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의 뚜껑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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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이든 함께 할 존재가 있다는 건 감사한 일이다. 가장 깊게 나를 알아주는 가족이나 친구가 그런 존재다. 모든 감정을 나누며 공유할 수 있다고 믿는다. 좋은 풍경을 마주했을 때나 맛있는 음식을 먹었을 때 나도 모르게 그들을 생각한다. 말을 나눌 수 없는 대상도 있다. 애완동물, 아끼는 물건, 자주 찾는 공간, 꽃, 나무, 바다... 끝없이 확장된다. 저마다 다른 기준이 있기 때문이다. 행복의 기준이 저마다 다르듯이 말이다.

 

 아무 기대 없이 읽게 된 요시모토 바나나의 『바다의 뚜껑』​은 그런 존재와 행복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었다. 거창한 일상이 아닌 작고 소소한 일상이 가져다주는 기쁨과 충만함, 그리고 ‘나’라는 존재와 나를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오늘이 품고 있는 영롱한 빛을 보여주었다. 영원한 여름으로 남은 그 여름이 떠올라서 숨을 고르는 순간도 있었지만 여름에만 만날 수 있는 바닷바람의 차갑고 달콤함 맛으로 나를 채우고 말았다. 주인공 마리가 표현한 이런 느낌처럼.

 

 얼음은 엷고도 달콤하게 사라진다. 그것은 거의 기적이었다. 나는 그걸 좋아했다, 그저 단순히 좋아했다. 처음에는 그 자잘하고 하얀 안개 같던 것이 점차 덩어리가 되었다가 마지막에는 물이 된다. 모두 달콤하게 배로 들어간다. 그런 느낌. (100쪽)

 

 대학에서 무대 미술을 전공한 마리는 단순하게 빙수가 좋아서 고향 바닷가 솔숲에 작은 빙수 가게를 차린다. 엄마 친구의 딸 하지메는 어린 시절 화재로 얼굴 오른쪽에 화상 흉터를 지녔다. 자신을 구해주고 평생을 한 집에서 살다 돌아가신 할머니를 향한 그리움으로 지친 하지메와 함께 보낸 여름 이야기는 특별하게 다가온다. 흉터 때문인지 슬픔 때문인지 하지메는 조용하고 가냘프다. 마리는 화려했던 관광지의 모습은 사라지고 ​폐허처럼 변하는 고향이 안타깝기만 하다. 하지메에게 바다와 온천을 소개하며 과거에 대한 애착을 보인다.

 

 우리 인간은 매 순간 추억을 만들면서 시간 속을 헤엄쳐 가지만, 끝내는 깜깜하고 거대한 어둠 속에 빨려 들어가. 우리는 그럴 수밖에 없어. 죽을 때까지 계속. 계속해서 만들어 내고, 그런 한편으로 계속해서 잃어 갈 수밖에는. (79쪽)

 

 마리와 하지메의 일과는 단순하다. 네 가지 종류의 빙수를 팔고 쉬는 시간에는 바다에서 수영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버드나무 아래에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눈다. 당당하고 능동적인 마리에 비해 조용하고 수동적인 하지메는 조금씩 친해진다. 돌아가신 할머니의 재산을 둘러싸고 좋지 않은 일들을 경험한 하지메에게 마리는 과한 조언이나 위로가 아닌 바다와 자신의 감정과 일에 대해 말한다. 매일 같은 공간에서 마주하는 것들이 주는 기쁨, 빙수를 맛있게 먹는 손님들이 주는 즐거움, 그런 마리를 통해 하지메의 어두운 마음은 천천히 환해진다. 마리와 하지메는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물들이고 있었다. 말이 아닌 눈빛으로 마음을 전하고 현재의 일상에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빙수 가게로 돈을 많이 벌지 않겠다는 마리의 다짐과 마리가 그린 이상한 생물 그림을 인형으로 만들겠다는 하지메의 계획이 그러했다.

 

 ‘모두가 자기 주변의 모든 것에 그만큼 너그러울 수 있다면, 이 세상은 틀림없이……. 별빛이 이어지듯 그것은 커다란 빛이 되어, 맞설 길이 없을 만큼 거대하고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빛나 보이리라. (151쪽)

 

 바다 수영을 할 수 없다는 건 하지메가 떠난다는 것이다. 하지메와 함께 보낸 여름이 끝나고 가게는 한산하다. 마리가 빙수 가게에서 빙수를 만들 때 하지메는 자신의 인형을 만들 것이다. 이제 다음 여름을 기대할 수 있다. 그건 하지메가 온다는 일이었다. ​반복되는 일상의 지겨움이 아니라 소중한 하루가 쌓여 미래의 디딤돌이 된다. 때로 사라지는 것들을 지켜보며 아파하면서 추억할 것이다. 어제와 다르지 않은 오늘과 내일이 주는 감동을 아는 사람은 마리와 하지메처럼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조금은 쓸쓸하고 차가운 바다를 곁에 둔 겨울, 마리와 하지메를 만난 그 여름을 반짝이는 빛으로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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