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그치는가 싶더니 그럴 리가 없다고 말하는 듯 내린다. 무섭게 쏟아진다. 장마라고 하기엔 연속성이 부족하고 아니라고 하기엔 맑음이 적다. 내가 사는 곳은 흐림과 비가 이어진다. 그러니까 장마인 걸까. 습하기가 이렇게 습할 수가 없다.

습습의 날들이다. 좋아하는 감자를 쪄서 먹기 좋은 여름이지만 습한 날에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냉장고에 작은 수박의 속내도 보지 않았다. 아는 사람은 다 알겠지만 수박 써는 일은 번거롭고 귀찮은 일이다. 내가 수박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수박을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수박을 썰어서 먹을 정도로 좋아하지 않는 것이다. 그 대신 친구가 보낸 황도 복숭아를 맛있게 먹는다. 한 입 베어 물면 복숭아 형태가 완전히 사라지는 단맛이다. 친구는 내게 복숭아를 주문하면서 자신을 위해서는 백도를 주문했다고 했다. 황도보다 단단할 백도의 맛도 궁금하다.

책을 샀다. 아, 자꾸 책을 산다. 지난번 박솔뫼의 짧은 소설을 샀는데 블랑카 님이 단편집 『영릉에서』에 수록된 단편이 좋다고 해서 그 단편이 궁금해서 샀다. 좋아하는 시인 하재연의 신간시집 『인간이라는 환상처럼』, 산문과 시가 모두 좋다는 고명재의 시집도 한 권 샀다. 『어깨에 머리를 기대던 시절』란 제목에서 그리움과 애틋함이 느껴진다. 땡스투는 시인의 글씨가 순수하다고 하신 분에게. 박상수의 『생활력』은 시의적절 시리즈다.





고명재의 시집에는 「작약」이라는 시가 있다. 시가 있는 줄 몰랐는데 좋다. 잘 샀다 싶다. 내가 모르는 작약은 많고 내가 모르는 작약을 담은 시도 많으니까.


먹을 수 없는 작약, 그 오월의 품격

꺾을 수 없는 작약, 그 동그런 향기

약이 될 수 없는 작약, 홀로 아름다움

약도 듣지 않는 미래, 그래도 아름다움

(「작약」, 일부)

하재연의 시는 어려운 시가 많다. 상상이 되지 않는 낯선 세계. 그런데도 이상하게 하재연의 시집은 계속 사게 된다. 계속 읽게 된다. 잘 모르면서 말이다. 이번 시집에 이런 시가 있다.


반구의 너머로부터 네가 도착한다

이십 년이 지난 후에야

이렇게 시작되는 대본을 쓰는

창밖으로 눈이 쏟아진다 클리셰가 난무하는

장르 드라마처럼

과거에서 미래로 열린

창문틀이 육체처럼 삐걱거리고 있다

나의 시간들이 새어 나간다

기화하는 탄소에게 사로잡힌

탄산수의 나머지 심정으로

종반부가 다가온다

지면을 덮는다

흰 백지와 같이 절대적으로

이십 년 후의 네가 이상하게 아름다워서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눈은 이제 폭설이 되어가며

결말을 준비하고

마지막 장을 덮고서야

여름의 파도 소리는 시작된다

지구의 건너편 반구에서부터

기억처럼 도래하는 방식으로

(「여름 판타지」, 전문)


책을 사는 건 좋은 일이다. 읽으려고 산다. 좋아하니까 계속 좋아하기로 한다. 현재의 상태는 좋음이니까. 나중에는 별로가 될 수도 있고 싫음이 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좋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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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6-07-09 1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둥, 자목련님이 좋아하셔야 할 텐데... 좋아하실 거라 믿어봅니다. 저 이번달 시의적절 박상수 시인이라 저도 주문했어요. 저도 요새 갑자기 책을 계속 주문하기 시작했어요. 비 오는 장마철 좋은 이야기들 읽고 자목련님 마음도 보송보송해지기를 바랍니다.

잠자냥 2026-07-09 15:56   좋아요 0 | URL
100자평도 꼭 남기세요. ㅋㅋㅋㅋㅋㅋㅋ

건수하 2026-07-09 15: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이셨군요 ^^
고명재 시인 미소도 참 순수하셨어요.. 저도 샀으니 얼른 읽어봐야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