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미의 시집 『당신의 세계는 아직도 바다와 빗소리와 작약을 취급하는지』가 궁금했던 이유는 단 하나다. 바로 시집의 제목 때문이다. 바다, 빗소리도 충분히 매력적이지만 나는 작약에 꽂혔다. 작약을 취급하는 세계라니, 그 세계는 마치 나의 세계 같았다. 시집이 어떠냐고 묻는다면 잘 모르겠다. 그게 정확한 느낌이다. 잘 몰라서 읽고 잘 몰라서 좋다. 잘 몰라서 넘길 수 있고 잘 몰라서 다시 읽을 수 있다.
어쩌다 보니 이런 시를 먼저 읽는다. 그냥 지금 우리의 마음 같아서. 우리의 현실 같아서. 단단하지 않더라도 소멸하지 않았던 어떤 믿음이 한순간에 망가졌다. 망가졌으니 고치면 그만이다. 그런데 아무도 나서서 고치려 하지 않는다. 그냥 눈치를 보고 그냥 무리에 숨으려 한다. 해결과 수습은 시간 문제라는데, 귀한 시간을 낭비하는 행태를 지켜보자니 화가 난다.
늘 정확하게
네모반듯하거나 동그랗게
잘 지켜 준다니까
천 개의 연장통처럼 뭐든 다 들어 있거나
다 고쳐 준다니까
헛디뎠을 때
굴러떨어질 때
잘못 만났을 때
두드려도 문 안 열릴 때
두드린 적도 없는 문이 확 열렸을 때
해결과 수습은 시간 문제라는데
늘 시간이 없다 (「방법」, 전문)
시는 이래서 좋다. 나는 평론가가 아니니 내 맘대로 해석할 수 있고 내 감정에 끌리는 대로 취하면 그만이다. 다른 독자는 다른 방법이 있겠지만 말이다. 얼마나 많이 배우고 얼마나 많이 실패하고 얼마나 많이 상처를 입어야 인간 구실을 할 수 있을까. 우리는 무엇을 더 배워야 할까. 그들이 배워야 할 것은 무엇일까. 공부는 끝이 없다는 걸 실천하려고 매번 인생 공부를 하려는 의도일까.
새와 저녁노을을 배우면
기차를 만들 수 있다
연도(年度)를 익히면 후회를 배울 수 있다
알파벳 여섯 개의 조합법을 배우면
배신하는 남자와 여자를 만들 수 있다
잠 안 오는 밤에
눈에서 제일 먼 엄지발가락을 주무르면
수면을 부를 수 있다
나사를 풀 때
심장과 바깥쪽
어느 쪽으로 돌려야 하는지는
수십 년째 외우지 못하고 헛돌지만
혀 닦는 법과
밤하늘의 별빛들만 제대로 습득해도
인간 구실을 할 수 있다 (「공부」, 전문)
그런가 하면 이런 시는 너무 슬퍼서 목이 멘다. 너무 아파서 심호흡을 한다. 무엇에 휩쓸리는도 모르고 이리저리 휩쓸리는 삶이 떠올라서. 그 삶이 하나가 아니라 무더기여서 아프다. 도움을 청하지 못하고 설령 도움을 청했다 해도 내미는 손이 없어서 잡을 손이 없어서 결국 혼자 안간힘을 쓰는 이들이 너무 많아서. 결국에 닿지 않는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지는 기분. 다시 일어설 힘이 아니라 욕할 힘이 필요하다는 절절함이 느껴진다고 할까. 실컷 욕을 해도 괜찮다고 거든다. 아니, 나부터 한바탕 시원하게 욕을 해 볼까.
휩쓸려서 얼굴을 떨어뜨린 적이 있었다
시간을 버린 적도 많았다
휩쓸려서 폐허라는 말을 사랑하고
포도나무 밑 그늘이란 말을 좋아해서
곤란했던 때도 있었다
신발을 구겨 신듯
성격에 휩쓸려
인간에게도 바다에게도 가지 못했다
후회에는 갔다
나 혼자 내 힘으로
매번 (「휩쓸리다」, 전문)
나 없는 사이에 부가 내 발목을 훔쳐갔다
바닥에 주저앉았는데
바닥이 아니라고 했다
다시 보니 손목도 없어졌다
아무리 찾아도 없다
다들 뭔가 애써 감추고 있는 눈치다
바닥에 앉으면
올라가는 계단이 보인다더니
별빛들이 매일 그런 식으로 계단을 오른다더니
다시 보니
목도 눈도 훔쳐 가고 없다
욕 좀 해도 괜찮을까요? (「바닥」, 전문)
진정된 마음으로 이제 이 시를 말해보자. 그래, 이 시였다. 이 시집의 표제 말이다. 『당신의 세계는 아직도 바다와 빗소리와 작약을 취급하는지』를 마주하는 시. 상상하게 된다. 미용실 의자에 앉아 있는 누군가를. 아니, 나 이거나 당신일게 분명하다. 나도 “ 머리 좀 쓰다듬어 주세요”란 말을 기억했다가 꼭 말해보고 싶다.
죽은 사람 취급을 받아도 괜찮습니다
살아 있는 게 너무 재밌어서
아직도 빗속을 걷고 작약꽃을 바라봅니다
몇 년 만에 미장원엘 가서
머리 좀 다듬어 주세요, 말한다는 게
머리 좀 쓰다듬어 주세요, 말해 버렸는데
왜 나 대신 미용사가 울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잡지를 펼치니 행복 취급하는 사람들만 가득합니다
그 위험물 없이도 나는
여전히 나를 살아 있다고 간주하지만
당신의 세계는
어떤 빗소리와 작약을 취급하는지
오래도록 바라보는 바다를 취급하는지
여부를 물었으나
소포는 오지 않고
내 마음속 치욕과 앙금이 많은 것도 재밌어서
나는 오늘도
아무리 희미해도 상관없습니다
나는 여전히 바다 같은 작약을 빗소리를
오래오래 보고 있습니다 ( 「취급이라면」, 전문)
어떤 이별을 상상하기도 하고 영원한 작별을 그려보기도 한다. 소식이 끊긴 누군가를 향한 그리움일까. 아니면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미련한 태도일까. 그 무엇이든 상관없다. 나는 이곳에서 여전히 바다 같은 작약을 빗소리를 오래 오래 보고 있으니까. 작약을 만나려면 한 계절을 기다려야 하는데 조바심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