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 연인들 - 김선우 장편소설
김선우 지음 / 민음사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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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주문처럼 말한다. 우리를 살게 하는 건 사랑과 소망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정작 하루를 견디고 또 하루를 살아가기 위해 밥을 먹고 잠들 수 있는 힘은 어떤 분노이거나 증오에서 나오기도 한다. 나를 고통스럽게 한 존재를 넘어서기 위해 그가 무참히 짓밟히는 그 날을 고대하며 사는 삶도 있다는 것이다. 거부할 수 없는 불행을 안고 태어난 삶이 그러하다. 나의 잘못이 아니라 부모나 형제의 잘못으로 그 삶이 대물림 되는 경우, 그 고리를 끊기 위해 새로운 불행이 잉태되어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과감하게 그 고리를 끊어낼 수 있을까. 누군가에는 끊고 싶은 고리가 누군가에는 다시 이어가고 싶은 유일한 것일지도 모른다.

 

 김선우의 소설에서 ‘고리’는 사랑이다. 끊어야 할 고리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가장 된 폭력이며, 이어가야 할 고리는 생명에 대한 사랑이다. 폭력을 일삼던 남편을 죽이고 복역 중인 지숙은 딸 유경을 사랑했기에 자살을 선택했다. 유경의 인생에 걸림 돌이 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유경은 엄마의 고향인 ‘와이강’에 유해를 뿌리고 일부를 가지고 스톡홀름으로 향한다. 북유럽을 꿈꿨던 엄마의 바람을 들어주기 위해서다. 유경은 그곳에서 한 남자를 만나 사랑한다. 그가 한국의 와이강에서 발견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유경에겐 충분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그들은 와이강을 찾는다. 평온하게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사랑을 나누고 미래를 약속한다. 그러나 곧 돌아오겠다던 그는 사고로 죽고 그 충격으로 유경은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 흐르던 사랑이 멈추자 유경의 삶도 멈춘 것이다. 유경이 다시 와이강을 찾은 건 해울의 편지 때문이다. 해울은 와이강의 물을 보내고 자신을 도와달라는 의문을 편지를 보냈다. 와이강에서 버려져 그곳의 당골네가 손녀 수린과 함께 남매처럼 키운 아이였다.

 

 유경에게 와이강은 엄마와 그를 떠올리는 소중하면서도 아픈 곳이다. 7년 만에 다시 찾은 와이강은 버림 받은 이들, 상처 받은 이들을 품어주고 치유해 주던 강이 아니었다. 정부 정책이라는 이유로 곳곳이 허물어지고 사라지고 있었다. 강이 파괴되면서 몸이 굳어가는 수린을 위해 해울은 공사를 중단시키기 위해 죽을 각오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숙, 그, 수린, 해울은 와이강이 존재했기에 살 수 있었던 이들이다. 와이강은 죽은 지숙에게 맑고 순수한 추억을 간직한 곳이었고 그는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곳이었으며 수린과 해울에겐 엄마였다. 그리고 유경에겐 멈추었던 삶을 흐르게 할 유일한 곳이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붙잡을 수 없었던 그의 이름, ‘연우’를 찾고 생을 이어갈 수 있는 이유를 마주하게 된 것이다.

 

 김선우의 『물의 연인들』에 대해 단순하게 사랑 이야기라고 예상한 건 오산이었다. 『캔들 플라워』를 떠올렸어야 옳았다. 가장 아름답고 가장 영민한 글로 그림자이거나 그늘인 삶에 빛의 길을 터 준다는 걸 기억해 내야 했다. 그녀는 극도의 섬세함과 부드러움으로 우리의 무감각을 흔들어 깨운다.우리가 함께 지켜지고 지속적으로 보존되어야 할 것들을 주시하고 있다는 걸 말이다.

 

 ‘나는 괜찮아요. 아주 오래 살아도 좋았겠지만 아니어도 상관없어. 강이 흐르는 이유가 뭔지 알아요. 선생님? 와이강이 오빠랑 내게 늘 들려주던 얘기인데요. 어제보다 오늘을 더, 조금이라도 더 많이 사랑하기 때문에 강은 흐르는 거예요. 사람이 살아가는 것도 마찬가지겠죠. 어제보다 오늘을 조금이라도 더 사랑하지 않으면 흐를 필요가 없어요. 어제에 멈춰 서 버리면 그만이니까. 그건 죽은 거나 마찬가지잖아요. 거기까지 말을 마친 수린이 힘이 드는지 가만히 숨을 내쉰다. 희미한 단내가 풍기는 수린의 숨소리가 물소리처럼 흐른다…… 라고 유경은 느낀다. 응, 죽은 거나 마찬가지로 살았어. 이제는 안 그럴게. 어제보다 오늘 더, 조금이라도 더 많이 사랑할게. 그렇게 흘러갈게. 그게 사는 거니까.’ 257쪽

 

 그러므로 김선우가 이 소설에서 말하는 사랑은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필요한 가장 근본적인 사랑이다. 나 스스로에 대한 사랑, 너에 대한 사랑, 생명에 대한 사랑, 인간에 대한 사랑, 물에 대한 사랑 말이다. 수린의 말처럼 강이 멈추지 않고 흘러야 하는 것처럼 우리 삶에는 사랑이 흘러야 할 것이다. 작은 물줄기가 흘러 다른 물줄기를 만나 커지고 더 많이 흐르듯 나의 사랑과 당신의 사랑이 흘러 세상을 가득 채울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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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랑무늬영원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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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다는 건 가면을 쓰고 사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감정을 자제하고 숨기는 일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다.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닌데 우리네 삶은 그렇게 지속된다. 살아내야 하니까, 도미노처럼 몰려오는 삶의 거친 파도 앞에 무너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래서 서글프다. 그런 줄 알면서도 서글프다. 감당할 수 없는 현실에 내몰려도 나를 대신 할 누군가가 없다는 사실이 아프다. 한강의 소설은 그것을 한 번 더 각인시킨다. 잔인하게도.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다. 깊게 베인 상처를 가만히 지켜보고 어루만진다. 오랜 시간 기다리고 기다렸던 손길이라는 걸 우리는 금세 알아차린다.

  

 「회복하는 인간」은 언니의 장례를 치르고 돌아오는 길에 다친 발목을 치료하다 입은 화상을 방치한 주인공 이야기다. 그녀가 화상을 입은 건 복숭아뼈 만이 아니었다. 지난 시절 언니와의 관계에서 조금식 데인 부위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부모님과 남편 모두에게 사랑받았던 언니는 그녀의 상처를 보여주기도 전에 떠나버리고 말았다. 그러니까 그녀는 이제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린 것이다. 얼마나 힘든 날들을 버티며 살아왔는지 말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나도 앞이 보이지 않아. 항상 앞이 보이지 않았어. 버텼을 뿐이야. 잠시라도 애쓰고 있지 않으면 불안하니까. 그저 애써서 버텼을 뿐이야.’ <「회복하는 인간」, 32쪽>

 

 그저 열심히 살고 있다고 여겨지는 수많은 삶은, 그녀의 발목처럼 깊은 상처를 안은 채 견디고 있는 건 아닐까. 남편 대신 가계와 아이를 모두 책임져야 하는 「훈자」속 주인공이나 이제까지 살았던 삶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 길을 떠나는「밝아지기 전에」도 그녀들과 다르지 않다. 안간힘을 쓰며 살지만 산다는 그 자체가 무의미할 뿐이다. 지친 그녀가 견디다 못해 터져버릴지도 모른다. 아내와 아이를 위해 최선을 다하며 살아간다고 믿었던 「 왼손」의 남자처럼 말이다. 평범한 직장인 주인공은 언제부터인지 아내와 말을 나누는 시간이 줄었다. 피곤하다는 이유로, 아이가 잘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집은 그저 잠을 자기 위한 공간이 되버렸다. 어느 날 왼손이 통제되지 않는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인다. 남자의 왼손은 그동안 감췄던 욕망을 분출하듯 과격하게 행동한다. 그로 인해 직장에서는 해고되고 오랜 만에 만난 첫사랑과도 불편한 사이가 된다.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던 왼손은, 감춰진 울분이었을까.

 

 그들이 간절히 바랐던 건, 그저 자신을 그대로 바라봐 주는 단 한 사람의 눈빛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른의 세계에서 그 한 사람이 되어주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 눈빛을 기다리고 바라는 건 여전히 우리의 생을 사랑하고 살아가고 싶기 때문이다. 숨기고 살았던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자 용기를 내는 「에로우파」와 「파란 돌」의 화자와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모든 걸 잃은 「노랑무늬영원」의 현영이 차마 꺼내놓지 못한 바람도 그것이었다. 죽음의 터널을 지나왔지만 현영에게 삶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그림이 전부였던 그녀에게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두 손은 사라졌고 남편의 도움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두 손만이 남았다. 절망의 그녀에게 삶을 보여준 건 친구 소진의 아들이 키우는 도마뱀 노랑무늬영원이었다. 앞발을 잃은 도마뱀의 앞발이 다시 돋아나듯 그녀의 생도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긴 것이다.

 

  ‘만일 내가 이 세상에서, 사랑을 가진 인간으로서 다시 살아나가야 한다면, 내 안의 죽은 부분을 되살려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 부분은 영원히 죽었으므로. 그것을 송두리째 새로 태어나게 해야 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하는 것이다.’  <「노랑무늬영원」, 296쪽>

 

 소설에서 마주하는 삶들은 잊고 있었다고 여겼던, 그리하여 아무런 상처도 남아 있지 않다고 믿었던 나의 이야기이며 당신의 이야기다. 소설 속 그녀(그)를 부서지게 만든 건 대단한 것들로부터 시작된 게 아니다. 말하지 않아도 안다고 무던하게 믿었던 미련함이나 아프다고, 힘들다고, 말하지 못한 채 가면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삶의 균열은 아주 작은 곳에서 시작되기에 우리는 미처 발견하지 못한다.

 

 한강의 소설은 우리가 쉽게 지나치고 발견하지 못하는 그 작은 틈새를 발견하고 메울 수 있다는 걸 말하고 있는 듯하다. 어떤 틈새는 한 번에 메워지기도 할 것이고 어떤 틈새는 오랜 시간 공을 들여야 할 것이다. 그 과정을 버티고 견디는 생을 살아가는 모두에게, 포기하지 말고, 지치지 말고 힘내라는 그녀의 작지만 강한 목소리가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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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나무가 될 수밖에 없었어
    from 그리하여 멀리서 2016-04-29 17:37 
    자신을 지키며 성장할 수 있는 이는 많지 않다. 특히 어디서든 뛰어나올 수 있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세상에서는 말이다. 외부의 공격뿐 아니라 내부의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기르려면 이전과는 다른 삶을 선택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어쩌면 고기를 먹지 않고 채식을 결정한 건 영혜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었을까. 영혜는 남편과 가족들에게 충분히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이해받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이날을 위한 우산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5
빌헬름 게나치노 지음, 박교진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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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은 때때로 경이롭다. 예측할 수 없기에 더욱 그렇다. 기이한 정도로 불행한 일들이 발생하기도 하고 놀라운 반전으로 회복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 경이로움을 누구나 겪는 건 아니다. 오히려 나를 제외한 삶에만 적용되는 듯 보여 절망스러울 때가 많다. 그러고 보면 산다는 건 누구에게나 같은 행위일 뿐인데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특별하지 않은 하루는 행복한 것이며 지겹도록 반복되는 일상을 벗어나고 싶은 욕구나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은 소망도 자연스러운 것이다. 빌헬름 게나치노의 『이날을 위한 우산』속 인물들도 그렇다.

 

 소설의 화자인  ‘나’ 는 마흔 여섯 살의 남자로 수제화를 신고 걸으며 테스터를 하는 직업을 가졌다. 과거에는 인터뷰 진행자로 활동했고 신문에 글을 쓰기도 했지만 모두 과거일 뿐이다. 현재는 구두 테스터로 받는 비용이 긴축재정이라는 이유로 줄어들고 일자리를 잃을 위기며, 진정 사랑하는 연인 리자는 약간의 생활비를 남기고 떠났다.

 

 내가 하는 일은 그저 구두를 신고 거리를 걸으며 이웃을 관찰하는 일이다. 같은 시각에 만나는, 같은 행위를 하고 있는 사람들, 옛 친구나 동료가 전부다. 거리를 청소하는 내외, 말의 털을 빗질하는 여자, 베란다에 빨래를 너는 노무자의 아내나, 유모차에서 잠든 아이를 보며 행복해하는 부모들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어제와 다른 어떤 사소한 변화나 발견에 놀라고 감탄하기도 한다. 나와 마주하는 그들도 역시나 유명했던 과거 이력을 지녔을 뿐이다. 그들은 모두 새로운 삶을 꿈꾼다.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하는 오랜 친구 수잔네는 여전히 연극 무대를, 한때 사진작가였던 힘멜스바흐는 재기를 원한다. 그러니까 그들은 모두 현재 자신의 삶이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는 것이다. 수잔네의 말처럼 말이다.

 

 ‘대중의 고통은 말이야, 수잔네는 말한다(그녀가 정말로 대중의 고통이라는 말을 쓰다니 놀랍다),불쌍하기 그지없는 그들 모두가 일생 동안 중요한 사람을 만나지 못한다는 사실에 기인해, 이해하겠어?’ 78쪽

 

 정말 중요한 사람을 만나지 못해서 고통스러울까? 어쩌면 그런 생각으로 위안을 받고 싶은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우리와 인연을 맺는 사람이 모두 중요하다는 사실을 잊는 것이다. 삶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 누구와 마주하게 될지 모르니까. 소설에서 어쩔 수 없이 구두 테스터를 계속해야 하고, 벼룩시장에 구두를 팔아야 하는 주인공이 힘멜스바흐의 부탁으로 신문사에 연락을 했다가 다시 일을 하게 되고 수잔네와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는 것처럼 말이다.

 

 ‘난 실패 속에서 계속 살아가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한동안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그리고 어떻게 거기서 벗어날 것인지 알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삶을 계속 이어간다.’  158쪽

 

 우리는 어제를 살고 오늘을 산다. 그러니까 내일을 살 수는 없다는 말이다. 과거의 화려한 시절에 발을 담그고 살기도 할 것이다. 때로 넘어진 자리에서 일어서지 못하기도 할 것이다. 넘어졌기에 다시 일어나 걸을 수 있고 뛸 수 있다는 걸 모른다. 그럴 때 누구나 삶을 원망할 것이다. 앉은 자리에서 보이는 풍경의 경이로움을 발견하기 전까지 말이다. 『이날을 위한 우산』은 그런 멋진 풍경을 선물하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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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2-12-17 1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 삶은 결코 순수한 우리 자신만의 작품은 아니겠지요...
* * *
삶의 궤적

자신이 지나온 길을 돌이켜볼 때 아깝게 놓쳐버린 여러 번의 행운과 스스로 불러왔던 여러 번의 불행을 떠올린다면, 그것이 '미로를 헤매듯 잘못 거쳐온 삶의 행로'(괴테, 《파우스트》1부, 헌사)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자칫 자신을 지나치게 질책하기 쉽다.

삶은 결코 순수한 우리 자신의 작품이 아니다. 삶은 두 가지 요인, 즉 일련의 사건과 우리가 내린 결정의 산물이다. 게다가 두 요인에 대한 우리의 시각은 제한되어 있다. 우리가 어떤 결정을 내릴 것인지 일찌감치 예측하기는 불가능하다.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 예견하기는 더욱 불가능하다. 우리가 아는 것은 그저 눈 앞의 사건과 현재의 결정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목표가 아직 멀리 있는 한, 우리는 그 목표를 향해 똑바로 나아가지 못한다. 다만 짐작으로 대충 방향을 잡을 뿐이다. 우리가 내린 결정이 목표점에 더 가까이 데려가주기를 바라면서, 주어진 상황에 따라 순간순간 결정내릴 뿐이다. 그러므로 주어진 상황과 우리의 기본 의도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주어지는 두 가지 힘에 비유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 생겨나는 대각선이 바로 삶의 궤적이다. (쇼펜하우어)

자목련 2012-12-18 21:01   좋아요 0 | URL
전 <파우스트>를 읽지 못했는데, 장바구니에 담아둡니다.
oren님은 정말 깊은 독서를 하시는 듯해요.
 
몰락하는 자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8
토마스 베른하르트 지음, 박인원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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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가면서 나를 알아주는 이를 만나는 건 행운이다. 그 행운의 존재를 우리는 친구라 부르기도 한다. 그 친구가 같은 분야에 있다면 인생의 경쟁자가 될 것이다. 한데 그 분야의 최고자라면 어떨까. 누군가는 계속 경쟁을 하며 지내겠지만 누군가는 다른 궤도로 수정할 것이다. 예술이라는 장르는 특히 그렇다. 어느 분야든 마찬가지지만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알아본다고 하지 않는가. 그렇기 때문에 『몰락하는 자』속 화자와 친구가 천재 피아노 연주자 글렌 굴드를 단 번에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이다.

 

 소설은 천재적인 예술가의 등장으로 예술을 포기한 이들에 대한 이야기다. 그러니까 예술가의 길을 선택했지만 글렌 굴드와 만나면서 한 사람의 생이 어떻게 비참하게 몰락하는지 그 과정을 설명한다. 화자의 독백 형식으로 반복적인 문장들로 강조하며 이어진다.

 

 쉰한 살의 화자는 친구 베르트하이머의 장례식에 참여 한 후 친구의 마지막 여정이었던 별장 근처 여관에 투숙한다. 베르트하이머의 자살이 28년 전 함께 피아노를 공부했던 글렌 굴드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며 그 시절을 회상한다. 불친절한 화자는 세 사람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시간의 순서없이 들려준다. 부유했지만 예술에는 무지했던 가정에서 자란 화자와 베르트하이머는 피아노의 대가가 되기를 꿈꿨다. 글렌 굴드를 알기 전까지 말이다. 글렌 굴드와 함께 피아노를 배우고 친구가 되었지만 예술가가 되기를 포기한다.

 

 베르트하이머는 아버지의 기업을 이어받을 수도 있었고 자신이 원하는 다른 무언가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피아노만이 전부였고 글렌 굴드를 의식하는 삶이 전부였던 것이다. 불행을 자초한 것이다. 때문에 자신에게 최선을 다하는 여동생을 괴롭히고 친구인 화자에겐 권태로운 삶을 자살로 마감할 것이라 비아냥 거렸다.

 

 첫 눈에 서로를 알아 본 세 명의 친구 중 둘은 죽었고 화자는 살아남았다. 예술과 피아노라는 공통 분모가 있었지만 그들은 서로 달랐다. 한 사람은 평생을 예술가로 살았지만 나머지 둘은 그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화자는 베르트하이머처럼 자살하지 않았기에 몰락하지 않은 자라 할 수 있지만 그 역시 글렌 굴드의 주변을 맴돌며 살았다. 

 

 베르트하이머는 글렌 굴드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피아노를 그만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의 생은 글렌 굴드로 인해 수정된 것이다. 화자 역시 피아노를 포기하지만 베르트하이머의 절망과는 달랐다. 한 사람의 등장으로 인해 삶의 기반이 흔들릴 수있다는 건 가능할 것일까? 만약 글렌 굴드가 심장마비로 죽지 않았다면 베이르트하이머는 자살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을 테니까. 그것이 불행이든, 패배자든, 몰락하는 자이든 말이다.

 

 ‘사람은 그 누가 됐든 유일무이한 존재라고 난 끊임없이 혼잣말로 중얼거렸고 그렇게 함으로써 살아남았다. 베르트하이머한테는 그런 정식적 지주가 없었다. 즉 자신을 유일무이한 존재로 바라볼 생각조차 못 했던 건 그런 조건을 조금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야, 모든 사람은 유일무이하며 그 자체만 놓고 본다면 인간은 유례가 없는 최고의 예술작품이야, 라고 난 생각했다. 베르트하이머에게는 그런 생각을 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항상 글렌 굴드이기를 원했거나 구스타프 말러나 모차르트 혹은 다른 친구이기를 원했던 거야, 난 생각했다. 그게 베르트하이머를 계속해서 불행하게 만들었어, 꼭 천재여야 유일무이한 존재가 되는 것도, 자기가 유일무이하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 난 생각했다.’ 92쪽

 

 소설은 글렌 굴드의 등장만으로도 흥미로우나 특별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지루하지 않다. 냉소적이고 독단적인 독백의 반복만으로도 충분하게 독자를 이끈다. 예술을 향한 인간의 욕망과 집착이 얼마나 집요한지 잘 보여준다. 더불어 인간에게 절망이라는 게 얼마나 견디기 힘들고 빠져 나오기 어려운 늪이라는 사실을 확인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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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뒤락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9
애니타 브루크너 지음, 김정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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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절이나 날씨 변화에 민감한 편이다. 비가 오면 비에 관련된, 눈이 오면 눈에 관련된 노래를 찾아 듣거나 시나 소설을 떠올린다. 이런 감성을 알아주는 누군가를 만났을 때 빨리 친해지거나 더 알고 싶어진다. 하지만 특별한 이유없이 강하게 끌리는 사람이 있다. 사람뿐 아니라 음악이나 책도 그렇다. 내게 애니타 브루크너의 『호텔 뒤락』은 그런 책이다.

 

 소설은 필명으로 책을 쓰는 이디스라는 여자의 이야기다. 스스로 버지니아 울프를 닮았다고 말하는 그녀는 휴가철이 지나 조용하고 쓸쓸한 호텔 뒤락에 머문다. 그곳에서 다양한 부류의 여자들을 만나고 그들과 시간을 보낸다. 화려한 외모의 퓨지 부인과 그녀의 딸 제니퍼, 강아지를 데리고 다니는 모니카, 늘 혼자인 노년의 보뇌이유 부인, 그들의 일과는 단조롭다.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들으며 차를 마시고, 식사를 하고, 쇼핑을 하고, 호텔 근처를 산책하다. 그들은 조심스러우면서도 적극적으로 서로를 탐하며 알아간다.

 

 이디스는 작가라는 사실을 숨긴 채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들은 저마다의 사연을 간직한 채 곳에 왔다. 호텔 뒤락을 도피처로 삼은 것이다. 퓨지 부인은 남편이라는 결핍을 채우기 위해 여행과 쇼핑을 낙으로 여긴다. 혼기가 지난 딸을 자신의 부속물처럼 여기며 모두에게 주목받기를 바란다. 거식증에 걸린 모니카는 아이를 갖지 못해 남편에게 유배를 당한 격이다. 보뇌이유 부인은 며느리에게 집을 빼앗겨 호텔을 전전한다.

 

 주인공 이디스의 사연은 연인인 데이비드에게 쓰는 편지를 통해 들려준다. 로맨틱한 삶을 꿈꾸던 어머니와 그런 아내를 견디지 못하는 아버지를 보고 자란 이디스에게 결혼은 망설임이다. 작가라는 직업도 결혼을 주저하게 만든 이유 중 하나였다.  아내와 어머니의 역할만이 요구되는 시대였기에 글쓰기를 보장받을 수 없다. 때문에 자신의 결혼식에 다른 곳으로 차를 돌린 것이다. 모든 비난을 피해 호텔 뒤락으로 도망쳤다. 어쩌면 이디스에게 사랑은 불륜 관계인 데이비드 뿐인지 모른다.

 

 소설은 호텔 뒤락이라는 제한적 공간에서 일어나는 단순한 일상 속에 숨겨진 여자의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들이 가득하다. 애니타 브루크너는 차분하고 담담하게 서로를 질투하고 험담하고 은밀하게 누군가를 유혹하는 그들의 생생하게 묘사한다. 더불어 그들에게 결혼이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지 말한다. 어떤 남자와 결혼을 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여자들의 삶을 퓨지 부인, 모니카, 보뇌이유 부인을 통해 보여준다. 남편과 아들에 의해 결정되는 삶은 진정 행복한 것인지 묻는다. 이디스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호텔에서 만난 사업가 네빌은 이디스에게 결혼을 제안한다. 사랑이 아니라 누구나 꿈꾸는 완벽한 결혼이라는 게 문제였다. 이디스는 결혼이 아니라 자신을 인정하고 존중해 줄 사랑을 원했다.

 

 애니타 브루크너는 무엇이 여자을 살게 하는지 이디스의 말을 통해 전한다. 여자에게 사랑은 그런 것이다. 단순한 애정이 아니라 한 사람의 모든 것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랑 말이다. 여자에게 필요한 건 일을 포기해야 하는 사랑이 아니라, 희생을 강요하는 사랑이 아니라,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사랑이라고.

 

 “나는 사랑 없이는 살 수가 없어요. 내 말은 사랑 때문에 망가지고 괴상한 징후가 생기고 우스꽝스러워진다는 뜻은 아니에요. 내가 말하는 건 그것보다 훨씬 진진해요. 내 말은 난 사랑 없이는 잘 살아낼 수가 없다는 뜻이에요. 다른 어떤 힘이 있어도 사랑 없이는 생각할 수도, 움직일 수도, 말을 할 수도, 글을 쓸 수도 없고 심지어 꿈도 꿀 수도 없어요. 살아있는 세상에서 배제되었다는 느낌이 들어요. 차가운 피가 흐르는 물고기 같은, 움직이니 않는 존재가 되어버려요. 안에서부터 파멸해버리는 거죠. 내가 생각하는 완전한 행복이란 저녁이면 사랑하는 사람이 내가 있는 집으로 돌아올 걸 알기에 편안한 마음으로 온종일 햇볕 따가운 정원에 앉아 책도 읽고 글도 쓰는 거예요. 매일 저녁 그 사람이 올 거라고요.” 114~1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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