가장 가까운 이들의 이야기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우리 주변의 모습처럼 편안하고 한편으로는 생경하다.
각자의 방식으로 과거의 연인을 그리워하는 「화양연화」, 남편과 딸을 잃고 삶을 내려놓은 여자의 공허한 눈빛에서 절망을 읽는 「저 좀 봐줘요」, 갈망하는 삶을 찾아 고국을 떠난 누나의 목소리에서 어떤 불안을 감지하는 「나뭇가지에 앉은 새」, 상대의 특징을 꿰뚫어 별명의 달인이 된 친구라면 아내가 왜 떠났는지 이유를 알 것 같은 「별명의 달인」까지 구효서의 소설 속 인물은 모두 가장 가까운 이에 대해 잘 모른다. 안다고 착각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장 가까운 사이일수록 서로 닮았다는 걸 우리는 쉽게 인정하지 않는다. 보통의 부자 관계와는 다른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인 「바소 콘티누오」에서 음악을 향한 열정이 그렇다. 자기만의 방식대로 평생을 살아온 아버지와 막내아들. 자신의 결혼을 반대한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막내아들은 아버지를 모시고 같은 공간에서 그의 뜻을 거부하지 않고 살아간다. 음악에 대한 애정이 가장 완벽하게 닮은 부자의 모습은 나란히 걷는 연인처럼 보이기도 한다.
‘마주보기는 분명 아니지만 외면도 아니다. 마주보기보단 더한 마주보기라는 걸, 알려 하지 않았을 뿐이다. 완강히 마주보기를 꺼리는, 두 사람에게 작용하는 동일한 종류의 의지가 실은 모종의 연대거나 유대라는 걸. 그리움, 혹은 면구(面灸)의 유대.’ (「바소 콘티누오」, 25~26쪽)
아버지와 아들이 그러하듯 「모란꽃」에서는 어머니와 딸이 그렇다. 어린 시절 집에 있던 펄 벅의 소설 표지의 꽃에 대한 형제들의 기억을 확인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소설은 저마다의 삶에 대한 이야기로 확장된다. 의미나 목적을 두지 않고 글쓰기를 하는 화자는 엄마의 중얼거림을 생각한다. 누군가의 답을 듣기 위한 말이 아니라 스스로를 위로하고 견디기 위한 말들이었다. 형제들의 기억 속에 표지가 모란꽃 아니더라도 그 책을 기억하며 그 시절을 공유할 수 있었다.
‘엄마는 쉴새없이 중얼거렸다. 숨쉬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시상 참 모를 것투성이여, 나가 왜 사는 중 알았으면 진즉 못 살았을 것이다…… 엄마의 엄청난 말들이 허공에 흩어졌다. 글로 쓰니까, 허공에 흩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쓸모 있는 내용도 아니고, 다시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들이었으나, 흩어져 사라지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모란꽃」, 80쪽)
‘그 속절없는 일에 애초부터 무슨 이유나 목적이, 있었던 건, 아니었질 않은가. 버릇처럼 숨처럼 그래온 것뿐이니까. 40년간 하염없이 이어져오기만 한 거였으니까. 그리고 이어져갈 거니까.’ (「모란꽃」, 112쪽)
그게 무엇이든 삶을 지탱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건 얼마나 다행인가. 살아가야 할 이유를 놓치고 절망의 늪에서 그 존재를 발견할 수만 있다면 삶은 이전과는 다른 무엇이 될 것이다. 그런 이유를 붙이자면 암 투병 중 병원에서 사라진 형과 언어장애가 있는 동생의 이야기「6431-워딩.hwp」에서 동생에게 말(글)을 가르쳐준 형은 그런 존재였다. 형은 모두에게 사라진 존재지만 동생은 끊임없이 그와 소통하는 기이한 이야기.
‘나에겐 말과 글이 따로일 수 없다. 허공에서 흩어지되 무시로 부메랑처럼 되돌아와 거듭 뜻을 일깨우는 게 형의 말이라면, 내 말은 언제든 다시 들춰볼 수 있는 글이 된다.’ (「6431-워딩.hwp」, 142쪽)
가족과 함께 읽으면 하나의 추억을 소환해 대화를 나눌 수 있을지도 모른다. 숨쉬는 것처럼 편안하고 쉬운 일상은 어디에도 없지만 숨쉬는 것처럼 지속되는 일상에 대하여. 닮았지만 닮지 않은 이야기들, 알 것 같지만 어렵게 다가오는 이야기. 시간이 지나서야 자신과 똑같은 행동을 하는 가족에게서 나를 발견하는 가족의 이야기. 구효서는 똑같은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느 하나 같을 수 없는 게 삶이라는 걸 말하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