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에도 몇 번은 절망한다. 하루에도 몇 번은 희망한다. 그건 아주 정상적인 일이다. (97쪽)
춥고 쓸쓸한 겨울밤이다. 까만 밤이 내리는 듯하다. 그런 밤은 때로 외로워서 눈에 힘을 준다. 시를 읽는 밤이 늘어난다. 마음이 울적해서 시를 읽기도 하고 아무 기대 없이 펼친 시집에서 다정한 마음을 선물 받는다. 시가 있어 좋은 계절, 겨울이다. 시가 태어나는 과정을 알지 못한다. 불현듯 쏟아지는 별똥별처럼 그렇게 태어나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시인만이 아는 통로에서 시를 발견하는 것처럼. 아니었다. 하나의 단어가 확장되고 하나의 문장을 고치고 다듬어졌을 때 시가 되는 것이었다.
시인은 떠났고 나는 시인이 남긴 시를 읽는다. 위암이 발병해 투병했다는 소식만으로도 나는 가슴이 아렸다. 암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일상을 고통스럽게 만드는지 조금은 알기에. 그 시간을 지켜보았기에. 그래서 일면식도 없는 시인의 부재가 아프고 아프다. 어쩌면 고국이 아닌 타국에서 생을 마감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막연하게 얼마나 외로웠을까 생각한다. 곁에 소중한 사람이 있었고, 사랑하는 이들과 마음을 나누었을 게 분명한데도 나는 자꾸만 그런 생각을 들춰낸다.
시인에게 시는 전부였다. 당연한 말처럼 들리지만 정말 그랬다. 2011년부터 2018년 떠날 때까지 쓴 시작 메모는 온통 시였다. 시인의 삶에 시는 그냥 시로 존재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시와 시인은 하나였고 서로 기대어 사는 존재였다. 메모라고 쓰고 있었지만 그 안에 담긴 사유는 시를 향한 갈망이었다. 하루를 시작하고 날씨를 기록하고 누군가를 만나고 어딘가를 다녀오고 그런 보통의 일상도 하나같이 시의 시작이었다. 시를 목적으로 하는 삶, 시를 향한 마음, 새로운 시를 쓰는 일상은 시처럼 고요하고 헤아릴 수 없는 시처럼 어려웠다. 어스름의 순간, 나는 하나의 장면을 상상한다. 지금 자판을 두드리는 의자에 담긴 어떤 기운을 느낀다. 나는 시인이 아닌데도 그 마음을 짐작하고 싶다.
간절히 기다릴 때는 아무도 오지 않는다. 저녁이 찾아오는데 등이 시려서 옷을 하나 더 껴입으려다 슬그머니 당신의 손이 내 등에 닿아 있다 생각하고 옷을 의자에 내려둔다. (26쪽)
겨울을 즐겨야 할 시간이다. 하얗게 쌓인 눈으로 둘러싸인 세상. 눈을 바라보는 일은 즐겁지만 헛헛한 마음을 채우는 일은 어렵다. 설명할 수 없는 그리움도 그러하다. 막막한 밤이 지나고 나면 아침이 온다는 걸 모르지 않지만 한 번씩 새벽에 깰 때면 화장실에 다녀오고 나서도 잠들지 못한다. 스마트폰을 만지다가 다시 이불을 끌어당겨도 오른쪽 왼쪽으로 돌아눕기를 반복한다. 그 시각이 길어서 힘이 든다. 내가 원하는 건 깊은 잠일뿐인데. 시인이 원하는 건 무엇이었을까. 한국의 서울에서 지인을 만나고 돌아가는 그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아끼는 이의 시를 읽고 그들이 건네준 애정을 받고 다시 삶을 위해 돌아가는 그 길을 상상할 수 없다.
오늘 나의 일은 초록이 얼마나 무성한지, 그 무성함은 얼마나 아름답고도 참혹한 시간을 살게 하는지 생각하는 것. 가을이 오면 그 시간들 앞에서 나는 얼마나 솔직하지 못한 언어의 욕망에 시달릴 것인가. (175쪽)
시인의 계절은 어떤 모습, 어떤 표정이었을까. 새해의 시작 시인의 글을 따라 읽으면서 내가 지나온 계절들을 떠올린다. 무더웠던 여름, 사랑에 빠졌던 봄, 병실에서 보냈던 여름, 그 계절들과 시인의 그것이 같을 수 없겠지만 문득 신성하게 다가온다. 타인의 부재와 슬픔을 통해 삶을 배우고 살아가는 우리의 계절들.
언젠가 쓸 수 없는 순간이 반드시 온다,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301쪽)
언제나 내가 원하면 내가 쓰고 싶은 것들을 쓸 수 있다고 믿으면 살아온 나였다. 그러나 시인의 말처럼 나도 쓸 수 없는 순간이 올 것이다. 시인의 글이 가슴에 박힌다. 쓸 수 없는 삶, 보통의 일상을 유지할 수 없는 순간이 온다는 건 무섭고 두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그 순간만을 생각하며 겁에 질려 살 수는 없는 일. 병원에 가기 전에 베란다 창 틀에 올려 둔 귤을 퇴원 후 돌아와 마주하며 쓴 시인의 글이 오래 마음을 붙잡는다.
나는 귤을 쪼갰다. 귤 향! 세계의 모든 향기를 이 작은 몸 안에 담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살아오면서 맡았던 모든 향기가 밀려왔다. 아름다운, 따뜻한, 비린, 차가운, 쓴, 찬, 그리고, 그리고, 그 모든 향기. 아, 삶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가기 전에 나는 써야 하는 시들이 몇 편 있었던 것이다. (307~308쪽)
그때를 알 수 없지만 우리는 모두 떠날 존재다. 사라질 존재라는 사실은 서글프지만 그러므로 우리의 생은 아름답게 빛나야 한다고 생각하니 담담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