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날이 있다. 나를 찾는 사람들이 많은 날. 그러니까 전화기를 통해 여러 사람의 목소리를 만나는 날 말이다. 오늘이 그랬다. 오후에 들어 네 명의 목소리를 만난다. 셋은 친구였고 나머지 한 분은 선생님이셨다. 오직 단 한 분, 중학교 3학년 국어를 가르치셨던 분이다. 올 2월에 휴직을 하시고 사부님의 직장 때문에 중국에 나가셨다고 한다. 이상한 건 이번 주 내내 선생님과 통화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는 점이다. 스승의 날이나 추석 명절에 작은 정성을 보내드리면 짧게는 문자로 답을 주시거나 전화를 주셨는데 올해는 소식이 오지 않았다. 바쁘셔서 그런가 보다 생각했는데 한국이 아닌 중국에 계셨고 잠깐 한국에 들어오셨다가 이제야 내가 보낸 것들을 받으셨다고 한다. 첫 발령을 받은 초보 선생님과 제법 순수했던 소녀는 이제 어떤 소재든 거침없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세 명의 친구는 그들의 삶 속에 나를 포함시켰고 나 역시 그러하다. 계획하고 있는 일들과 지난 시간의 흔적들을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건 참으로 고맙고 감사하다. 좋은 사람, 소중한 사람과의 관계는 서로에게 쌓인 시간의 두께와 상관없이 언제나 단단하다. 단단하다는 믿음은 어디서 시작되는 것일까.  

 소중한 사람을 곁에 두었지만 삶이란 혼자만의 것이다. 사소한 것들로 시작해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거대한 것들의 선택은 혼자서 해야 한다. 고통과 슬픔도 나눌 수없다. 나눌 수 없기에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그것을 지켜보는 힘든 과정을 견뎌야만 한다. 때로 그것은 길고 긴 시간이 된다. 때로 그것은 혹독한 형벌이 된다. 미셀 슈나이더의 <슈만, 내면의 풍경>속 이런 구절에서 나는 감히 누군가의 고통을 생각한다. ​그리고 가만히 기도한다. 그 고통이 사라지기를, 다시는 꽃 피지 않기를...

 

 

 고통은 남과 소통할 수도, 남에게 드러내 보일 수도 없다. 고통에게는 탄식이나 한탄이 낯설다. 아마도 고통은 곧 의미를 갖지 못하는 것, 다른 사람이든 자기 자신이든 누군가와 나눌 수 없는 그 무엇일 것이다. 심지어는 의미와 무의미의 대조에도 못 미치는, 우리가 의미를 완전히 상실할 때 도달하는 상태일 것이다. 광기 속의 고통은 물론 그 자신의 고통과 소통할 수 없는 것을 뜻한다. 말 그대로 무감각한 상태의 것이다. 병든 슈만은 온순하게 의사의 지시를 따랐는데, 아픔을 잠재울 수 있는 처방만은 거부했다. 그는 고통 그 자체가 아니라 고통의 원인을 제거하고 싶어 했는데, 그 원인이란 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기까지 오랜 시간을 보내야 했다. (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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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9 07: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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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9 19: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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