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이
최진영 지음 / 창비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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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정적 사고보다는 긍정적 사고가 낫다는 걸 모르는 이는 없다. 하지만 그것조차 버거운 삶이 있다는 걸 모르는 이는 많다. 내 말은 우리의 현실이 의지대로 살 수 있는 삶이 아니라는 거다. 죽을 만큼 노력해도 한 발짝 앞으로 나가기가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땐 어떻게 해야 할까. 누구에게 도움의 손을 내밀고, 누구에게 너덜너덜 찢긴 가슴은 보여줘야 할까. 자유 자재로 슬픔을 표현한 최진영의 소설집 『팽이』를 읽으면서 마음이 답답해졌다. 소설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책에 수록된 10편의 소설은 평범한 일상의 편린처럼 보인다. 평범이라는 말을 써도 좋다면 말이다. 우선, 표제작 <팽이>의 화자 재이는 단칸 방에서 오빠와 둘이서 산다. 처음엔 엄마도 함께 살았다. 그러다 어느 날 엄마는 엄마의 집을 찾아 미국으로 떠났다. 그러니까 엄마가 아닌 자신의 삶을 찾아 떠난 것이다. 재이는 좀 느린 편이다. 열살이 될 때까지 글자를 다 읽지 못 해서 오빠에게 한글을 배우고 기다리고 책임지는 법을 배운다. 하지만 혼자 사는 법은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오빠도 자신의 세상으로 떠나고 어른이 되어서도 혼자 살아간다. 자신이 도는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팽이처럼 말이다. 누군가 옮겨주지 않으면 멈추고 마는 삶인 것이다.

 

 ‘우리가 허락된 크기만큼 자라는 동안 무너지지도 부서지지도 않고, 우리의 숨과 비밀과 유년을 덧바르며 거듭 견고해진 방. 까만 그곳에서, 야광 팽이가 팽팽 돌고 있었다. 가장 빨리 돌 때의 팽이는 거꾸로 도는 것도 같았고, 꼿꼿이 서서 움직이지 않는 것도 같았다. 나는 거꾸로 돌거나 가만히 서 있는 것인지도 모를 팽이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가만히 지켜봤다.’ (285~286쪽, 팽이 중에서)

 

 <팽이> 속 재이처럼 혼자서야 하는 삶이 당연한 듯 보인다. 하지만 자립은 쉽지 않다. 그러니 꿈을 꾼다는 건 그 자체로 사치라 할 수 있다. 함께 사는 코끼리 앨리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사랑, 믿음, 꿈에 대해 말하는 <앨리> 속 화자도 마찬가지다. 그가 하는 이야기를 진심으로 받아주지 않는다. 그러니 화자가 키우는 코끼리 앨리를 누구에게도 소개할 수 없다. 사랑한다고 믿는 애인은 결혼이란 현실적 문제 앞에 이별로 변하고, 영화를 만들고 싶은 꿈에 대해 형은 정신 차리라 말한다.

 

 ‘불행을 피하겠다는 게 아니다. 진짜로 불행해지는 그때 그 순간 피하지 않고 받아들이면 되지 않나. 하지만 언제 올지도 모를 불행 때문에 현재를 망치고 싶진 않다. 형이 정말 어른이라면, 나를 사랑하고 걱정하는 가족이라면, 내게 미리 불행을 주입하는 대신 내가 진짜 불행해지는 바로 그날 나를 위로하고 쓰다듬어줘야 한다. 위로와 걱정은 일이 일어난 다음에 해도 늦지 않으니까.’ (134쪽, 엘리 중에서)

 

 정확한 이름을 알려주지 않은 채 아버지가 준 장소를 찾지 못하는 이야기 <어디쯤>, 엄마가 죽고 남겨진 빌라에서 혼자 살아가는 <월드빌 401호>속 종철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세상과 단절한 상황에서 불안하고 두려운 삶을 살아간다. 그런가 하면 <창>의 주인공은 비정규직 여성으로 직장에서 왕따를 당한다. 동료들은 한결같이 그녀를 험담하고 상사는 무시한다. 무슨 이유인지 알려주지 않는다. 사회는 그녀를 더욱 외롭게 만드는 존재인 것이다.

 

 모두가 적이 될 수 있는 사회, 불안과 불신이 팽배한 세상, 사랑한다고 믿는 이들조차 나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부모님의 산소에서 갑자기 나타난 3억 돈 가방을 둘러싼 남편과 아내의 갈등을 다룬 <돈가방>이나 출근한 남편이 여고생 강간살인 피의자로 조사를 받는 <남편> 은 믿음에 대해 묻는다. 내 편이라 믿고 모든 걸 다 안다고 믿은 가족을 우리는 진짜 믿고 있을까.

 

 누구도 불행하고자 애쓰지 않는다.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남들보다 더 행복해지려는 욕망을 꿈꾸지 않는다. 다만, 불행이라는 늪을 건너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최진영의 소설 속 인물들이 그렇듯 여전히 불행의 늪에 있다. 그래서 해답이 아닌 문제만 제시한 그녀의 소설이 더 아름답고 더 애틋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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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아침
파스칼 키냐르 지음, 류재화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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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을 알지 못하는 그림을 떠올린다. 어떤 음악을 붙잡는다. 키냐르의 짧은 소설을 덮고 가만히 그 음악을 처음 들었을 때의 떨림과 평안함을 생각한다. 분노와 절규를 내려놓고 울게 만든 음악이다. 그 후로 그 음악은 존재만으로도 위로가 되었다. 음악을 이야기하려는 게 아니다. 어쩌면 키냐르는 그랬을지도 모른다. 태초의 음악에 대해, 음악 이전의 음악에 대해 말이다. 예술가로서 음악의 가치를 보여주고 싶었던 걸까.

 

 17세기 비올라 다 감바의 거장 생트 콜롱브는 사랑하는 아내를 잃는다. 여섯 살과 두 살 난 딸을 키우며 그는 음악에 몰두한다. 오직 음악의 테두리 안에서 생활한다. 두 딸에게 음악을 가르치며 작곡과 연주를 이어가고 왕실의 부름을 거절한다. 자신만의 오두막에서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며 활을 켠다. 콜롱브가 존재 자체로의 음악가였다면 그의 제자 마레는 놀라운 기교의 기술자였다. 마레는 자신의 음악을 통해 명예를 얻고 싶었다. 때문에 스승이 작곡한 곡이 궁금했고 왕실 음악가로 입궁이 자랑스러웠다. 콜롱브와 마레는 음악에 대한 견해와 욕망이 달랐다.

 

 “활을 켤 때 내가 찢는 것은 살아 있는 내 작은 심장 조각이네. 내가 하는 건 어떤 공휴일도 없이 그저 내 할 일을 하는 거네. 그렇게 내 운명을 완성하는 거지.” 75쪽

 

 스승은 음악의 본질에 다가가므로 자신의 생을 이어갈 수 있다고 믿었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마레는 스승의 큰딸과 사랑을 나누지만 둘째 딸의 유혹을 마다하지 않는다. 반면 콜롱브에게 아내는 죽은 이가 아니었다. 12년이 지났지만 아내와 함께했던 침대에서 여전히 온기를 느낀다. 때문에 콜롱브가 그토록 원했던 아내 역시 음악을 연주하는 동안 환영(幻影)으로 마주할 수 있었다. 말이 아닌 음악으로 아내를 불러온 것이다. 수척하게 여윈 검버섯이 핀 손을 보며 아내에게 가까이 가고 있다고 믿는 남자. 다정한 말 한 마디를 전하지 못한 아내를 위한 연주라고 하면 맞을까. 그런 남편에게 아내의 환영은 어디에나 음악이 존재함을 전한다. 음악이 이승과 저승을 연결해주는 통로이자 묘약인 것처럼.

 

 “바람이 되면 고통이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가끔 이 바람은 우리에게까지 약간의 음악 조작들을 실어 나른답니다. 가끔 빛은 당신의 눈빛에까지 우리 모습의 조각들을 던진답니다.” 92쪽

 

 아내를 이어 큰딸을 잃은 콜롱브는 오랜 시간 연주를 하지 않는다. 들려주기 위한 연주가 아니었지만 함께 공유하지 못하는 연주는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스승의 연주를 들을 수 없을지도 생각에 마레는 3년 동안 밤마다 오두막을 드나들다 드디어 그의 연주를 듣는다. 늙은 스승이 딸들과 함께 연주했던 곡을 연주한다. 마레는 스승에게 마지막 수업을 청한다. 평생을 서로 다른 길을 간 스승과 제자는 결국 마지막에서야 비로소 함께 연주하고 음악으로 하나가 된다.

 

 음악은 어디에서 시작된 것이며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것일까. 콜롱브의 말처럼 ‘말이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말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일까. 역사 속 기록으로 남은 위대한 예술가의 삶을 반추한 소설을 통해 우리는 음악이 존재만으로도 그 가치를 스스로 증명하고 있음을 확인한다. 비단 음악뿐일까.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우리가 모르는 신비한 비밀을 갖고 있을 것이다.

 

 “음악은 말이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기 위해 그저 거기 있는 거라네. 그런 의미에서 음악은 반드시 인간의 것이라고 할 수 없지” 118쪽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나는 음악을 듣는다. 침묵만큼 적요하게 흐르는 음악, 말이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들려주는 음악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가. 내가 닿지 않는 세계에도 분명 음악은 존재하는 것이다. 그 세계가 과거이든 미래이든 우리를 위로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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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3-10-02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악이 없는 세상은 상상하기 어려울 것 같아요. 멋진 글 잘 읽었습니다.

자목련 2013-10-03 11:07   좋아요 0 | URL
음악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확인했다고 할까요. 파스칼 키냐르를 더 알고 싶게 만든 책이었어요. 남들은 다 아는 걸 저는 이제서야, ㅎ
 
가장 좋은 사랑은 아직 오지 않았다 - 인문 고전에서 배우는 사랑의 기술
한귀은 지음 / 한빛비즈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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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랑은 언제나 어렵다. 어떤 이는 과거의 사랑으로 여전히 아파하고, 어떤 이는 지금의 사랑 때문에 힘들다. 그럼에도 우리는 사랑을 알지 못한다. 사랑이 있어 삶이 빛나는 걸 알지만 그것을 정복할 수 없다. 사랑, 어떻게 해야 아프지 않고 행복할 수 있을까? 책으로 사랑을 배우는 건 어리석다 하겠지만 경험할 수 없는 사랑에 대해 소설보다 더 좋은 교과서는 없을 것이다. 한귀은의 『가장 좋은 사랑은 아직 오지 않았다』 는 바로 그런 책이다. 20편의 고전을 통해 사랑의 기술을 소개한다.

 

 그러고 보면 고전 속 사랑은 치명적이고 매혹적이다. 물론 그들의 결말이 항상 행복한 건 아니다. 집착을 사랑이라고 믿어서, 혹은 사랑받지 못한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한귀은은 그들의 사랑을 ‘나’ 와, ‘너’ 가 아닌 객관적 시선으로 바라보고 독자에게 설명한다. 시대가 다르지만 사랑을 향한 기대는 같기 때문에 서서히 책 속으로 빠져든다.

 

 사랑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입체적으로 떠오르는 이미지는 첫사랑이 아닐까. 저자 역시 이 책을 투르게네프의 《첫사랑》으로 시작한다. 나만의 그(그녀)를 잊지 못한 마음, 사랑이 시작되면서 바보가 되고 사랑이 끝난 후 조금은 성숙해지는 게 첫사랑인지도 모른다. 하여 이루어지지 않는 짝사랑이라 해도 아름답게 간직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랑의 조건은 무엇일까. 잘 생긴 외모, 뛰어난 능력, 다정한 목소리, 그 모두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사랑을 지속하기 위해선 소통이 중요하다.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네 이야기를 들려주는 가장 기본적인 관계가 성립되어야 한다. 마누엘 푸익의 《거미여인의 키스》속 두 남자처럼 말이다.

 

 ‘무엇보다 사랑은,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면서 ‘그 사람의 삶’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단지 그 ‘이미지’를 사랑하는 것이기 쉽다. 즉 그 사람의 얼굴이 좋아서, 그 사람의 자태가 멋있어서, 그 사람의 걸음걸이가 외로워 보여서 사랑한다고 느끼는 것이다. 하지만 그 사람의 삶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상처, 생각, 그 사람의 어린 시절과 미래에 늙어가면서 겪게 될 일들까지 사랑한다는 뜻이다.’ 77쪽

 

 사람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의 삶을 사랑하는 일이라는 저자의 말은 정현종의 시를 찾게 만든다. 한 사람을 사랑하고 알아가는 과정에서 부딪히는 모든 것들을 안을 수 있는 것, 그것이야말로 참 사랑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말처럼 쉽지 않기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이별을 받아들이고, 잔혹하게 이별을 고하기도 한다.

 

 ‘사람이 온다는 건 /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 그는 / 그의 과거와 / 현재와 /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 부서지기 쉬운 /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 마음이 오는 것이다 ㅡ 그 갈피를 / 아마 바람은 더듬어볼 수 있을 마음 /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낸다면 /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정현종의 방문객 전문)

 

 사랑을 하면서 행복을 꿈꾸지 않는 이가 있을까?  아니, 뻔한 고통이 전개될 거라는 알면서도 사랑을 놓지 못한다. 연애 고전으로 익숙한 《오만과 편견》, 《폭풍의 언덕》, 《순수의 시대》보다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에 마음이 기우는 이유도 그런 마음일 것이다. 읽지 못한 다른 고전보다 이 책을 읽고 싶게 만드는 건 저자의 이런 말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나는 사랑하는 남자의 삶을 다 가지려 하지 않는다. 여기서 나는, ‘남자’ 가 아니라 ‘남자의 삶’ 이라고 했다. 니나에겐 언제나 삶이 중요했다. 자신이 개입할 수 없고 어찌하지 못하는 남자의 삶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자신의 삶을 슈타인이 어떻게 하지 못했듯이, 남자도 그랬으리라 믿었던 것이다.’ 251쪽

 

 사랑하는 연인의 삶 전부를 갖기를 원하지 않는 사랑은 얼마나 서글픈가. 그러니 데이지를 향한 개츠비의 사랑이 안타까운 것이다. 남자와 여자가 사랑하는 방법은 분명 다르다. 그러나 한 사람만을 향한 사랑의 크기는 같지 않을까. 어쩌면 데이지와 개츠비가 바라보는 방향이 같았다면 우리는 개츠비를 기억하지 않았을 것이다.

 

 ‘개츠비가 바라보던 데이지의 집 ‘초록 불빛’ 도 미래가 아니라 과거에 속해 있었던 것이다. 사랑에 대한 희망도 과거에 이루지 못한 그 무언가에 들어 있다. 우리는 과거로 향한 희망의 불빛을 응시하는 또 한 명의 개츠비를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두려워 말고, 그 야성의 남자를. 당신의 그 개츠비는 오로지 당신만을 죽도록 사랑할 것이다.’ 270쪽

 

 이쯤에서 사랑의 그늘에 속한 당신에게 묻는다. 사랑을 하고 있음에도 우리는 왜 늘 외로운 것일까. 깊은 밤 잠든 가족을 바라보면서 가슴 한 쪽에서 전해지는 통증을 느낀 적이 있다면 페터 한트케의 《왼손잡이 여인》속 마리안느를 아는 사람일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다 알 수 없는 존재로 남는다. 언제나 미지의 존재다. 우리가 자기 연인을, 혹은 배우자를 다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사람을 이해하는데 언제나 실패한다. 만약 그/그녀가 그토록 쉽게 파악되는 빤한 사람이라면 우리가 그/그녀를 사랑했겠는가. ‘나는 그/그녀를 모른다, 그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그녀를 사랑한다’가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사랑의 본질에 가장 가까운 명제가 아닐까.’ 366쪽

 

 한 번쯤 읽어본 고전이거나 낯선 고전 속에서 마주한 사랑은 느낌표가 아닌 물음표로 남는다. 사랑이라는 건 우리 생에 주어진 영원한 숙제인지도 모른다. 이 책이 사랑에 대해 묻고 싶었던 질문의 정답을 제시한 건 아니다. 사랑을 하는 이에게, 혹은 사랑을 잃은 이에게 그 사랑이 제대로 된 사랑인가 가만히 들여다보게 만든다는 게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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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고 차가운 오늘의 젊은 작가 2
오현종 지음 / 민음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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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언가 되고 싶었던 시절은 사라지고 없다. 더 이상 어떤 꿈꾸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저 하루를 살아갈 뿐이다. 어떤 상황이든 노력하면 꿈을 이룰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시대는 존재하지 않는다. 타고난 운, 환경에 따라 어떤 이의 삶은 성공으로 이어지고 어떤 이의 삶은 나락으로 떨어진다. 그렇게 삶은 천국과 지옥으로 나눠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모두가 천국이라 부르는 곳에 사는 이는 그곳을 천국이라 부르지 않는다. 오현종의 소설 『달고 차가운』속 지용이 지옥에 산다고 여긴 것처럼 말이다.

 

 소설은 얼핏 소년과 소녀의 아릿한 첫사랑의 이야기처럼 보인다. 내 의지가 아닌 부모가 원하는 대학 입학을 위해 재수를 택한 지용은 학원에서 신혜를 만난다. 신혜가 사는 세상은 자가용으로 학원에 다니며 고액 과외를 받는 지용의 세상과는 달랐다. 술장사하며 자신을 학대하는 엄마와 사는 신혜에게 지용의 투정은 사치였다. 새아빠의 죽음으로 돌봐야 하는 동생을 위해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는 신혜를 사랑했고 그곳에서 구해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사는 게 너무 불안하다고 했지. 네가 살고 있는 집이 지옥이라고 했지. 난 진짜 지옥이 어떤 곳일까 궁금해. 거기는 아직 나도 모르고, 너도 모르는 장소일 거야. 그렇지만 언젠가 내가 가게 될 곳. 넌 아니고 나만. 강지용, 네가 있는 데는 지옥도 아니고 좆도 아냐, 이 바보야.” 67쪽

 

 스무 살은 어른처럼 보이는 나이지만 삶을 결정하고 판단하기엔 미숙한 나이다. 지용은 신혜의 엄마를 죽이는 일을 치밀하게 계획하고 저지르고도 전혀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 사랑하는 신혜를 위해, 악의 세계에서 구해낼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다시 입시에 실패한 지용은 누나가 있는 뉴욕으로 떠나면서도 1년 후에 돌아올 거라 신혜와 약속한다. 온라인에서 둘 만 아는 암호로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며 지낸다. 하지만 신혜와 연락이 끊기자 결국 한국으로 돌아오고 만다.

 

 신혜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두려움을 안고 자신이 범죄를 저질렀던 그 집을 찾았을 때 지용은 신혜의 실체를 마주한다. 그 집은 강도가 들었고 나중에 불이 나서 타버렸고, 새아빠는 교통사고로 죽지 않았으며 동생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용은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확인해야만 했다. 지용은 흥신소를 통해 신혜가 죽은 엄마의 보험금 2억을 받고 사라졌다는 사실에 경악한다. 신혜는 지용을 사랑한 게 아니라, 계획적으로 이용한 것이다. 엄마의 남자를 사랑한 신혜에게 엄마는 사라져야 할 존재였다. 그토록 그리워했던 신혜는 한국이 아닌 홍콩에 있었다. 불법으로 싸구려 민박집을 운영하고 있었다. 벗어나고 싶었던 세상을 나온 신혜는 천국이 아닌 지옥에 사는 것처럼 보였다.

 

 ‘양팔 저울은 기울어졌다. 신혜와 남자가 불행해졌으므로 나는 행복해야 한다. 그러나 아무래도 그럴 것 같지가 않았다. 변함없이 불행했고, 복수는 이루어지지 않은 기분이었다. 얼른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나는 쫓기는 자가 아니라 쫓는 자였는데, 그런데 당장 달아나지 않으면 영영 밖으로 나갈 수 없을 것 같았다. 이 방은 너무 좁고 습하고 어두웠다.’ 181쪽

 

 두 아이의 죄를 벌할 수 있는 이가 누구일까? 어쩌면 신혜와 지용은 자신들이 저지른 죄에 대해 지독하고 혹독한 대가를 치르는 건지도 모른다.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거대한 통증과 서늘한 여운을 남긴다. 제목처럼 달고 차가운 맛의 소설이다. 더불어 우리 삶에 달고 차가운 맛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려준다. 달콤함 뒤에 날카로운 고통이 찾아온다 해도 먹을 수밖에 없는 삶이라는 걸 말이다.

 

 ‘신혜에게서 부드러움을 알게 된 순간처럼 지금 이 고통으로부터 영원히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신혜는 달콤한 사과를 건네주고, 내가 그것을 달게 먹고 나자 고통을 알게 하는 사과였다고 속삭인 거다. 하지만 처음부터 알았다 해도 나는 그것을 삼켰겠지. 나는 정말 어린아이였다. 그녀 말대로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였다. 그러나, 고통은 실상 사과에서 오는 게 아니라 사과를 건넨 부드러운 손길로부터 온다는 진실만은 알았다.’ 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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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름마치 - 진옥섭의 사무치다
진옥섭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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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존하고 지키려고 할 때는 이미 늦은 경우가 많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어 사소하게 여겼던 것들이 사라질 때 우리는 비로소 그 가치를 깨닫는다. 특히 예술과 전통이 그렇다. 그래서 『노름마치 : 진옥섭의 사무치다』가 반갑고 고마웠다. 흥이 많은 민족이라고 말하지만 정작 그것에 대한 애정의 크기는 얼마나 될까. 사라지는 소리와 춤을 온몸으로 기억하고 전하고자 노력하는 이들에 대한 이야기는 때로 절박했고 때로 간절했다.

 

 ‘걷는 건 두렵지만 춤을 추는 것은 두렵지 않다. 몸속에 소리와 음악이 모두 들어 있어 선율의 흐름에 다라 그때그때 춤이 달라진다. 전통이란 이름 속에서 순간순간 새것이 돋아난다. 이런 순간은 맛보는 순간 중독이다. 결국 또 들여다보고픈 과욕이 극성스런 길을 가게 한다. 정녕 보고픔도 극심한 허기의 일종인 것이다.’ 24쪽

 

 저자는 이 책을 보도자료라도 말한다. 그 속엔 발로 뛰고,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가슴으로 느낀 모든 것이 담겨 있다는 뜻이리라. 책에서 만나는 춤꾼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기녀, 무당, 광대, 소리꾼 이라 불리는 분들이다.  예기(藝技), 남무(男舞), 득음(得音), 유랑(流浪), 강신(降神), 풍류(風流) 로 나누어 각 분야에 세 명씩 모두 18분의 삶을 들려준다. 하지만 ‘공옥진’을 제외하면 대부분 낯선 이름이 많다. 그만큼 전통문화라는 범주에서 벗어나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진 것이다. 이 얼마나 부끄럽고 안타까운 일인가.

 

 공통적으로 그들이 춤의 세계로 들어간 건 가난이라는 이유로 어쩔 수 없이 선택했거나 운명적으로 춤에 끌린 경우였다. 그러나 춤은 그들에게 운명이었다. 화려하게 보이는 춤 뒤에는 고통이 내재되어 있었다. 춤으로 가족을 살렸고, 춤 때문에 버림받기도 했고, 소리 때문에 살아 남기도 했다. 이제는 평균 연령이 80세가 넘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었고, 기녀와 무당이었다는 이유로 자손들에게 누가 될까 숨기고 있었지만 끓어오르는 춤에 대한 열정은 감출 수 없었다. 시골에서 자란 어린 시절을 기억해 보면 굿은 동네의 잔치이자 위로였다. 모두가 한 자리에 모여 누군가의 아픔을 함께 걱정하고 풍년을 기원했다. 감히 누가 그들의 춤에 대해 논할 수 있으며 감히 누가 그들의 삶을 말할 수 있겠는가. 혼을 다한 춤사위에 감동할 뿐이다.

 

 전통이라는 거창한 이름이 아닌 ‘우리 것’ 이라는 단순한 이유만으로 부활되고 계승되어야 한다. 그러기위해서 우리는 제대로 기억하고 배워야 한다. 집안 내력을 따라 광대의 딸이라 불렸던 심화영 할머니의 말씀은 춤뿐 아니라 내면이 아닌 보이 것들에만 치중하는 우리네 삶에 대한 충고 같아 괜히 뜨끔하다.

 

장단을 치다가 벌떡 일어나 북걸이를 잡고 버섯발을 들어올리는데, 큰 구경이라도 한 것처럼 눈에 새로웠다. “맹글어 추지 말어, 호흡보다 몸이 놀아야 혀.” 요사이 조형에만 신경쓰는 전통춤을 향한 말이었다. 무척 자연스러운 몸놀림이었다. 호흡이라는 말보다 숨이란 말로, 몸 가는 대로 추는 춤이었다.’ (「중고제의 마지막 소리, 심화영」 중에서 96쪽)

 

 지키려 한 삶도 평탄하지 않았다. 유랑광대로 살아온 김운태 님은 포장극장이 아닌 두레극장을 개관했지만 경영에 실패했다. 풍물을 배우고 소고춤만을 추었으니 경영의 실패로 부도는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구치소 생활을 하고 나온 그에게 춤은 유일한 것이었다. 현역 춤꾼으로 그의 황홀한 춤을 볼 수 있다는 건 정말 감사할 일이다.

 

규칙과 불규칙 속을 노니는 게 그의 삶이자 춤이다. 대개의 춤꾼이 발꿈치 가운데 중심을 둔다면 그는 모든 감각을 엄지발가락 근처에 싣는다. 무대 위에서 페달을 밟듯, 이미 뒤꿈치를 들고 어디론가 이동할 태세로 춤을 추는 것이다. 안락한 안보다 투박한 밖을 지향한 유목하는 인간, 홀로 노마드인 것이다.’ (「포장극장의 소년 신동, 김운태」 중에서 258쪽)

 

 예인(藝人)으로 산다는 건, 명인(名人)으로 불리는 건 특별한 삶이 아니었다. 그저 몸이 하는 소리를 듣고 몸으로 전하는 삶이다. 몸이 신나게 놀고 그것에 함께 취하는 삶, 이 얼마나 즐거운가. 우리는 이 즐거움을 계속 누려야 한다. ‘우리 것’ 을 즐기는 일이야말로 전통을 지키고 보존하는 가장 최고의 방법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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