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내가 있는 이곳은 한때 가장 떠나고 싶었던 곳이다. 아이러니하게 인생은 나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만들었다. ‘정착’이라는 단어를 쓸 정도는 아니지만 말이다. 지방의 소읍에서 시간의 속도는 아주 느리다. 지방 국도의 규정 속도로 살고 있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다. 모두가 그런 건 아니고 내 삶의 속도는 적어도 그렇다. 돌아왔다고는 하나 익숙한 곳은 아니다. 여전히 나는 이곳에 대해 잘 모르고 맛 집이나 관광지를 묻는 질문의 답을 찾지 못한다. 그것들에 상관없이 살아갈 뿐이다. 줌파 라히리의 『내가 있는 곳』을 자꾸만 ‘내가 사는 곳’이라 읽게 된다. ‘있는 곳’과 사는 ‘사는 곳’은 같은 것 같지만 전혀 다르다. 어쩌면 그건 줌파 라히리가 이방인이라 그런지도 모른다. 모국어가 아닌 이탈리아어로 글을 쓰는 일, 아니 그것으로 소설을 쓰는 일은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했을까.

 

소설을 읽으면서 잠시 머무는 곳 그 이상의 의미를 두고 쓴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소설이라고 분류했지만 이 책은 소설보다는 일상의 관찰이며 기록이라 하고 싶다. 46개의 짧거나 긴 글에서 그녀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차분하게 정리한 글로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무미건조하고 메마른 건 아니다. 소설의 화자인 ‘나’는 학생을 가르치는 교수이며 혼자 살고 있고 주변의 동료나 친구들과 사귐에 있어 수동적이다. 어쩔 수 없이 맺어진 관계, 혹은 그런 사이를 유지하는 일에 대해 힘들어한다. 일로 엮인 모임이나 만남에서 겉돌고 사랑했던 연인과의 현재 관계도 마찬가지다.

 

이따금 내가 사는 동네 길거리에서 함께 어떤 이야기, 어쩌면 인생을 같이 만들어나갈 수도 있었을 한 남자를 만난다. (「길에서」)

 

한때 사랑했던 남자를 언제 어디서든 만날 수 있는 곳에 그녀가 산다. 집 주변 보도, 다리, 서점, 길거리, 카페, 식당, 병원 대기실, 박물관, 산책길, 빌라…. 그곳에서 마주할 수 있는 일상은 지극히 보편적이다. 그러나 그녀의 시선에 비친 일상은 보편적이면서도 특별하다. 그 모든 곳이 그녀에겐 내면의 공간이며 심적인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만나고 헤어지는 이들에 대한 감정도 비슷하다. 혼자라는 삶에서 묻어나는 외로움을 견디는 일상, 그리고 그 안에서 발견하는 거룩하고 존엄한 삶의 모습들.

 

노부인은 지금 공원에서 시끄럽게 소리치며 놀고 있는 아이들보다 더 활기가 넘쳐 보인다. 끈으로 연결된 두 사람이 이미지가 날 감동시킨다. 그들 사이의 헌신, 연결된 삶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 난 우리 안에 흐르는, 순환되어야 하는 규칙적으로 제거돼야 하는 물질을 생각한다. 숨겨진, 흉하지만, 중요한 작업들. (「빌라에서」)

 

나는 나이면서 그렇지 않아요. 떠나지만 늘 이곳에 남아 있어요. (「산책길에서」)

 

소설 곳곳에서 그녀는 떠나기를 원하면서도 주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예민하고 복잡 미묘한 내면의 감정을 느낀다. 어떤 공간에서 느끼는 묘한 안도감, 혹은 두려움을 생각한다. 공간의 힘은 그런 것이다. 기억 저편의 자리에서 여전히 살아있는 공간, 사라졌지만 사라지지 않은 공간이 갖는 능력처럼 말이다. 줌파 라히리에게 이탈리아는 어떤 공간이며 어떤 의미일까. 어쩌면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마주하는 특정 장소, 공간과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줌파 라히리의 소설에서 마주하는 공간은 건축가 유현준이 『당신의 별자리는 무엇인가요』에서 들려주는 공간 이야기가 전해주는 감정과 닮았다. 유현준의 공간에는 기억과 추억이 있고 줌파 라히리의 소설 속 공간에는 그것들이 생성되고 자라고 있다. 어쩌면 그녀에게 필요한 건 유현준의 이런 문장은 아닐까.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공간은 가장 많은 삶을 빚는 공간이다. 그곳이 좋아야 그 사람의 삶의 질도 좋아진다. (『당신의 별자리는 무엇인가요』)

 

모든 길은 다 통한다. 홍대에서 한남동으로 가야 한다고 치자. 가는 길은 수없이 많다. 강변북로를 타고 가도 되고, 삼각지와 이태원을 거쳐서 가도 되고, 남산 순환도로를 통해서 가도 된다. 신촌오거리를 통해서 가다가 길이 막히면 아현동 사거리에서 우회전해 공덕동을 통해서 돌아가도 된다. 길을 바꿔 가도 목적지는 같다. 다만 경치만 달라질 뿐이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계획했던 길이 막히면 다른 길로 가면 된다. 그리고 그것이 모여서 새로운 풍경이 되는 것이다. (『당신의 별자리는 무엇인가요』)

 

공간은 우리의 생이 완성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목격자이며 동반자다. 내가 있는 곳에 하루하루가 쌓인다. 언젠가 이곳을 떠난다 하더라도 삶의 흔적은 고스란히 남는다. 많은 시간이 지났어도 문득 그곳을 지나치거나 생각하면 지우고 싶은 감정과 인연들까지 떠오르는 걸 보면 말이다.

 

줌파 라히리의 소설을 빌려 내 삶의 현재인 이곳을 천천히 둘러본다. 어두운 새벽에 등불처럼 환했던 벚꽃나무 길, 자주 찾는 식당과 카페, 멀리서 사는 친구가 오면 항상 방문하는 바닷가, 수목원…. 누군가 나를 생각하면서 떠올릴 공간도. 처음에 뿌리내린 곳을 벗어날 수 없는 나무와 다르게 우리는 그곳에서 살다가 이곳으로 옮겨오고 다시 그곳으로 가기도 한다. 내가 있는 곳은 영원한 공간처럼 여겨지기도 하고 찰나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내가 있는 곳을 사랑하고 그곳에서 보는 삶의 풍경, 그리고 맺어지는 관계에 대해서도 다르지 않다. 삶은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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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그치고 꽃들은 저마다의 색을 뽐낸다. 벚꽃은 벚꽃답게, 개나리는 개나리답게 고유의 색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봄이라는 계절의 생동감을 느낀다. 뭐든지 기지개를 켜는 봄, 그러나 실상 우리가 마주한 봄은 자꾸만 움츠러들게 만든다.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눈빛에서 슬픔을 본다. 어제 내린 비가 조금 일찍 내렸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부질없는 바람.

친구와 통화를 하면서도 우리는 보이지 않는 희망과 키울 수 없는 바람에 대해 말한다. 요양병원에 계신 아버지를 돌보는 마음, 가장 현명한 방법으로 택한 결정이었지만 아버지를 보면 안타까운 마음을 감출 수 없고 그 사실을 듣는 나는 친구의 속상한 현실을 달래주지 못한다. 그저 나의 마음을 모아 친구에게 전하고 싶다. 또 누군가의 마음을 받고 싶다.

노인이 된다는 것, 내 의지대로 내 몸을 움직일 수 없다는 절망감, 언젠가 나의 모습도 다르지 않을 거라는 막연하면서도 정확한 예감까지. 당연한 수순으로 나아가는 삶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삶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사는 게 녹록지 않다는 걸 체감하면서도 어디선가 달려오는 불행에 우리는 망연자실한다. 예측 가능한 삶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예측 가능하다면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기에 어딘가 깊게 숨어버린 것일까.

이런 기분에서 헤어 나올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글을 읽고 싶다. 어떤 내용인지도 모르면서 엊그제 방송에서 본 정혜신의 책, 오래전에 만났던 한귀은의 문장, 사람의 눈빛이 제철이라며 봄날을 노래한 박준의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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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10층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일은 조금 아찔하다. 고층 건물이 늘어나고 그 높이를 상상할 수 없는 공간에서 일상을 지속하는 많은 이들에게 10층이라는 높이는 그저 그럴지도 모르지만. 미세먼지를 걱정하는 날들에는 창을 열지 않고 환기도 미룬다. 그러다 보니 차가운 바람을 맞이하는 요즘 오히려 더 자주 환기를 한다. 그리고 나는 목련을 보았다. 숨은 그림 찾기를 하듯 목련을 봤다. ‘발견’이라는 말을 쓰고 싶은 정도로 나는 그 목련이 반가워 목을 길게 빼고 전화기를 떨어뜨릴지도 모르는 불안을 안고 사진을 찍었다. 뭔가 홀린 듯 말이다.

 

 

 

 

올려다보는 일만큼 내려다보는 일은 힘이 들었다. 고개를 드는 일, 고개를 깊숙이 내리는 일. 내려다보는 일에 대해 쉽게 생각하고 있었다. 오르는 일에 비해 내려오는 게 수월하다고 여긴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높은 곳을 보고 그곳을 향해서만 살아가는 것 같다. 더 많은 숫자, 더 넓은 숫자로 이뤄지는 삶을 꿈꾼다. 그 시작이 0이었다는 걸 기억하는 이가 있을까? 채우려고만 하는 것이다.

비우는 일, 위만 바라보느라 아픈 고개를 숙여 아래를 내려다보는 일. 스트레칭이 필요한 목처럼 우리에게 필요한 일이다. 저마다의 아래, 그곳에서 발견한 풍경은 어떤 모습 어떤 빛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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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란하게 봄비가 내렸다. 아파트 근처에 씨앗을 심을 준비로 땅을 고른 밭에는 충분한 양이 아니었을까 싶다. 봄비가 지나간 자리에 연두가 가득할 거라 기대한다. 연두라는 말을 하는 동안 입안에 싱그러움이 돋아나는 듯하다. 연두와 초록이 주는 산뜻하고 상쾌한 이미지. 어떤 말을 꺼낼 때, 누군가와 말을 주고받을 때 그런 기분이 떠다닌다면 얼마나 좋을까. 말은 때로 피로하다. 유독 말을 많이 했을 때 나의 일부가 소진되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반대로 말은 편안하다. 우리는 말이라는 통로로 불쾌한 감정을 쏟아낸다.

 

말이 사라진 정적을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은 외로운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그곳에 고요가 있다는 걸 모르고 있기에 그럴지도 모른다. 고요와 하나가 된다면 덜 외로울 텐데. 아니, 외로움을 느끼는 건 다행한 일이다. 곁을 내주고 싶은 마음이 자라고 있다는 것이며, 누군가의 곁에 머물고 싶다는 신호일 테니까.

 

말을 뒤로하고 책을 읽는 시간은 오롯이 혼자여도 충분하다. 잘 읽히지 않는 책을 잡고 씨름하고 있더라도 말이다. 행간을 따라가다 다시 돌아오고 책 속의 등장하는 사물이나 이름을 속삭이듯 가만히 소리 내어 말하는 일. 책을 읽을 때 종종 노래를 듣는다. 말을 뒤로한다고 하면서도 노랫말에 의지한다. 말을 그리워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책은 누군가의 말이다. 듣고 싶은 말, 목소리를 상상하는 말은 이런 책이다. 줌파 라히리의 『내가 있는 곳』, 아니 에르노의 『세월』, 김훈의 『연필로 쓰기』.

 

 

 

 

 

 

 

 

 

 

 

 맥락 없고 갈피를 잡을 수 없는 혼잣말로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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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9-03-22 0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 읽고 싶은 책이네요 잘지내시죠?^^

자목련 2019-03-25 16:42   좋아요 1 | URL
신간이 나올 때마다 그들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없어요, ㅎ
꽃샘추위가 기승이네요. 감기 조심하세요^^

blanca 2019-03-22 0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 제가 점찍은 책들이라 반갑네요. ^^ 자목려님과 취향이 겹치는 것 같습니다.

자목련 2019-03-25 16:43   좋아요 0 | URL
겹치는 취향, 반갑고 좋아요. 어느 시각, 다른 공간에서 같은 책을 마주하는 풍경을 상상합니다^^
 

 

지난 2월 국립중앙의료원 중앙응급의료센터 센터장 윤한덕 교수가 집무실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뉴스를 통해 전해 들은 소식은 충격적이었다. 그의 장례식에서 이국종 교수가 비통한 얼굴로 추도사를 읽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대학병원에서 전공의가 숨진 일도 보도되었다. 자신의 분야에서 최선을 다해 일하는 이들에게 무참한 결과였다. 생명을 다루는 일 소중하고 숭고하다. 사명감도 필요하다. 그 사명감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특정인에게만 부여해야 하는 것일까. 이국종의 『골든아워』를 읽으면서 그들의 삶을 생각한다. 이 책은 읽는 과정도 힘들고 그것에 대해 말을 하고 글을 쓰기가 더욱 어려웠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외상외과’와 ‘외과’의 차이를 알지 못했다. 병원 신세를 많이 졌고 지금도 정기적으로 진료를 받으러 다니고 있지만 의사가 쓴 글에 대해 회의적이었다고 할까. 언론을 통해 그의 행적을 알고 있었고 최근엔 통신사 광고 모텔로 활약한 모습을 지켜보았지만 그가 쓴 책에 대해 큰 기대나 관심이 없었다. 그가 출연한 예능 토크쇼를 시청하지 않았더라면 이 책을 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중증외상 환자들에게 수술은 치료의 시작일 뿐, 환자는 수술만으론 살아 돌아오지 못한다. 중환자실에서 수많은 인공생명유지장치들과 약물들을 총동원해 집중치료를 받아야만 하고, 이 지난한 과정을 버텨내지 못하면 환자는 죽는다. (1권. 85쪽)

 

가벼운 유머나 농담은 절대 하지 않을 사람으로 보였다. 그럼에도 그의 얼굴에서는 단호함과 동시에 연약함이 묻어났다. 우리가 직접 경험하는 의료현장이 아닌 증증외상 환자의 이동과 그에 대한 치료방법과 이 땅의 의료현실의 민낯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 그 방송은 내게는 충격이었다. 닥터헬기에 대한 민원은 진짜 사람들이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일까 의아했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 출동한다는 걸 아는 이들이 그럴 수 있을까. 그가 들려주는 중증외상센터는 사선의 현장이었다.

 

피는 도로 위에 뿌려져 스몄다. 구조구급대가 아무리 빨리 사고 현장으로 달려가도 환자는 살지 못했다. 환자의 상태를 판단할 기준은 헐거웠고, 적합한 병원에 대한 정보는 미약했다. 구조구급대는 현장으로부터 가장 가까운 병원을 선택할 것이어서 환자는 때로 가야 할 곳을 두고 가지 말아야 할 곳으로 옮겨졌고, 머물지 말아야 할 곳에서 받지 않아도 되는 검사들을 기다렸다. 그 후에도 다른 병원으로 옮겨지고 옮겨지다 무의미한 침상에서 목숨이 사그라들었다. 그런 식으로 병원과 병원을 전전하다 중증외상센터로 오는 환자들의 이송 시간은 평균 245분, 그 사이에 살 수 있는 환자들은 죽어나갔다. 그렇게 죽어나가는 목숨들은 선진국 기준으로 모두 예방 가능한 죽음이었다. (1권. 148~149쪽)

 

막상 글로 접하는 그곳은 아비규환이었다. 생생한 현장의 기록을 읽는 일은 고통 그 이상의 고통을 안겨주었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기록한 글을 읽으면서 때로 마주하는 잔혹한 현실이 픽션이기를 바랐다. 정말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영화나 소설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누군가는 절대로 그런 곳에 갈 일이 없을 거라 장담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자신의 삶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하지만 누구나 사고를 당사자가 될 수 있고 내 가족이나 지인이 그곳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이기적인 우리는 증증외상센터에 대해 불만의 시선을 보내는 대학의 보직교수나 탁상공론을 펼치는 정치가와 다르지 않았다.

 

2002년부터 2018년까지 증증외상센터의 기록은 감동적이었고 참담했다. 그곳에서 팀을 이끄는 수장으로 이국종 교수가 느꼈을 비루하고 절박한 생의 무게가 나를 짓눌렀다. 필요한 인력을 충원하지 못하고 경비를 위해 손님 대접을 위한 티 구매 비용까지 줄이고 출동 현장에서 다쳤을 때 병가를 낼 수도 없고 치료비를 신청할 수도 없는 현실이라니. 하루하루 버티고 견디는 게 얼마나 무섭고 두려웠을까. 과한 업무로 유산을 한 간호사, 죽음의 공포를 무릅쓰고 소방헬기에 오르는 의사, 소방관, 그들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출동했다. 중증외상센터는 정말 필요한 곳이었고 충분한 지원을 해야 하는 곳이었다. 그런데 정부와 병원의 담당자가 바뀔 때마다 다른 입장을 내놓고 적자의 온상이라면 이국종 교수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는 고립되어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발끝만 보았다. 물러설 곳이 없이 하루를 버텨나갈 때였으므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꿈조차 꾸지 못했다. (1권. 102쪽)

 

그냥 할 수 있는 데까지…… 나는 늘 내가 어디까지 해나가야 할지를 생각했다. 어디로, 어디까지 가야 하는가. 스스로 묻고 또 물었다. 답이 없는 물음 끝에 정경원이 서 있었다. 하는 데까지 한다. 가는 데까지 간다…… (2권. 316쪽)

이국종 교수는 많이 지쳐있었다. 감정과 표정을 잃어버린 사람 같았다. 그의 글에서는 불필요한 설명은 찾을 수 없었고 해야 할 말만 기록으로 남겼다. 이 기록이 가까운 미래에 중증외상센터를 위해 필요한 기록이라 믿으면서 말이다. 이 책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너무도 화가 나고 답답하다가 울컥하고, 아프다가 따뜻했던 책이다. 개인적으로 2권의 마지막 <인물지>가 주는 감동은 이루 형용할 수 없다. 그들의 이름을 부르고 기록하는 이국종 교수의 마음은 어땠을까. 식구이자 동지였던 그들에게 보내는 경건한 마음은 아니었을까. 하지만 내가 하는 이야기는 당신의 마음에 온전히 들어갈 수 없고 중증외상센터의 일상을 보여줄 수 없다. 그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건 오직 읽는 일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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