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미워하는 가장 다정한 방식
문보영 지음 / 쌤앤파커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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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쓴다. 쓰고 있다는 사실이 즐겁다. 그러다 곧 후회한다. 잘 써지지 않고 쓰고 있는 글이 못마땅하기 때문이다. 대단한 걸 쓰고 있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쓴다는 건 어렵고 괴로운 기분을 불러온다. 집중하고 있다고 느낀다. 하지만 집중하지 못하고 다른 창을 열어 검색을 하거나 음악을 듣는다. 다시 쓰는 나로 돌아와 뭔가 쓴다. 쓰다가 저장하고 쓰다가 삭제하고 쓰기를 반복한다. 특정한 대상을 위한 글이 아니다. 불특정 다수, 검색을 통해 우연하게 방문하거나 내 닉네임을 검색하고 누군가 글을 볼지도 모른다. 그는 나를 아는 사람일까. 알아도 상관없고 몰라도 상관없지만 그의 생각은 궁금하다.


그럼 내가 쓰는 글은 뭘까. 솔직하게 현 상태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일까. 그럴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지정하고 싶은 상대(정작 그는 모른다)에게 쓰는 글이거나 나 스스로를 달래기 위해 쓰는 끄적임에 불과하다. 그래도 쓰는 일은 즐겁다. 나를 붙잡을 수 있고 늘어나는 문장을 보면 흡족하다. 그러니까 결국엔 나를 위해 쓰는 것이다. 나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나를 더 잘 들여다보고 나를 정리할 수 있다고 믿으면서.


문보영 시인의 산문집 『사람을 미워하는 가장 다정한 방식』을 읽으면서도 그런 기분이 모아졌다. 뭐랄까, 쓴다는 일은 나를 돌보는 일이고 나를 사랑하는 일이며 불편한 감정이나 아픈 상처를 위해 약을 먹거나 연고를 바르고 지속적으로 관찰하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시인의 시집을 읽고 산문집을 만났더라면 훨씬 좋았겠지만 어쩔 수 없다. 발랄한 우울, 후회 없는 선택, 명랑한 솔직함은 참신하면서 나쁘지 않았다. 글이라는 건 정해진 하나의 방법, 방식만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 자유롭게 존재한다는 걸 배웠다고 할까.


시가 뭐라고 생각하느냐고 묻기에 대답을 구하다가, 시는 사람을 미워하는 가장 다정한 방식인 것 같다고 말했다. 꼭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이 있어야 시를 쓸 수 있는 거냐고 다시 묻기에 지나치게 사랑한 사람이 있었다는 뜻이었다고 풀어 설명하고 좀 후회했다. (22쪽)


피자를 좋아하고 힙합과 춤을 좋아하고 춤을 열심히 추는 사람, 정신과에 다니고 약을 먹는 사람, 친구가 자살할까 봐 두려운 사람, 일기와 시를 구분하지만 때때로 일기에서 시를 시작하는 사람, 시를 가르치고 과외를 하고 보조개가 예쁜 애인을 사귀었고 생일선물로 학용품을 받고 싶은 사람, 모닝 콜로 영어를 배우는 사람. 한 권의 책을 통해 문보영 시인에 대해 이렇게 많은 걸 알았으니 나는 그녀를 아는 사람으로 바뀌었다.


남들에 비해 나는 시간병이 심각한 편이다. 남들에 비해 시간이 절대적으로 안 흐른다. 반면 나는 상어형 인한이다. 부레가 없어서 멈추는 죽는 상어처럼, 그래서 잘 때도 끊임없이 움직여야 하는 상어처럼, 가만히 있으면 죽어버린다. 나는 가만히 있으면 죽을 것 같아서 여러 가지 딴짓을 시전할 뿐인데 사람들은 내가 열심히 산다고 생각한다. (130쪽)


한 장의 사진은 강렬함이 있다. 그리고 사진이라는 프레임 밖의 상황을 상상하게 만든다. 글도 다르지 않다. 글을 쓴 사람에 대해 궁금해진다. 이런 맑은 우울을 지닌 시인은 무엇을 쓰고 싶을까. 처음엔 엉뚱한 이미지가 떠올랐는데 시간을 견디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보태졌다. 이런 글을 쓸 수 있다는 건 시간의 무력함에 치여본 사람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뭐, 나 혼자만의 느낌이다.


불안해서 웃는 그녀의 웃음이 언젠가 바뀌기를 바란다. 명랑한 우울과 함께 잘 지내기를 바란다. 아니, 그녀가 그러기를 원한다면 말이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삶은 주어졌다. 하지만 모두 똑같은 형태로 살아갈 필요는 없다. 나만의 모양으로 매만지고 나만의 글로 기록하고 나만의 언어로 말하며 산다. 그러니 어쩌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건 취향의 문제가 아닐까 싶다. 이 산문집에서 내가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은 부분, 이런 문장인 것처럼. 


나는 ‘우산을 든다’라는 표현보다 ‘우산대를 붙들다’라는 표현을 좋아한다. 우산은 드는 게 아니라 붙잡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우산대는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 같다. 그 구원의 밧줄을 잡고 우산이 이끄는 대로 걷는다. 타인과 걸어도 나는 타인의 손에 시달리지 않을 수 있다. (2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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