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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고 차가운 ㅣ 오늘의 젊은 작가 2
오현종 지음 / 민음사 / 2013년 7월
평점 :
무언가 되고 싶었던 시절은 사라지고 없다. 더 이상 어떤 꿈꾸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저 하루를 살아갈 뿐이다. 어떤 상황이든 노력하면 꿈을 이룰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시대는 존재하지 않는다. 타고난 운, 환경에 따라 어떤 이의 삶은 성공으로 이어지고 어떤 이의 삶은 나락으로 떨어진다. 그렇게 삶은 천국과 지옥으로 나눠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모두가 천국이라 부르는 곳에 사는 이는 그곳을 천국이라 부르지 않는다. 오현종의 소설 『달고 차가운』속 지용이 지옥에 산다고 여긴 것처럼 말이다.
소설은 얼핏 소년과 소녀의 아릿한 첫사랑의 이야기처럼 보인다. 내 의지가 아닌 부모가 원하는 대학 입학을 위해 재수를 택한 지용은 학원에서 신혜를 만난다. 신혜가 사는 세상은 자가용으로 학원에 다니며 고액 과외를 받는 지용의 세상과는 달랐다. 술장사하며 자신을 학대하는 엄마와 사는 신혜에게 지용의 투정은 사치였다. 새아빠의 죽음으로 돌봐야 하는 동생을 위해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는 신혜를 사랑했고 그곳에서 구해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사는 게 너무 불안하다고 했지. 네가 살고 있는 집이 지옥이라고 했지. 난 진짜 지옥이 어떤 곳일까 궁금해. 거기는 아직 나도 모르고, 너도 모르는 장소일 거야. 그렇지만 언젠가 내가 가게 될 곳. 넌 아니고 나만. 강지용, 네가 있는 데는 지옥도 아니고 좆도 아냐, 이 바보야.” 67쪽
스무 살은 어른처럼 보이는 나이지만 삶을 결정하고 판단하기엔 미숙한 나이다. 지용은 신혜의 엄마를 죽이는 일을 치밀하게 계획하고 저지르고도 전혀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 사랑하는 신혜를 위해, 악의 세계에서 구해낼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다시 입시에 실패한 지용은 누나가 있는 뉴욕으로 떠나면서도 1년 후에 돌아올 거라 신혜와 약속한다. 온라인에서 둘 만 아는 암호로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며 지낸다. 하지만 신혜와 연락이 끊기자 결국 한국으로 돌아오고 만다.
신혜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두려움을 안고 자신이 범죄를 저질렀던 그 집을 찾았을 때 지용은 신혜의 실체를 마주한다. 그 집은 강도가 들었고 나중에 불이 나서 타버렸고, 새아빠는 교통사고로 죽지 않았으며 동생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용은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확인해야만 했다. 지용은 흥신소를 통해 신혜가 죽은 엄마의 보험금 2억을 받고 사라졌다는 사실에 경악한다. 신혜는 지용을 사랑한 게 아니라, 계획적으로 이용한 것이다. 엄마의 남자를 사랑한 신혜에게 엄마는 사라져야 할 존재였다. 그토록 그리워했던 신혜는 한국이 아닌 홍콩에 있었다. 불법으로 싸구려 민박집을 운영하고 있었다. 벗어나고 싶었던 세상을 나온 신혜는 천국이 아닌 지옥에 사는 것처럼 보였다.
‘양팔 저울은 기울어졌다. 신혜와 남자가 불행해졌으므로 나는 행복해야 한다. 그러나 아무래도 그럴 것 같지가 않았다. 변함없이 불행했고, 복수는 이루어지지 않은 기분이었다. 얼른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나는 쫓기는 자가 아니라 쫓는 자였는데, 그런데 당장 달아나지 않으면 영영 밖으로 나갈 수 없을 것 같았다. 이 방은 너무 좁고 습하고 어두웠다.’ 181쪽
두 아이의 죄를 벌할 수 있는 이가 누구일까? 어쩌면 신혜와 지용은 자신들이 저지른 죄에 대해 지독하고 혹독한 대가를 치르는 건지도 모른다.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거대한 통증과 서늘한 여운을 남긴다. 제목처럼 달고 차가운 맛의 소설이다. 더불어 우리 삶에 달고 차가운 맛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려준다. 달콤함 뒤에 날카로운 고통이 찾아온다 해도 먹을 수밖에 없는 삶이라는 걸 말이다.
‘신혜에게서 부드러움을 알게 된 순간처럼 지금 이 고통으로부터 영원히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신혜는 달콤한 사과를 건네주고, 내가 그것을 달게 먹고 나자 고통을 알게 하는 사과였다고 속삭인 거다. 하지만 처음부터 알았다 해도 나는 그것을 삼켰겠지. 나는 정말 어린아이였다. 그녀 말대로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였다. 그러나, 고통은 실상 사과에서 오는 게 아니라 사과를 건넨 부드러운 손길로부터 온다는 진실만은 알았다.’ 7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