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무해한 사람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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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으면서 종종 작가를 생각한다. 허구의 이야기, 꾸며 낸 가짜라는 걸 알면서도 그 내면에는 분명 누군가의 삶이 존재할 거라 생각해서다. 최은영의 소설은 뭐랄까. 연약하면서도 단단하다. 그래서 자꾸만 읽게 되고 생각하게 만든다. 『쇼코의 미소』에서 만난 그 맑음의 슬픔과 연대가 좋았다. 이번 『내게 무해한 사람』도 큰 틀에서는 이전의 이야기를 벗어나지 않았다고 여겨진다. 20~30대 여성의 이야기. 고민과 아픔, 사랑을 통해 성장하는 성장통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일부러 상처를 주려고 한 게 아닌데도 우리는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는다.

주저하는 듯 조심스러운 고백처럼 다가오는 문장들이 많다. 어쩌면 그 문장들은 삶의 한 조각이며 한 시절이었을지도 모른다. 처음 만났던 설렘을 간직하며 천천히 서로가 하나가 되어가던 마음, 그 순수하고 풋풋한 아름다움이 수채화처럼 그려진 「그 여름」속 ‘이경’과 ‘수이’의 서로를 향한 뜨거웠던 마음이 서서히 식어가는 게 안타깝다. 사랑은 사랑 그 자체만 영원할 뿐 온도와 형태는 변화하는 게 당연한 것인가. 아니, 열여덟의 그들은 서로에게 무해했고 지금도 그러할 것이다. 사랑이라는 거대한 감정의 테두리 안에서 그들의 사랑은 퇴색되지 않을 테니까.

여전히 가부장적인 집안에서 고통을 참아내며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을 다룬 「601, 602」아프고 화가 나는 이야기였다. 여성이라서 더욱 섬세하게 포착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우리가 그동안 모르 척했던 이야기는 아니었을까. 마음이 아프다. 내가 여자가 아니라면 다르게 느꼈을까.

그런가 하면 다툼으로 헤어져 각자의 삶을 살아가느라 떨어져 지낸 시간보다 서로에 대해 잘 모르는 게 더 많은 「지나가는 밤」자매 ‘윤희’와 ‘주희’의 속마음은 애잔하고 뜨겁다. 미국에서 5년 만에 한국에 온 윤희는 동생 주희네 집에서 지낸다. 이혼 후 혼자 아이를 키우며 살아가는 주희와 어린 시절을 더듬으며 서툰 화해를 한다. 제목은 지나가는 밤이지만 그 밤은 서로의 마음속에 깊게 내려앉을 것이다.


시기를 놓쳐서 마음을 전하지 못하는 이들은 얼마나 많은가. 누군가 아주 작은 용기를 냈더라면 상처로 채워진 시간은 줄어들 수도 있었을 텐데. 어려웠던 집안 사정으로 친척 집을 전전했던 「손길」속 ‘혜인’은 어린 시절 함께 살았던 숙모와 재회한다. 삼촌의 죽음으로 자신을 돌보고 키워준 숙모와 멀어졌다. 자신을 맡았던 숙모의 나이를 돌아보게 된다. 어렸을 때는 알 수 없었던 숙모의 마음을 생각한다.

그때의 여자의 나이가 되어 혜인은 생각한다. 여자는 어쩌면 자신에게 삶의 무거움을 미리 알려주려고 하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고. 자신이 세상과 인간에 대해 미리부터 겁을 집어먹지 않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고. 그저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다는 단순한 마음으로 그렇게 행동했는지도 모른다고. (「손길」 중에서)

이처럼 어떤 마음은 시간이 지나야 전체가 보이기도 한다. PC 통신이 활발했던 시절 친구로 만났던 ‘모래’, ‘공무’, ‘나’(나비)의 방황과 서로를 향한 감정을 다룬 「모래의 집」이 그러하다. 셋은 안정감을 주는 삼각형을 떠올리지만 관계에 있어서는 어려움을 뜻한다. 고등학교 시절 단짝이었던 ‘미주’, ‘주나’, ‘진희’의 우정이 진희가 커밍 아웃을 하면서도 깨지고 결국 진희가 세상을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고백」은 안타까울 뿐이다. 그 시간을 잘 견뎠더라면 괜찮아졌을까. 아니 잘 모르겠다. 다만 이런 문장이 힘이 된다. 후회로 남은 시절, 용서하거나 용서받고 싶은 순간을 위로한다. 그리운 이의 이름을 가만히 읊조리거나 소중한 사진을 꺼내는 것처럼 누군가 그리울 때면 돼뇌이고 싶다.

어른이 되고 나서도 누군가를 이해하려고 노력할 때마다 나는 그런 노력이 어떤 덕성도 아니며 그저 덜 상처받고 싶어 택한 비겁함은 아닐지 의심했다. 어린 시절, 어떻게든 생존하기 위해 사용한 방법이 습관이자 관성이 되어 계속 작동하는 것 아닐까. 속이 깊다거나 어른스럽다는 말은 적당하지 않았다. 이해라는 것, 그건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택한 방법이었으니까. (「모래로 지은 집」 중에서)

그런 밤이 있었다. 사람에게 기대고 싶은 밤. 나를 오해하고 조롱하고 비난하고 이용할지도 모를, 그리하여 나를 낙담하게 하고 상처 입힐 수 있는 사람이라는 피조물에게 나의 마음을 열어 보여주고 싶은 밤이 있었다. 사람에게 이야기해서만 구할 수 있는 마음이 존재하는지도 모른다고 나의 신에게 조용히 털어놓았던 밤이 있었다. (「고백」 중에서)

최은영의 소설은 이상하게 어떤 이들을 불러온다. 그들은 제목처럼 내게 무해한 사람이고 내가 사랑한 이들이다. 삶이 불행과 불운으로 가득했다고 믿으며 미욱한 나와 치열하게 다투던 나를 사랑해 준 사람들이다. 그런 이유로 작가의 말이 유독 애틋하게 다가온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리워하고, 누군가로 인해 슬퍼하게 되는 인간의 어쩔 수 없는 마음이 내 곁에 함께 누워주었다. 그 마음을 바라보며 왔다. 내 의지와 무관한 일이라는 것을 알지만, 살아 있는 한 끝까지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다. 이것이 내가 사람을, 그리고 나의 삶을 사랑하는 몇 안 되는 방식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작가의 말」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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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26 10: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10-27 15: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공쟝쟝 2021-10-26 10:0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가장 좋아하는 소설집입니다. 인용해주신 문장들을 다시보니 마음이 또 말랑말랑해지려고 해여. >_<

자목련 2021-10-27 15:53   좋아요 2 | URL
말랑말랑해진 마음이 오래 가면 좋겠어요. 단단해질 때도 필요하지만 말이에요^^*

새파랑 2021-10-26 10:2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도 국내 작가님들중에 최은영 작가님 너무 좋더라구요. 특히 <내게 무해한 사람>이 가장 좋았어요 ^^
자목련님 리뷰를 읽으니 다시 읽고싶어 지네요~!!

자목련 2021-10-27 15:52   좋아요 1 | URL
새파랑 님의 이 댓글을 작가님이 본다면 정말 좋겠어요. 좋은 문장이 참 많았어요^^

mini74 2021-10-26 12: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최은영작가님 ! 저도 좋아하는 작가, 입니다. *^^* 반가워서 ㅎㅎ

자목련 2021-10-27 15:51   좋아요 2 | URL
많은 분들의 최애작가인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