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딸이다. 엄마와 딸이라고 쓰면서 엄마와 딸이 할 수 있는 것들을 나는 엄마랑 몇 가지나 했을까 기억을 더듬는다. 굳이 엄마와 딸이 할 수 있는 것들이라고 구분하지 않더라도 나는 엄마랑 함께 한 게 거의 없다. 어린 시절 목욕탕에도 큰언니랑 갔고 속옷을 사준 것도 여름용 샌들과 원피스를 사준 것도 큰언니로 기억한다. 우리 엄마는 왜 그랬을까. 마음의 여유가 없었을까. 먹고사는 일에 바빠서, 논으로 밭으로 갯벌로 일하러 다니느라 셋째 딸에게 필요한 게 뭔지 살필 수 없었을 것이다.
그제는 어버이날이었다. 어버이날이 아니더라도 엄마는 항상 그립다. 그래도 대놓고 그립다고 말할 수 있는 날이 어버이날일 것이다. 여기저기 어버이날과 함께 자동으로 떠오르는 카네이션과 용돈, 감사편지 같은 글들이 있었다. 사랑이 가득 담긴 글이었다. 살짝 부럽기도 했고 살짝 우울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제 낮에는 낮술을 마셨다. 지금 생각하니 한 캔으로는 부족했다.
엄마와 딸이 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다 엄마가 등장하는 소설, 5월에 읽으면 더 좋을 소설을 하나씩 꺼내본다. 백수린의 『친애하고, 친애하는』, 김혜진의 『딸에 대하여』, 강진아의 『오늘의 엄마』, 가장 최근에 만난 제시 버튼의 『컨페션』이 생각난다.
대부분의 일하는 엄마는 자신의 엄마에게 어쩔 수 없이 돌봄을 부탁한다. 돌봄은 끝이 없다. 백수린의 장편소설 『친애하고, 친애하는』에서 화자의 엄마가 유학을 하는 동안 화자는 할머니와 지낸다. 그 시간을 짐작하는 이는 그런 유년시절의 간직한 사람들이다. 여전히 육아는 어렵고 믿고 맡길 수 있는 돌봄의 기관은 적다. 할머니의 돌봄에서 자란 화자가 하는 말, 엄마가 되어서야 엄마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엄마가 되고 엄마의 삶이 궁금하지만 곧 그 모든 것은 아이를 향한다.
엄마, 엄마도요. 내가 생겼을 때, 이런 마음이었어요? (『친애하고, 친애하는』 중에서)
어른이 되고 점차 엄마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순간과 마주하지만 엄마의 삶을 고단함을 알기엔 충분하지 않다. 엄마의 이야기를 들을 기회도 없이 엄마는 떠났다. 엄마와의 이별을 순차적으로 기록한 강진아의 소설 『오늘의 엄마』는 그래서 더 오래 마음에 머문다. 이별을 예감하며 살아가는 일상은 자칫 무겁고 어두울 것 같지만 아니다. 사는 일은 벼나지 않기에 그저 아픔을 지켜보고 때로 웃고 때로 울면서 살아간다. 이 소설은 엄마보다는 암으로 떠난 큰언니가 더 겹쳐졌다.
엄마의 시간은 끝이 없는 것 같다. 대학을 졸업시키고 독립까지가 끝이라고 여겼지만 소설이나 현실에서 엄마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딸을 외면할 수 없다. 김혜진의 『딸에 대하여』를 보면 더욱 실감 난다. 스스로를 부양하는 일도 버거운데 딸이 일상을 침범하는 것 같다. 딸의 선택을 인정할 수 없고 지지할 수도 없다. 딸과 엄마 사이에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물론 소설에서는 딸이 추구하는 삶의 가치에 대해 조금씩 다가가며 응원과 연대를 보내지만.
‘엄마’란 말에는 존재보다는 역할이 앞선다. 나의 존재의 근원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모든 걸 희생하도록 강요했던 시대가 지났지만 엄마를 독립적으로 바라보는 일에는 익숙하지 않다. 자신을 떠난 엄마를 찾는 과정을 다룬 제시 버튼의 『컨페션』을 읽다 보면 엄마가 아닌 한 사람의 삶에 대해 바라보게 된다.
엄마와 딸, 친구 같은 사이. 주변에서 그런 모녀를 볼 때면 마음이 환해진다. 나이가 들수록 점점 엄마와 딸은 막역해지는 것 같다. 조카와 올케언니를 봐도 그렇다. 엄마를 생각하는 작은 배려들이 예쁘고 대견하다. 한 사람의 딸로 태어나 그 우주에서 유영하고 사라지는 일, 축복받은 인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