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 산문
박준 지음 / 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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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마다 안부를 묻는 이가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잘 지내라고 짧은 인사를 건네고 일상을 나누는 일은 사소하면서도 위대하다. 그런 안부를 받는다. 말이 아닌 글로 시인 박준이 전하는 안부다. 『계절 산문』 이란 제목처럼 12달, 계절이 흐르는 순서대로 12달의 산문을 실었고 그 달의 일상과 느낌을 시와 일기, 편지 같은 글로 들려준다. 그러니까 시인이 살아가는 계절을 차례대로 만난다. 그가 만난 사람, 그가 바라본 세상, 그가 꿈꾸는 일상, 그가 좋아하고 그리워하는 어떤 것들.


차례로 읽어도 좋고 맘에 드는 달을 먼저 읽어도 괜찮다. 그러니 누군가는 2월의 산문부터 읽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좋아하는 4월을 먼저 찾았다. 「사월 산문」은 이렇게 짧은 글이다. 지난 사월을 생각하고 다가올 사월을 생각하면 몇 번을 반복해서 읽는다. 분명 꽃으로 가득할 4월이 될 텐데, 왜 마음 한구석은 이토록 시리고 아픈 것일까. 4월과 떠오르는 모든 것들, 그 안에 담긴 어떤 절망, 어떤 슬픔 때문은 아닐까.


가야 할 데가 없어도

가야 할 때가 있는 것처럼


부른다고 오지는 않지만

가라고 하면 정말로 가던 사람이 있는 것처럼 (44쪽, 「사월 산문」 전문 )


대부분의 글은 편지처럼 읽힌다. 하여 나는 어는 글에서는 답장을 쓰고 싶어졌다. 고백일까 싶은 짧은 글에서 삼척으로 떠나는 시인과 동행자를 상상한다. 삼척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시인과 그를 바라보는 동행자의 애틋한 시선을 말이다. 그래서 잘 다녀왔냐고 묻고 싶은 것이다. 삼척에서 본 바다 빛깔은 어땠냐고.


네 형편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 내가 칠만 원을 줄게. 너는 오만 원만 내. 그러면 십이만 원이 되잖아. 우리 이 돈으로 기름 가득 넣고 삼척에 다녀오는 거야. 네가 바다 좋아하잖아. 나는 너 좋아하고. (118쪽, 「어떤 셈법」 전문)


멈추지 않고 단숨에 읽으면서 어느 방송에 출연했던 시인과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시인의 기억에 선명하게 박혔을 장면들. 어린 시절 누나와 함께 과자를 사러 가던 길, 다니기 싫던 미술 학원까지 누나의 손을 잡고 가던 길. 얼굴에 점이 있어 누나가 그 점을 바둑이 점이라고 불렀다는 부분에서는 나도 모르게 얼굴 오른쪽의 태생점을 매만진다. 사람들은 왜 그 점을 빼지 않냐고 물었지만 나는 엄마와 나를 이어준 점이라는 이유로 그 점이 좋았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박준의 산문은 차분하고 간결하다. 복잡했던 마음이 어느 순간 간단하게 정리되는 기분이다. 우리를 가장 힘들게 하는 일들 가운데 하나인 관계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 순간적으로 나는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가고 있는지 생각했다. 마냥 친해지고 싶었던 이, 여전히 그들과 가까이 지내고 있지만 한 번씩 몰려오는 묘한 두려움이 있다. 만남과 헤어짐의 반복이 관계라는 걸 알면서도 연락이 끊길 수도 있다는 걸 생각하면 마음이 조급해진다. 관계란 참 이상해서 동등하기보다는 어느 한 쪽으로 기운다. 사람을 좋아하는 일의 크기를 재는 일은 어리석지만 때로 그 서운함으로 끝나기도 하니까.


우리가 어떤 상대를 좋아하게 되는 것에는 특별한 동기나 연유를 찾을 수 없는 것이 보통입니다. 안타깝게도 상대와 멀어지는 계기도 비슷할 것이고요. 명백한 잘못이 사람의 관계를 갈라놓기도 하지만, 더 많은 경우에서 아주 사소한 이유들로 관계가 멀어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하루의 해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우리의 생이 그러하듯이 삶을 살면서 맺는 관계들도 모두 이렇게 시작과 끝이 있습니다. 시작은 거창했는데 끝이 흐지부지 맺어지는 관계도 있고 어서 끝나서 영영 모르는 사람으로 살았으면 하는 관계도 있고 끝을 생각하기 두려울 만큼 끝나지 않았으면 하는 관계도 있습니다. (140~141쪽, 「시월 산문」 중에서)


다른 글에서도 느꼈지만 박준의 글을 읽다 보면 이 사람은 감정 기복이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담담하게 털어놓는 속내와 속상함과 화를 찾을 수 없는 그 평안함은 어디서 오는 걸까 궁금해진다. 본바탕이나 기질이 그런가 싶기도 하고. 소망하는 것들을 기원하는 곳에서도 아무것도 빌지 않게 해달라고 빌다니. 그동안 수없이 많은 기도를 통해 내가 바랐던 욕망들이 부끄럽다. 그래도 나 역시 최근에는 항상 좋은 일이 생기게 해달라고 바라는 대신 나쁜 일이 생기지 않게 해 달라고 바라고 있으니.


사찰에서든 교회에서든 성당에서든, 제가 비는 것은 한 가지입니다. 역설적이지만 저는 아무것도 빌지 않게 해달라고 빕니다. 이 기도에는 욕망을 줄여 마음과 몸을 간소하게 살고 싶다는 뜻도 있지만 아무것도 빌지 않아도 될 만큼 평온한 일들이 계속되었으면 하는 큰 욕심도 있습니다. (154쪽, 「기도에게」 중에서)


지난 계절을 돌아보고 다가올 계절을 기대한다. 코로나와 같이 살아갈 계절들. 그 시간이 짧아지면 좋겠지만 그와 함께한 계절도 먼 훗날에는 담담한 날들이 되었으면 한다. 편안하고 다정해서 계절마다 가까이 지내는 이에게 이 책의 산문 한 구절을 전하고 싶은 마음이다. 그들 중 누군가 이 산문을 읽고 나도 그 계절을 안다고 말해주면 얼마나 행복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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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2-02-08 12:1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박준 시인의 산문집이 나왔군요~ 소개해주신 글이 다 좋네요~!! 바로 읽어봐야 겠어요 ^^

자목련 2022-02-09 15:25   좋아요 4 | URL
네, 책이 참 예쁩니다. 즐겁게 만나세요!!

mini74 2022-02-08 16: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와 자목련님 글도 넘 좋은걸요. 자목련님의 마지막 문단 참 좋아요.

자목련 2022-02-09 15:24   좋아요 2 | URL
ㅎㅎ 항상 응원을 주시는 미니 님^^
알라딘 이웃 님들도 계절마다, 언제나 안부를 나눠주시죠~~

그레이스 2022-02-08 22:0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계절로 인사를 건네는 시인, 너무 따뜻하고 좋았어요.
저녁은 언제 부터일까를 한참 생각하며 미소가!

자목련 2022-02-09 15:24   좋아요 2 | URL
저녁은, 어린 시절 밥 먹으라고 부르던 엄마의 목소리가 생각났어요.
말씀처럼 포근하고 말랑말랑한 글들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