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비가 그친 토요일 오후 집 안은 어둑하다. 거실 한쪽에는 고모가 보내준 홍삼 상자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방금 한 봉지를 컵에 따라 마셨다. 정성을 다해서 마셔야 했는지도 모르겠다. 고모의 마음을 담아서 말이다. 매일 서너 알씩 단감을 먹고 있다. 굵고 튼튼하게 생긴 단감을 먹으면서 M을 생각한다. 이걸 내게 먹이고 싶었을 M을 생각한다. 마음을 받는다는 건 언제나 감사하고 고맙다. 그 마음에 나는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모르는 채 말이다. 그저 그 마음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일, 그게 가장 중요한 게 아닐까.
점심엔 싹이 난 부분을 깊게 깎아 낸 작은 감자를 간장, 설탕, 기름, 마늘을 넣고 조렸다. 달달한 간장과 설탕 냄새가 아직도 가득하다. 이번에 요리책을 참고하지 않고 내 맘대로 양을 조절했다. 그렇다. 나는 아직도 맛있는 감자조림을 할 줄 모른다. 그게 뭐든 잘 하는 게 없다는 생각이 드는 오후다.
필립 로스의 『전락』을 읽고 있다. 어떤 일에 자신감이 사라지고 있다는 걸 경험한다는 건 서글픈 일이다. 그것이 늙음 때문이라면 더욱 그렇다. 이상하게 필립 로스의 소설은 무척 빨리 읽게 되는 소설과 지루할 정도로 천천히 읽히는 소설이 있다. 예상했듯 『전락』은 후자의 경우다. 『에브리 맨』도 무척 그리 읽혔는데 강렬하게 남았다. 이 소설도 그런 책이 될까. 어쨌든 다 읽어야 알 수 있을 것이다.
읽고 있는 책과는 별개로 이런 문장을 생각한다. 다시 펼쳐 읽고 옮긴 건『7번 국도 Revisited 』의 한 부분이다. 읽으면서 지금 무엇을 하든, 어디에 있든 당신이 왜 그곳에 있는지 문득 궁금해진다. 그건 나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요즘 고민이 많다. 모두 하나에서 파생된 것들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나는 왜 존재하는가란 질문으로 이어진다. 선택을 했고 결정을 내렸지만 11월이라는 계절 탓인지 불안하고 불안하다.
‘길들은 지금 내 눈앞에 있다. 길들은 만나고 헤어지고 가까워지고 멀어진다. 그게 길들이 확장하는 방식이다. 길들은 도서관에 꽂힌 책들과 같다. 서로 참조하고 서로 연결되면서 이 세계의 지평을 한없이 넓힌다. 길들 위에서 나는 무엇이든 배우고자 했다. 길들이 책들과 같다면, 그 길을 따라가면 언제나 미지의 세계를 만나리라. 처음에는 다른 세계를 향한 열망이 훨씬 컸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길들 자체에 매혹됐다. 그저 읽고 또 읽는 일만이 중요할 뿐인 독서가처럼, 거기서 무엇도 나오지 않는다고 해도 걷고 또 걷는 일만이 내겐 중요했다. 그리하여 여기는 어디일까? 나는 왜 여기 있을까? 나는 누구인가?’ (52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