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일기 - 우리가 함께 지나온 밤
김연수 지음 / 레제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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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에는 아직 읽지 못한 김연수의 책이 있다. 어떤 책은 시작도 못했고 어떤 책은 읽다가 말았고 어떤 책은 리뷰를 쓰고 싶었지만 쓰지 못했다. 그가 먼저 읽고 쓴 글을 보고 그가 추천한 작가의 소설을 읽는 경우도 있다. 그러니까 나는 김연수의 글을 좋아하고 믿는다. 좋아하는 이유를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없지만 산문이나 소설을 통해 그가 ‘우리’를 놓지 않고 있다는 것과 보편적인 일상을 바라보는 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우리가 함께 지나온 밤’이란 부제가 말해주듯 『시절일기』는 어떤 시절을 지내고 견디는 것에 대한 글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작가의 글을 읽는 일은 사회를 들여다보는 하나의 통로처럼 다가온다. 일기의 형식을 빌렸지만 사적 영역보다는 칼럼이라 할 수 있다.


문장을 하나 쓴다. 그다음에는 침묵이다. 그러다가 문장 하나를 더 쓴다. 그러고는 다시 침묵이다. 문장을 쓸 때마다 만나는 이 침묵은 완벽한 무無처럼 느껴진다. 그때 나는 내 안의 가장 깊은 곳, 인식의 끝에서 더듬거리는 중이다. 그렇게 수백 번 혹은 수천 번의 무와 대면한 뒤에야 한 편의 글이 완성된다. (8쪽)

살아갈수록 세상은 더 좋아지고 편안해질 거라 여겼지만 반대로 현실은 고통과 절망으로 가득하다. 어떻게 하루하루 버티면 살아가는지 놀라울 뿐이다. 아마도 저마다 자신만의 방법을 찾아 고군분투를 하는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세상이니 누군가는 쓰는 일과 읽는 일이 무용한 것이라 말한다. 그러나 하루하루 꾸준하게 쓰는 작가와 그것을 읽는 나에게는 유용하다. 말하지 않아도 여전히 거대한 슬픔으로 존재하는 사건들이 우리를 지배한다. 나의 일이 아니니 관심을 거둘 수 있는 이는 몇이나 될까. 김연수의 글로 다시 되새기는 그날의 기억과 기록은 몸에 박힌 가시처럼 따갑고 아프다. 글이 주는 깊은 울림, 그 힘을 믿는 것이다.그게 무엇이든 쓴다는 것, 멈추지 않는다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에게도 글쓰기는 중요하므로. 대단한 글이 아니더라도 미완성의 글로 남더라도 쓴다는 건 나를 들여다보는 일이며 질문을 던지는 일이니까. 어쩌면 읽고 쓰는 일에 집중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한순간 무너지고 부서졌을 것이다.


타자의 고통 앞에서 문학은 충분히 애도할 수 없다. 검은 그림자는 찌꺼기처럼 마음에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애도를 속히 완결 지으려는 욕망을 버리고 해석이 불가능해 떨쳐버릴 수 없는 이 모호한 감정을 받아들이는 게 문학의 일이다. 그러므로 영구히 다시 쓰고 읽어야 한다. 날마다 노동자와 일꾼과 농부처럼, 우리에게 다시 밤이 찾아올 때까지. (49쪽)


무언가 기댈 수 있는 존재가 거기 있다는 건 얼마나 큰 위안인가. 문학이 애도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어떤 문장이 어떤 날의 나를 지탱하게 했으니 나는 읽는 일을 지속하는 것이다. 어느 시절, 그 문장은 김연수의 것이기도 했으니 우리는 한 시절 같은 것을 느끼고 같은 것을 바라봤다고 여겨도 좋다. 낯선 도시 서울에서 어느 계절 남산타워를 보면서 그가 느꼈던 것처럼 말이다.


남산타워에 그토록 끌렸던 까닭은, 아마도 그래서였으리라. 거기 온갖 일들이 벌어지는 서울에서 누군가는 천국에라도 온 것처럼 기뻐하고 누군가는 지옥에 떨어진 죄인처럼 괴로워할 테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남산타워는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는 거대한 눈동자처럼 서 있었기에. 인생이 여행이라도 되는 양, 짐짓 여행자처럼, 그 모든 기쁨과 고통을 바라보는, 그러나 더없이 무기력하고 무책임한 눈동자로. (127쪽)


오래 머무르고 싶은 부분이 많았고 읽고 있어도 도통 잘 모르겠는 부분도 많았다. 나는 한 번도 생각하지 못한 깊은 사유의 시작이 오랜 글쓰기와 폭넓은 독서에서 비롯된 건 아닐까 혼자 판단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청춘의 문장들』이나『소설가의 일』과는 다른 글의 무거움과 깊이는 50대에 접어든 작가의 이력과 무관하지 않겠지만 장래희망으로 다시 할머니를 말하는 글에서는 천진난만한 소년의 모습을 상상하며 함께 즐거웠다.


나는 읽는다. 때로 쓰기도 한다. 읽고 쓰는 존재라 말하고 싶다. 작가, 예술가는 아니지만 그가 말하는 예술의 존재에 대한 이런 글에서 예술은 우리의 인생으로 치환할 수 있지 않을까. 유한하며 소멸하는 것, 그래서 더 소중한 가치를 지닌다. 사라짐을 경험하는 일이 의미하는 것들을 가늠해 본다.


예술은 사라짐의 과정으로서만 존재한다. 작가는 자신의 심리상태, 재능, 예술가로서의 위상 등등이 모두 소진되는 과정에서 작품이 탄생하는 것을 목격한다. 그러고 나면 작품 자체도 사라진다. 중요한 것은 사라짐을 경험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165쪽) ​


김연수의 『시절일기』는 우리가 같은 시간을 살고 있다는 걸 각인시킨다. 매일 경험하는 세계가 당신과 다르지 않다는 걸 말이다.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우리의 인생과 겹쳐지는 순간은 이어질 것이다. 어느 순간에는 분노하고 어느 순간에는 감격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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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2-10 1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글은 어떤 내용이든 참 곱고 차분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ㅎㅎ자목련님 축하드려요 *^^*

자목련 2022-02-11 09:56   좋아요 1 | URL
입꼬리가 올라가는 아침입니다. ㅎㅎ

그레이스 2022-02-10 18: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축하드려요~~

자목련 2022-02-11 09:56   좋아요 2 | URL
감사드리며 저도 축하드립니다.
맑은 하루 보내세요^^

서니데이 2022-02-10 22: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자목련 2022-02-11 09:56   좋아요 2 | URL
^^*
금요일과 이어진 주말 신나게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