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일런트 페이션트
알렉스 마이클리디스 지음, 남명성 옮김 / 해냄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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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의에 도달하는 분노나 누군가를 죽이게 되는 감정은 기억보다 이전에 속하는 곳, 아주 어린 유년기 세상에서 학대와 혹사를 당하는 가운데 오랜 세월에 걸쳐 생겨나고 결국에는 폭발한다. 가끔은 엉뚱한 상대를 향해 폭발하기도 한다. (62쪽)

의사를 전달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말이다. 상대의 눈을 보고 직접 자신의 상태를 설명하고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하지만 말은 감정에 따라 원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간다. 이를테면 큰소리를 내 거나 욕설이 나오거나 조리가 맞지 않는다. 그럴 때 말이 아닌 다른 방법을 찾는 게 좋다. 잠깐 호흡을 고르며 말을 멈춘 후 상대의 입장을 듣고만 있거나 편지나 문자로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다. 극단적인 선택은 대화의 단절이다. 스스로 입을 닫거나 극도로 충격적인 일을 경험했을 때 말을 잃어버린다. 후자의 경우는 자발적인 게 아니므로 치료가 필요하다. 남편을 잔혹하게 죽인 아내가 입을 열지 않는다면 대체로 전자의 경우라 생각할 것이다. 묵비권을 행사한다고 말이다. 그러나 진실을 알고 있는 게 아내뿐이라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닐까 의심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알렉스 마이클리디스의『사일런트 페이션트』속 아내 앨리샤의 이야기다.


화가인 앨리샤는 남편을 죽인 후 자해를 시도했고 침묵으로 일관한다. 6년이란 시간이 흐르는 동안 살해 동기를 밝히거나 자신을 변호하지 않는다.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상태지만 여전히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런 그녀가 심리상담사 테오와 만났다. 여타의 의사나 치료사에게 그랬듯 앨리샤는 테오를 폭행하고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는다. 소설은 앨리샤와 테오의 목소리를 교차로 들려주면서 사건의 진실에 가까이 다가간다.

과거 어린 시절 아버지의 폭행으로 상처를 입은 테오는 상담을 통해 치유를 받으면서 상담사의 길을 선택했다. 앨리샤에게도 분명 어떤 이유가 있을 거라 직감한 그는 주변 인물과 연락을 시도한다. 단순 치료를 위한 만남일까 싶을 정도로 집요하게 앨리샤에 대해 탐문한다. 앨리샤와 테오가 상담을 하는 장면은 짐작할 수 있듯 테오 혼자서 말을 하는 게 전부다. 마치 삶을 포기한 듯한 앨리샤는 무반응으로 일관한다. 심리상담사 테오의 상담 과정이나 그의 생각을 읽노라면 마치 내가 상담을 받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앨리샤의 고모와 사촌, 동료, 친척, 이웃을 통해 그녀의 어머니가 자신과 함께 죽으려 했다는 걸 확인한다. 어쩌면 테오의 치료가 보통의 환자(내담자)를 상대하는 그 이상으로 앨리샤에게 매달리는 게 당연한 모습인지도 모른다. 자신과 같은 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어머니로부터 버림을 받았다는 고통, 온전한 사랑을 받지 못한 상태, 그것을 테오는 소설에서 ‘사랑받지 못했던 고통’이라 설명하는데 무척 강하게 다가왔다. 자아, 가치관의 씨앗이 자라는 유년시절의 기억과 슬픔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어떤 작용으로 나타날 수 있는지 느낄 수 있으므로.

갑자기 아이 모습의 내가 떠올랐다. 불안감에, 온갖 공포와 온갖 고통을 끌어안은 채 터지지 직전인 아이. 끝도 없이 서성거리고 가만히 있지 못하면서 두려워하는 모습. 혼자서 미치광이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을 견뎌내는 아이. 얘길 할 사람은 없었다. 들어줄 사람이 없었다. 앨리샤는 나와 비슷하게 절망적인 기분이었을 것이다. (253쪽)

앨리샤의 목소리를 대신하는 일기장의 기록은 예술가의 고뇌와 그녀의 심리적 상태를 잘 보주는 것으로 이 소설에서 결정적인 단서이자 증거로 매우 중요한 물건이다. 소설을 읽다 보면 작가의 치밀한 구성과 탁월한 감각에 감탄하는 장면이 있는데 앨리샤가 일기장을 숨겨놓은 곳 역시 그러하다. 작가 알렉스 마이클리디스의 첫 소설이라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정말 대단하다. 의사였던 누나의 도움으로 정신병원에서 근무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그곳의 일상을 현실감 있게 그려냈다 해도 말이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끝까지 손을 뗄 수 없는 긴장감과 몰입도가 최고인 소설이다. 상상할 수 없는 반전은 두말할 것도 없는 만족도를 선사한다. 진정한 심리 스릴러의 진수를 보여준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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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의 삶 (어나더커버 특별판) - 제4회 문학동네 대학소설상 수상작
임솔아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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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 공간은 낯설게 다가온다. 가상의 도시이거나 지명을 다르게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아는 도시나 지명을 있는 그대로 표기한 소설을 만나게 되면 무척 반갑다. 임솔아의 『최선의 삶』에서 전민동이 등장했을 때 나는 오래전 그곳을 오가던 나를 떠올렸다. 새로 지은 깨끗하고 쾌적한 이미지, 연구원의 주거를 목적을 한 아파트는 다른 세계처럼 보였다. 소설 속 강이처럼 학생은 아니었지만. 학군을 위해 읍내동에 살면서 전민동에 위장전입한 강이는 불량 청소년이다. 불량 청소년이라고 말해도 좋은 걸까. 엄마는 강이가 가출을 할까 봐 두렵고 매일 기도를 한다. 그런 엄마의 정성을 강이도 안다. 하지만 결국 가출을 감행한다.


열여섯의 소영, 아람, 강이는 각자 필요한 것을 챙겨 서울로 향했다. 무엇이 세 아이를 길 위로 나오게 했는지 명확하지 않다. 다만, 어떤 불안, 어떤 반항, 어떤 욕망이 터져 나온 게 아닐까 짐작할 뿐이다. 소영만이 가출의 목적이 명확하다. 자신이 원하는 걸 부모에게 받아내기 위한 행동이었다. 셋은 아파트 층계참에서 옷을 갈아입고 화장실에서 빨래를 하고 잠을 자고 밤에는 술 취한 아저씨들을 만나고 일탈의 일상을 이어간다. 누구의 보호도 없이 스스로를 지킬 수 있다고 믿는 아이들. 범죄에 가담하지 않을까, 나는 걱정이 커졌다.


아이들은 과감하고 거칠 게 없었다. 서울을 떠나 청주에서 셋은 방을 얻고 아르바이트를 한다.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면서 그들만의 우정이 절대 무너질 수 없는 성처럼 단단하다고 믿었다. 그러면서도 셋 사이에는 계급이 생겼다. 가장 높은 곳에는 소영이 있었다. 소영의 결정으로 학교로 돌아간 셋은 조금씩 균열이 일어난다. 우정에 금이 갔다는 단순한 말이 아니라 무서울 정도로 잔인하게 서로를 할퀸다. 너무도 사실적인 폭력의 묘사는 섬뜩할 정도다.


길지 않은 분량, 빠르고 강한 호흡의 문장으로 가독성이 좋은 소설이다. 하지만 쉽게 아이들의 마음과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 거칠고 독한 말들을 쏟아내며 스스로를 상처 내는 그 심연을 알 수 없다. 다만 가늠할 뿐이다. 열여섯의 나이에 가장 중요한 건 무엇일까. 그 시절의 나는 어떠했나. 부모님을 원망한 기억, 너무도 좋아했던 아이가 나만큼 나를 좋아하지 않아 속상했던 기억, 답답한 소읍을 떠나 도시로 날아가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강이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성장통이라는 말로 그 모든 감정의 소용돌이를 담아낼 수 있을까. 청소년 소설의 소재로 가출은 새로운 게 아니다. 하지만 임솔아의 소설은 뭐랄까, 악랄하고 지독하다. 그것이 열여섯 아이들이 최선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나는 최선을 다했다. 소영도 그랬다. 아람도 그랬다. 엄마도 마찬가지다. 떠나거나 버려지건 망가뜨리거나 망가지거나. 더 나아지기 위해서 우리는 기꺼이 더 나빠졌다. 이게 우리의 최선이었다. (174쪽)


어떤 시절을 견딜 수 있는 힘은 곁을 지키는 누군가에게서 온다. 강이에게 그건 엄마였을 것이다. 자신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일, 누구도 그 삶에 대해 판단할 수 없다. 오직 자신만이 그 시간에 대해 그 삶에 대해 말할 수 있다. 훗날 후회하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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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산하의 야생학교 - 도시인의 생태감수성을 깨우다
김산하 지음 / 갈라파고스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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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 장마, 무더위, 혹한은 살아 있는 자연의 얼굴이자 목소리다. 자연의 일부인 인간만이 그것을 잊고 산다. 그리고 괜히 자연을 탓한다. 계절의 변화가 빨리 찾아오는 것도 이상기후에 대한 핑계도 모두 자연으로 돌린다. 그 중심에 인간의 무차별적 소비와 개발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모른 척한다. 봄이면 공격적으로 날아오는 황사, 시도 때도 없이 우리를 공격하는 미세먼지가 언제부터 무서운 존재가 되었을까. 그리 멀지 않은 시간이다. 어린 시절 여름은 더운 게 당연했고 겨울은 추워야 제맛이었다. 이런 말을 하면 요즘 유행하는 말로 옛날 사람이라고 불리겠지만 그때는 그랬다. 하루가 다르게 최고온도를 경신하는 극한의 여름이 올 거라 상상하지 않았다. 우리나라 최초의 영장류 학자인 김산하의 『김산하의 야생학교』를 읽으면서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나를 발견하며 깜짝 놀랐다.

책은 인간이 얼마나 자연을 파괴하고 동물을 학대하는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들려주며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자연과 공존해야 하는지 조언한다. 자연과 인간이 공동운명체임을 잊지 말라고 강조한다. 인간의 입장이 아니라 동물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라고 말한다. 저자의 강의를 하나하나 읽다 보면 내가 인지하지 못한 채 무의식적으로 자연의 주인인 양 행세하며 어떻게 훼손하고 있는지 확인하게 된다. 가장 손쉽게 일상에서 마주하는 동물에 대한 태도에 대해 나의 행동이 너무 부끄럽다. 도심의 비둘기를 무섭고 더럽다고만 여기고 피했고 수족관에서 있는 물고기를 바로 그 자리에서 회를 떠서 먹거나 산 낙지를 뜨거운 물에 데쳐 숙회를 먹었던 날들이 그러했다. 한 번도 생명이 있는 존재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특히 물고기에 대해서는 말이다. 너무나 많이 잡아서 현재 보존하는 물고기가 있다는 걸 상상이나 했을까. 가장 쉽게 반찬으로 먹었던 고등어, 갈치도 점점 사라지고 있으니 먼 훗날 그들을 바다가 아닌 책에서나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야생 동물의 경우 점점 야생의 성질을 잃어버린 채 살아간다. 동물원에 살고 있는 동물들만 봐도 그렇다. 갇혀 있는 동물들을 직접 보고 만져야 하는 게 산교육인 양 가르치는 우리의 현실. 진정한 교감을 모르는 인간의 무지가 동물에게 고통을 안겨줄 수 있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가두어져 산다는 것은 동물이 자연 상태에서 절대로 경험할 수 없고, 진화적으로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그런 종류의 고통이다. 잡아먹히면서 몸이 뜯기는 고통, 산불이나 용암에 몸이 타는 고통, 질병의 고통, 물에 빠지거나 질식하는 고통, 모두 자연계에 원래부터 존재하며, 지구 역사상 모든 동물이 겪어왔다. 그러나 한 공간에 가두어진 채 먹이는 계속 주어져 죽지 못하게 만드는 고통, 이것은 전혀 새로운 것이다. 그래서 동물을 가둬 키우는 모든 행위는 실로 그들에게 미안한 일이다.” (76~77쪽)

여유롭게 산책을 즐기고 햇빛을 맘껏 느낄 수 있는 작은 공간을 꿈꾸는 건 모든 도시인의 소망일 것이다. 집 근처에 그런 공원이 있다는 것으로도 충분히 감사할 일이다. 저자는 현대인의 일상을 통해 그 안에서 벌어지는 보이지 않는 폭력에 대해 아느냐고 묻는다. 공원이라는 공간이 인위적으로 조성된 공간이라는 건 차치하고서라도 그 안에서 자라는 식물이나 그곳으로 모여든 곤충이나 동물에 대해 인간의 지나친 관심이 그들을 불안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나뭇가지에 날아든 새를 보고 예쁘구나 생각하면 될 것을 저기 새가 있다고 소리치고 심지어 잡았다가 놓아주는 행위까지. 내가 새의 입장이라 해도 인간의 목소리나 손은 공포의 대상이다. 특히 인도네시아 정글에서 진짜 정글을 살다가 온 저자가 방송프로 ‘정글의 법칙’에 대해 쓴소리를 하는 부분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보통의 시청자의 한 사람으로 가보지 못한 땅에 대한 막연한 동경으로 지구 곳곳의 정글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만 했지 그 숲의 원주민이니 동물이나 식물에게 미치는 영향은 고려하지 않았다. 인간의 호기심과 이기심으로 정글을 파괴하는 일, 그만 멈춰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그곳이 어디든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생태계에서 더 이상 ‘수원청개구리’(저자가 아니었다면 나는 평생 몰랐을 것이다)처럼 멸종 위기의 생물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사실은 지금도 너무 많이 늦었다. 하지만 이제라도 우리가 해야 할 것들을 하지 않으면 더 큰 재난과 재앙이 발생할 것이다. 우리는 동물의 겪는 고통의 아픔에 공감하는 감수성을 키워야 한다. 조류독감이나 구제역은 자연재해가 아닌 제대로 된 환경에서 닭, 소, 돼지를 키우지 않았기에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가축의 사육환경에 대한 제도를 개선하고 잘 지킬 수 있도록 철저한 관리 감독이 필요하다. 소비자의 몫은 올바른 구매행동이라는 걸 기억해야 한다. 지역 경제 활성과 축제라는 이유로 지역별 특산물(동식물)이나 특화 상품을 만들어 무자비하게 잡아 그 자리에서 요리를 하는 행태에 대한 고발은 진정한 축제의 의미를 돌아보게 한다. 또 하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건 우리나라 한국이 세계 7위의 탄소 배출 국가라는 것이다. 올여름은 그냥 우리에게 온 것이 아니다.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고 절실하게 깨달아야만 한다.

자연친화적 삶은 정말 멀리 있는 것일까. 자연이라는 공공재는 무한한 것이 아니다. 자연의 일부인 나의 생명이 유한하듯 말이다. 우리는 말로만 공생하는 삶을 외치고 있는 건 아닐까. 저자는 공생을 위한 실천 방법을 알려준다. 플라스틱 빨대가 코에 박힌 고통스러운 바다거북이를 떠올리지 않아도 우리가 친환경적 삶을 선택하지 않는다면 가까운 미래에 꽃 피는 봄 대신 잔인한 봄을 마주할 것이며 새침한 길 고양이의 인사가 아닌 도심 곳곳에서 로드 킬로 죽은 동물을 발견할 게 분명하다. 우리가 가장 쉽게 실천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너무 잘 알고 있지만 아직 익숙하지 않다는 핑계로 사용하는 플라스틱 컵, 더위와 추위를 참지 못해 적정 실내 온도를 지키지 못하는 것부터 고쳐야 한다. 그 작은 실천이 모아지면 온실가스 배출이 줄어들고 지구는 좀 더 건강해진다. 올바른 교육과 인식의 전화, 그리하여 계절을 계절답게 받아들이는 일이 필요하다.

​“생명을 중시하려면, 뭇 생명을 중시해야 한다. 그제야 비로소 어떤 것도 하찮게 여기지 않고 희생시키지 않는 철학이 삶의 밑바탕을 이룰 수 있다. 타인은 물론 심지어 사람이 아닌 생명체에게까지도 이심전심이 미칠 때에만 생명 존중 사상은 체화(體化)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문명 자체가 진정으로 생명을 받들어야 한다.”(2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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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미워하는 가장 다정한 방식
문보영 지음 / 쌤앤파커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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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글을 쓴다. 쓰고 있다는 사실이 즐겁다. 그러다 곧 후회한다. 잘 써지지 않고 쓰고 있는 글이 못마땅하기 때문이다. 대단한 걸 쓰고 있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쓴다는 건 어렵고 괴로운 기분을 불러온다. 집중하고 있다고 느낀다. 하지만 집중하지 못하고 다른 창을 열어 검색을 하거나 음악을 듣는다. 다시 쓰는 나로 돌아와 뭔가 쓴다. 쓰다가 저장하고 쓰다가 삭제하고 쓰기를 반복한다. 특정한 대상을 위한 글이 아니다. 불특정 다수, 검색을 통해 우연하게 방문하거나 내 닉네임을 검색하고 누군가 글을 볼지도 모른다. 그는 나를 아는 사람일까. 알아도 상관없고 몰라도 상관없지만 그의 생각은 궁금하다.


그럼 내가 쓰는 글은 뭘까. 솔직하게 현 상태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일까. 그럴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지정하고 싶은 상대(정작 그는 모른다)에게 쓰는 글이거나 나 스스로를 달래기 위해 쓰는 끄적임에 불과하다. 그래도 쓰는 일은 즐겁다. 나를 붙잡을 수 있고 늘어나는 문장을 보면 흡족하다. 그러니까 결국엔 나를 위해 쓰는 것이다. 나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나를 더 잘 들여다보고 나를 정리할 수 있다고 믿으면서.


문보영 시인의 산문집 『사람을 미워하는 가장 다정한 방식』을 읽으면서도 그런 기분이 모아졌다. 뭐랄까, 쓴다는 일은 나를 돌보는 일이고 나를 사랑하는 일이며 불편한 감정이나 아픈 상처를 위해 약을 먹거나 연고를 바르고 지속적으로 관찰하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시인의 시집을 읽고 산문집을 만났더라면 훨씬 좋았겠지만 어쩔 수 없다. 발랄한 우울, 후회 없는 선택, 명랑한 솔직함은 참신하면서 나쁘지 않았다. 글이라는 건 정해진 하나의 방법, 방식만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 자유롭게 존재한다는 걸 배웠다고 할까.


시가 뭐라고 생각하느냐고 묻기에 대답을 구하다가, 시는 사람을 미워하는 가장 다정한 방식인 것 같다고 말했다. 꼭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이 있어야 시를 쓸 수 있는 거냐고 다시 묻기에 지나치게 사랑한 사람이 있었다는 뜻이었다고 풀어 설명하고 좀 후회했다. (22쪽)


피자를 좋아하고 힙합과 춤을 좋아하고 춤을 열심히 추는 사람, 정신과에 다니고 약을 먹는 사람, 친구가 자살할까 봐 두려운 사람, 일기와 시를 구분하지만 때때로 일기에서 시를 시작하는 사람, 시를 가르치고 과외를 하고 보조개가 예쁜 애인을 사귀었고 생일선물로 학용품을 받고 싶은 사람, 모닝 콜로 영어를 배우는 사람. 한 권의 책을 통해 문보영 시인에 대해 이렇게 많은 걸 알았으니 나는 그녀를 아는 사람으로 바뀌었다.


남들에 비해 나는 시간병이 심각한 편이다. 남들에 비해 시간이 절대적으로 안 흐른다. 반면 나는 상어형 인한이다. 부레가 없어서 멈추는 죽는 상어처럼, 그래서 잘 때도 끊임없이 움직여야 하는 상어처럼, 가만히 있으면 죽어버린다. 나는 가만히 있으면 죽을 것 같아서 여러 가지 딴짓을 시전할 뿐인데 사람들은 내가 열심히 산다고 생각한다. (130쪽)


한 장의 사진은 강렬함이 있다. 그리고 사진이라는 프레임 밖의 상황을 상상하게 만든다. 글도 다르지 않다. 글을 쓴 사람에 대해 궁금해진다. 이런 맑은 우울을 지닌 시인은 무엇을 쓰고 싶을까. 처음엔 엉뚱한 이미지가 떠올랐는데 시간을 견디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보태졌다. 이런 글을 쓸 수 있다는 건 시간의 무력함에 치여본 사람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뭐, 나 혼자만의 느낌이다.


불안해서 웃는 그녀의 웃음이 언젠가 바뀌기를 바란다. 명랑한 우울과 함께 잘 지내기를 바란다. 아니, 그녀가 그러기를 원한다면 말이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삶은 주어졌다. 하지만 모두 똑같은 형태로 살아갈 필요는 없다. 나만의 모양으로 매만지고 나만의 글로 기록하고 나만의 언어로 말하며 산다. 그러니 어쩌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건 취향의 문제가 아닐까 싶다. 이 산문집에서 내가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은 부분, 이런 문장인 것처럼. 


나는 ‘우산을 든다’라는 표현보다 ‘우산대를 붙들다’라는 표현을 좋아한다. 우산은 드는 게 아니라 붙잡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우산대는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 같다. 그 구원의 밧줄을 잡고 우산이 이끄는 대로 걷는다. 타인과 걸어도 나는 타인의 손에 시달리지 않을 수 있다. (2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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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어
서보 머그더 지음, 김보국 옮김 / 프시케의숲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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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보 머그더의 『도어』는 읽으면 읽을수록 그 깊이에 빠져드는 소설이다. 재미와 감동이라는 단순한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그런 이야기다. 누군가는 재미는 넣어두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작가인 ‘나’와 나를 도와주는 ‘에메렌츠’ 둘 사이의 내밀한 관계에 대한 이야기는 두 사람의 생에 관한 것이며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소설은 나와 에메렌츠가 보낸 20여 년 동안의 기록이다. 한 사람과 이렇게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다면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게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부의 문을 닫은 채 열지 않는다면 불가능할 것이다. 아무리 누군가 그 문을 서성이고 두드린다고 해도 말이다. 문을 연다는 건 모든 걸 공유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말이다. 그것을 허락한다는 건 역시나 자신의 세계를 온전히 보여준다는 것이다. 두 사람 사이에 존재했던 벽을 허무는 일, 문을 여는 일이다.


글을 쓰는데 열중해야 하는 ‘나’는 집안일을 맡아줄 사람을 구한다. 친구의 추천으로 만난 ‘에메렌츠’ 는 보통의 고용인과는 다른 태도를 보인다. 고용주를 그녀 스스로 심사하고 선택하는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그녀의 심사에 통과한 나와 남편은 그녀의 돌봄을 받는다. 소설은 나와 에메렌츠의 일상에 집중한다. 에메렌츠는 공동주택 관리도 맞고 있어서 항상 바쁘다. 눈이 오는 거리를 쓸기 위해 빗자루를 들고 주일에 예배를 드리러 여유도 없다. 이상한 점은 일터인 나의 집에 대해서는 하나도 빠짐없이 모든 걸 다 알고 있지만 그녀의 집은 언제나 닫힘 상태다. 자신의 업무 시간이 끝나면 오롯이 자신의 공간에서 시간을 즐긴다. 그 시간을 침범할 수도 없다. 그녀에 대해 동네 주민들도 잘 모른다. 어떻게 보면 사교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인물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녀의 마당에서 차를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는 걸 보면 그건 아닌 것도 같다. 그럼에도 그녀의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간 이는 없다.


소설에서 나의 시선으로 묘사하는 에메렌츠는 정말 이상한 사람처럼 보인다. 매사에 무뚝뚝하고 고집이 센 그런 할머니로 여겨진다.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대해서는 완벽하다. 글을 쓰는 나는 그녀에게는 다른 세상의 사람이다. 그러니까 노동에 대해서는 일절 모르는 사람, 빗자루를 들 줄도 모르고 사용할 줄도 모르는 그런 사람인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세계에 들일 수 없는 사람으로 인정하지만 점차 그녀의 세계로 받아들이면서 둘 사이에는 조금씩 그들만의 세계가 성립한다. 그것은 ‘나’가 그런 에메렌츠를 존중하며 인격적으로 대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에메렌츠는 자신의 집은 공개하지 않는 것일까? 그녀의 집 안에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그녀의 비밀은 소설에서 가장 궁금한 내용이다. 그것은 에메렌츠가 존재하는 이유와도 같다.


이쯤에서 우리는 에메렌츠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1,2차 세계대전을 겪은 사람, 어린 시절 부모을 잃고 쌍둥이 동생을 잃은 사람, 고향을 떠나 그리워하면서도 그곳에 갈 수 없는 안타까운 사람, 오직 스스로를 돌봐야 하는 사람, 에메렌츠의 삶은 그러했다. 그리하여 누군가를 잃을까 두려워했고 자신처럼 고독한 이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들의 삶을 도와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폐허의 세계에서 살아남은 에메렌츠가 소중하게 여겼던 것들은 모두 그녀의 집 안에 있었다. 에메렌츠가 보기에 값지고 귀한 물건들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에는 낡고 오래되어 버려야 할 것들이었다.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것들을 모두 ‘나’에게 주려는 마음도 마찬가지였다.


​“나에게 있는 것이, 내가 바라는 대로 당신들에게 갈 수 있도록 유언을 썼어요. 내가 모은 것들 중 그 어떤 것도 누군가가 갈기갈기 날려버리지 않게, 그러기 위해서요. 한 번 빼앗겼으니, 또다시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두지는 않겠어요. 누군가 내 고양이를 죽인 적이 딱 두 번 있었지요. 하지만 그 누구도 나의 재산, 내 영혼의 평온함으로부터 나를 다시 빼앗을 수는 없어요.” (206쪽)


만약 나라면 에메렌츠의 제안을 수용할 수 있었을까? 그녀가 원하는 대로 그녀를 내버려 두는 일, 가능했을까. 소설의 시작에서 ‘에메렌츠를 죽인 것은 나였다. 그녀를 죽이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구원하고자 했다는 말도, 여기서는 그 사실 관계를 바꿀 수 없다.’ (10쪽) 란 고백의 전말이 밝혀지는 부분에서 사랑하는 이를 위해 진정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어디까지 인지 생각하게 된다. 상대가 원하는 일이 상대를 해하는 일이라도 그대로 행동해야 하는 것일까. 소설에서 ‘나’의 선택은 에메렌츠를 위한 것이었다.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다만 에메렌츠는 원하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하며 마음 아플 뿐이다.


지금은 알고 있지만 그때에는 알지 못했다. 애정은 온화하고 규정된 틀에 맞게, 또한 분명한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누구를 대신해서도 그 애정의 형태를 내가 정의할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118쪽)


‘나’와 ‘에메렌츠’ 의 관계를 무어라 정의할 수 있을까? 우정과 사랑을 뛰어넘은 숭고한 인간애라 할 수 있을까. 그 어떤 말로도 그들의 내밀하고 비밀스러운 관계를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저 고결하고 깨끗한 아름다움이 존재했을 거라는 것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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