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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 ㅣ 자이언트 픽
이유리 외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3년 1월
평점 :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란 제목을 보고 사랑에 관한 단편집이 아닐까 기대했다면 만족할 수도 있다. 그러나 참여 작가의 이름만으로 이미 사랑에 대한 뻔한 이야기는 아니겠구나 짐작했을 것이다. 그렇다. 자이언트북스의 앤솔러지 시리즈, ‘자이언트 픽’은 장르의 경계를 없애고 자유로운 소설로 독자를 유입하겠다는 분명한 목표가 있다. 뭐, 그렇다면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다.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 속 다섯 편의 소설은 SF 장르를 취하고 있지만 어느 하나 겹치는 부분이 없는걸 보면 작가의 개성을 확실히 파악된다고 할까.
표제작 이유리의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는 제목 그대로 사랑이라는 감정을 파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의 사랑이 끝나고 그에 대한 사랑을 감정을 정리하는 일이라고 할까. 완벽한 이별을 위해 필요한 과정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미 감정을 사고파는 소재를 다룬 소설을 읽은 기억이 있기에 산뜻하거나 기발하지는 않았다. 다만 감정을 제공하고 받은 과정을 구체적으로 묘사한 부분이 흥미로웠다. 연인과 이별을 한 ‘수진’이 고양이 순대의 치료비를 위해 사랑이라는 감정을 친구 ‘영인’에게 전이하기로 결정한다. 남편이 불륜으로 힘든 영인에게는 그 감정이 필요하니까.
감정전이센터를 방문하며 진행되는 과정은 흡사 장기를 이식받는 수술과 닮았다. 감정전이에 대한 자세한 안내를 듣고 그로 인한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는 설명까지. 감정 샘플을 배양해서 만든 감정 기체를 보여주는 장면은 묘한 기분을 불러온다. 사랑을 구체화한 느낌이 인상적이다.
직원이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기체라더니, 신기하게도 뚜껑을 열었는데도 그것은 새어 나오지 않고 분홍빛 구름처럼 상자 안에 둥둥 떠 있었다. 서로 눈을 한번 마주 본 뒤, 우리는 시키는 대로 조심스럽게 손을 잡았다. 따뜻했고, 부드러웠다. 체온보다 사오도 높은 정도일까. 적당히 기분 좋은 온도에다 꼭 베개 솜 안에 손을 쑥 집어넣은 듯 몽글몽글한 촉감이 나쁘지 않았다. (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 33쪽)
수지의 감정을 받은 영인은 남편 민후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고 마냥 행복해한다. 그러나 그런 아내를 보는 민후는 뭔가 불편하다. 그러니까 영인의 진짜 감정이 아니라는 사실이 당혹스러운 거다. 민후 입장에서는 자신이 알던 아내가 아닌 다른 사람처럼 여겨졌을 것 같다. 그리고 곧 수진도 그 마음을 알게 된다. 소개팅으로 만난 영욱이 헤어질 때마다 감정전이를 한다는 말을 아무렇게나 하는 걸 보곤. 어떤 감정은 쓸모없다고 여기는 미래가 온다면 고유한 감정은 존재하지 않고 획일적인 감정으로 모두를 대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감정을 전이하는 대신 자신이 원하는 피부를 바꾸는 인간이 등장한다면 어떨까. 김초엽의 「수브다니의 여름휴가」는 인간을 구성하고 정의하는 게 무엇일까 생각하게 만든다. 똑같은 피부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피부를 만들어 이식한 상태의 모습은 분명 나와는 다르지만 그가 인간이 아닌 다른 생명체는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 사실을 고지하기 전까지는 힘들 것이다. 외형이 주는 믿음이 이토록 확고한 것이라는 걸 확인한다. 도영 언니에게 쓰는 편지로 시작하는 소설로 들어가 보면 화자는 인공 피부를 만드는 곳 <솜솜 피부 관리숍>에서 일을 한다. 고객이 원하는 피부를 설계하고 배양해서 이식하는 일이다. 지금과는 다른 존재가 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들. 나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것들을 소설에서 마주하고 내 안의 내제된 욕망은 무엇일까, 깊게 고민해야 하는 게 아닐까 싶은 마음이 스쳤다.
다른 존재가 되고 싶다는 갈망, 혹은 진짜 내가 되고 싶다는 갈망은 대체 뭘까요? 그것은 어떻게 태어나고 자라서 한 사람의 뼈를 이루게 되는 걸까요.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손끝에 닿은 두툼한 인공 피부의 감촉을 느낄 때면 알 수 있었죠. 아, 갈망은 분명 여기 실재하는 것이구나. (「수브다니의 여름휴가」, 134쪽)
건강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모든 피부는 가능했다. 금속을 이식해달라는 고객이 나타났고 그가 바로 수브다니였다. 녹슬고 싶다’는 수브다니의 갈망 앞에 사장은 불가능하다고 말렸지만 결국 수부다니의 확고한 결심에 피부 이식을 하게 된다. 수브다니가 직접 피부 재료인 금속을 가져왔는데 이게 훔친 물건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솜솜 피부 관리숍>과 사장은 곤욕을 치른다. 알고 보니 수브다니는 인간이 아닌 최첨단 안드로이드였다가 반 인간화 시술을 받은 상태였다. 그가 녹슬고 싶은 금속 피부 이식을 원했던 건 다시 기계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안드로이드로 존재했을 때 자신이 사랑했던 연인과 만든 작품을 구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수브다니의 사건과 별개로 인형이 되는 게 꿈이었다고 화자는 말하는데 이상하게 서글퍼진다. 남들과 다른 외형을 갖는 일은 정체성으로 이어지는데 소수이고 다르다는 이유로 혐오의 대상이 되므로.
SF 장르를 읽다 보면 더 나은 세상을 향해 필요한 건 무엇일까 고민이 된다. 그러다 결국 미래에도 인간은 살아남을 것이고 서로를 존중하고 이해하는 마음, 그러니까 사랑이 가장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김서해의 「폴터가이스트」에서 과거 사건으로 인해 어떤 소리를 듣는 ‘세인’이 왕따 당하는 학교에 전학을 온 수영 선수 ‘현수’가 세인이 듣는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대하는 일도 결국은 사랑이다. 세인이 듣는 소리는 불길한 구의 등장과 알 수 없는 죽음으로 이어진다. 판타지 요소와 함께 성장 소설의 느낌을 더해진 소설이다. 설재인의 「미림」도 비슷하다. 주인집이라는 거대한 성, 그 안에서 가정 폭력으로 오직 학교에서만 안전할 수 있는 ‘주경’은 지구 종말의 사태로 학교에도 갈 수 없는 상황에 놓이고 지하의 ‘미림’을 만나 위로를 받는다. 그런가 하면 발표하는 소설마다 인간보다 더 따뜻한 감성을 지닌 로봇으로 감동을 안기는 천 선 란의 「뼈의 기록」에서는 염을 하는 안드로이드 ‘로비스’가 인간을 대하는 태도야말로 숭고하고 아름다운 사랑이 아닐는지.
쓰다 보니 사랑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사랑이라는 게 어떻게 우리를 살게 만드는지, 차별과 혐오를 끌어안을 수 있는 힘이 사랑이라는 걸 말이다. 어떤 미래는 내게 남은 사랑을 누군가에게 줄 수 있고 곁에 머물러 줄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충분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어리석고 불가능할지라도 생각이야 괜찮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