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얼굴을 가진 지식 - 인간의 얼굴을 가진 지식 서강인문정신 7
강영안 지음 / 소나무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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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남한 사회와 학계에 ‘인문학의 죽음’이라는 테제가 제출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96년을 기점으로 대학은 신자유주의 시장법칙 속에 스스로의 학적 영혼과 그 모든 실천기제들을 번제하기 시작했고, 기초학문으로서의 자연과학 분과들과 인문학의 기초적 분과들은 그 유용성을 의심받기 시작했다. 그것은 일견 자연스런 과정이다. 하긴, 자본주의 권력과 시장이 교육 부분을 용케 잠식하지 않았다는 것이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일 것이다. 그것은 남한 사회 교육 풍토의 특수성에서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고, 또한 나쁘게 말한다면, 학문에 대한 봉건적 순수성 따위가 그러한 전진적 폐절을 용인하지 않았던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또 하나 지적할 수 있는 것은 학문을 가르치고 전수하는 남한의 제도적 패러다임이 정치사회적 변화에 얼마나 둔감한가 하는 것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상황이기도 한 것이다. 소위 아카데미즘의 폐해는 스스로의 학적 권위를 계속적으로 생산하는 데 있어서, 일부 학회나 학회지 그리고 어떤 권위에 의존하는 타성을 쉽게 벗어버리지 못한다는데 있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권위를 떠받치는 진정한 원동력이 다중(multituse)의 지적 역량과 그 감수성에 있음에도, 아카데미즘은 ‘과학’이라는 폐쇄된 구조 내부에서 한발짝도 나오고 싶어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혹자가 지적하기를 인문학의 죽음을 운운하면서 우는 소리는 내지 말라고 한 것은 일리가 있다. 하여간 스스로 자초한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강영안 교수가 말하는 인문학의 죽음은 이러한 상황을 읽어 내는 것에서 시작한다.

 우리가 현재 맞이하고 있는 인문학 위기의 근원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이야기되는 인문학의 위기는 주로 사회적?경제적 유용성과 관련이 있다. 문화대학 출신 학생들이 비문과대 출신에 비해 입사시험 응시 자격에서부터 더 많은 제한을 받는다든가, 인문학과 관련된 분야의 연구비가 적다든가, 인문학 분야의 학자 지망생이 비인문학보다 수적으로나 질적으로 떨어진다든가 하는 것은, 인문학이 현재 사회적으로나 정책적으로 받고 있는 홀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현상들이다.(6)

다시 말해, <사회적?경제적 유용성>의 위기가 바로 인문학의 위기‘처럼’ 회자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강영안 교수가 보기에 이러한 유용성의 위기는 인문학의 본질적 계기에 비춰본다면 ‘엄살떠는 것’에 불과하다. 인문학은 본래 <무용지물(無用之物)>이다. 그러니, 이러한 외적 유용성의 상실이란 전반적 위기의 진단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내적 유용성, 즉 <인격과 삶을 변화시키고 삶의 의미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수단으로서의 유용성마저 상실>(19)되는 데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내적 의미와 유용성마저 상실되는 것은 어떤 이유 때문인가? 인문학의 ‘불가능한 꿈’이 시작되는 곳에 이 상실의 혐의가 놓인다. 불가능한 꿈이란 어떤 것인가? <요컨대 근대 인문학은 여타 과학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과학’이 되었다.>(20)

이러한 과학적 인문학의 꿈이 가지고 있는 긍정적 측면을 놓치지 않으면서 강영안 교수는 그 꿈의 불가피한 실천적 아포리를 파악하고자 한다.

 인문학도 다른 과학처럼 엄밀한 과학적 절차를 밟아야 한다는 요구로 인해 과거에 볼 수 없었던 수준 높은 연구 성과가 여러 인문학 분야에 산출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인문학은 과학이 되면서 그 어느 때보다 풍부하고 다양한 지식을 제공해 주었지만 구체적 삶과 인격과는 점점 거리가 생겼고 ‘인간성’ 형성이라는 원래의 목적은 퇴색되고 말았다.(23)

 <인격>과 <인간성> 그리고 <구체적 삶>, 이러한 인문학의 토대와 목적이란 바로 ‘윤리적 타당성’외에 다른 것이 아닐 것이다. 이 지점에서 강영안 교수의 관점이 드러난다. 따라서, 인문학의 근원에서 작동하는 이 윤리적 요구는 ‘책임성’으로 이어질 것이다.

 동아시아 전통의 사람들이 ‘이치’를 따진다든지 고대 헬라스 사람들이 ‘로곤 디도나이logon didonai’를 요구한 것은 무엇을 안다고 할 때, 무엇을 주장할 때, 또는 무엇을 할 때는 이유와 근거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염두에 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의 논리적 연역 가능성이나 경험적 검증 가능성에 대한 요구라기보다는, 주장에 대해 근거 없는, 터무니없는 소리를 할 것이 아니라 ‘근거 있게’ 즉 스스로 책임지는 발언을 해야 한다는 하나의 윤리적 요구였다.(50)

 그러므로, 진정한 인문학의 위기는 인문학이 그의 ‘윤리적 책임성’이라는 본래의 토대를 망각하고 ‘과학’이라는 불가능한 꿈을 향해 스스로를 주형해 내려고 했다는 데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꿈의 틀거리 역할을 한 것인 바로 <인간을 배제한 객관주의>다. 이 틀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그러나 인문학의 본래 지평을 완전히 허물지는 못했다. 그것은 근대 과학적 철학 초기에서도 드러나는 바라고 강영안 교수는 이야기 한다. 이를테면, 데카르트의 경우 그의 방법적 회의가 목표로 하고 있는 ‘모든 학문의 토대’라는 이념은 바로 그의 건축적 상상력에서 비롯되었으며, 이러한 상상력이야말로 근대 과학 이념에서 추방되어 마땅한 것이었다는 말이다.(39-40) 따라서, 과학과 객관주의는 애초에 인문학의 근본을 흔들지 못한다.

이러한 강영안 교수의 진단은 이제 어떤 방식의 해법을 마련할 것인가? 여기에서 강영안 교수는 정치적 방식보다는 학문내적 전환을 촉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후설이 토대를 잃고 형해화되어 가는 철학에 대해 ‘사태 자체로’를 외쳤듯이 강영안 교수는 두 가지 대상에 방점을 찍는다. 바로 ‘삶’과 ‘텍스트’다. 이 두 대상은 일종의 해석학적 순환(hermeneutical circle)속에 놓여 있는 것처럼 얘기 된다. 그런데, 과연 삶이란 텍스트의 매개를 통해서만 이해되고 변화되는 것인가? ‘텍스트에는 안과 밖에 없다’는 데리다의 말은 이 경우 매우 진실한 옹호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텍스트 해석을 통해 주체의 진정한 자기성(selfhood)을 이해하려고 했던 리꾀르도 또한 이러한 방향으로 사유의 위기를 돌파하려 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텍스트가 철학하기, 곧 삶의 정수를 이해하고 변혁하는 데 있어서 필수적이라면, 그 텍스트를 이해하는 기술(techne)이 없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삶의 정수를 뽑아 올리는 것은 철학자만의 특권인가? 여기에 대해서 강영안 교수는 별다른 대답을 마련하고 있지 않은 것 같다. 다만, 철학에서 인문학적 진정성을 기대할 수 있는 곳이 다름 아니라, 그것의 기본 즉 텍스트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주장을 펼친다. 그래서, 이 책의 마지막 장이 주자의 독서론에 대한 논변이라는 것을 주목한다면, 당대의 석학으로서 강영안 교수가 겸손하게나마 또는 조심스럽게 학자적 본분을 지키며 내놓는 해법은 매우 온건하다.

 인문학의 중심인 독서 공부는 모든 학문에 필요하다. 형이상학적 체계를 구성하든, 자연을 연구하든, 사회현상을 기술하든 간에 책과 텍스트를 읽는 행위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내가 만들지 않은, 나 보다 먼저 있어 온 텍스트를 읽고 생각하며, 읽을 바를 스스로 실천에 옮기거나, 읽은 바를 바탕으로 새로운 텍스트를 만드는 것은 인간의 삶의 근본 양식이다. 인간의 삶은 어떤 방식으로든 문자/텍스트/책을 떠나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인문학은 고전 텍스트를 단지 협애한 과학적 연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삶의 의미를 묻고 기술을 배우는 방식으로 새로이 폭넓고 다양하게 읽음으로써 오늘날 우리 문화가 절실히 필요로 하는 삶의 학문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194)

 <인간의 삶은 어떤 방식으로든 문자/텍스트/책을 떠나 있을 수 없다>라는 단언은 뒤에 오는 <협애한 과학적 연구>에 대한 비판인 동시에 그러한, 텍스트 해석이야말로 ‘과학’의 토대며 나아가 <삶의 학문>을 위한 기본이라는 것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으로 들린다.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 우리는 이러한 강영안 교수의 주장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리고, 또 더 나아가야 한다. 문제의식 자체가 삶과 인문학이라면, 그것의 첨예한 지점은 텍스트에서만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차라리 텍스트를 뚫고 나가는 사유의 ‘힘’이 더욱 필요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그 힘은 바로 ‘독창성’이라고 불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잠시 주의하자. 이것은 어떤 텍스트적 맥락을 완전히 벗어나고자 하는 헛된 망상을 일컬음이 아니다. 진정 궤도를 이탈하는 체험을 하고자 한다면, 그 궤도의 ‘권태’가 무엇이며, 그 궤도가 속한 공간의 위상이 어떤 것인지 알아야 한다. 이 궤도와 위상이야말로 서양 철학이 근대 이후 구축해온 거대한 정신의 체계다. 사실상, <읽기의 경우에 완벽한 이해가 언제나 지연되어 있듯이 쓰기에도 언제나 완벽한 독창성은 저만치 물러서 있다.>(189) 그렇다면, 이런 한에서 우리는 텍스트의 세계를 일탈하기 위해 언제나 유예되는 권태를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무한한 텍스트의 지평에서 만나는 다른 주체들, 철학자들과 개념들과 사물들의 위상을 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유예되는 텍스트의 의미와 함께 그것의 위상을 파악하고자 하는 것은 일종의 사유의 모험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모험은 절대 철학하는 자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유아론적 철학은 존재하지 않는다. 철학은 언제나 상호주관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이다.>(191) 이제 여기서 강영안 교수의 진의가 드러난다. 텍스트와 철학과 삶은 이 상호주관적 장 안에 포진해 있는 우리 사유의 ‘황금비율’이 된다. 그렇다면, 상호주관성이라고 했을 때 여기에는 분명 ‘타자’의 함의가 있다. 왜냐하면, 삶이야말로 이 타자성의 윤리적 전개의 장소 외에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강영안 교수의 논의를 따라 가면서 뚜렷한 무언가를 배우게 된다. 즉, 삶(타자)과 철학과 텍스트가 진정한 독창성과 조우할 때, 그때야말로 인문학의 철학이 가능해진다는 것, 그리고, 철학은 이 긴장된 벡터장을 분명 관념이 아닌 현실 안에 정위해야 한다는 것 말이다. 이 가능성을 타진하고 실천하는 것이 강영안 교수의 논의를 뛰어 넘는 미래 사유의 임무일 것이며 강영안 교수 자신이 바라는 바일 것이다. - Noma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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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중 - 현대의 삶 형태에 관한 분석을 위하여 아우또노미아총서 5
빠올로 비르노 지음, 김상운 옮김 / 갈무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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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뜨거운 가을’ 이후 자율주의는 유령이 되었다. 공교롭게도 자본은 유령이 됨으로써 더 강력해진 이 한 무리의 급진좌파 그룹들에게 ‘테러리즘’이라는 범죄적 시혜를 베품으로써 그들이 감옥 안에서 그리고 정치적 망명을 통해 이론을 벼루어낼 수 있도록 했다. 멍청하고 귀여운 부르주아들이라니. 그러나, 그 중에는 부르주아 의회정치로 투신하는 축(쎄르지오 볼로냐)도 있었고, 발전적(?) 해체를 통해 구좌파 그룹의 일원으로 회귀한 축도 있었다. 어쨌든 이탈리아 노동운동의 새로운 지평은 이들 자율주의 오빼라이스모 그룹들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일정한 분화과정을 통해 상당한 인물들이 전세계적인 공명을 얻고 있는 것도 또한 명백하다.


우리는 얼마 전 열린 ‘세계사회포럼’의 기사 한 꼭지로부터 네그리의 강연에 모인 청중들이 어떤 다른 강연자의 청중들보다 많았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유령이 그 권능을 발휘하는 것은 1848년의 일이었을 뿐만 아니라, 명쾌한 감성으로 모여든 포스트-포드주의 <일반지성>의 <다중>들에게도 일관된 사건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책상머리에 앉아서 곧장 ‘혁명’을 외치지는 말자. 즐겁게 삶을 향유하는 것과 축제와 더불어 ‘혁명하기’가 산뜻한 의미에서 유령의 새옷과 새집이 되게하는 것은 그리 오랜 인내를 요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차분한 낙관주의만을 ‘음험하게’ 간직해 보는 것이 좋다. 다시 말해, 그건 실천이면서 노동이고, 축제면서 혁명인 그런 시대의 <기분>이다. 더 이상, 국가이성으로 귀결되지 않는 다중의 지성이 펼쳐낼 이 전복의 상상력은 더 이상 ‘현실태’가 되기를 기다리는, 또는 ‘혁명의 만조기’를 기다리는 그 민중의 ‘가능성’이 아니다. ‘잠재성’이란 그런 기다림이 오기 전에 이미 현실화되어 있다. 혁명의 시제는 언제나 ‘전미래시제’이기 때문이다.


네그리와 더불어 포스트-포드주의 ‘다중’의 이러한 잠재력을 이론적으로 펼쳐내는 빠올로 비르노의 노고는 그래서, ‘글쓰기’만의 일이 아니다. 그것은 네그리가 『제국』의 한 부분에서 말했다시피 <경향성의 한가운데>에서 이 새로운 주체성의 도래를 ‘선포’함과 동시에, ‘독려’하는 작업의 일부이다. 마치, 당대에 막 발흥하던 맑스의 유령으로서의 ‘산업 프롤레타리아트’가 1848년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라는 거친 구호를 받아 안고 비로소 ‘사회적 주체’가 되었듯이, 비르노에게 ‘다중’은 그 실천적 함의를 떠나서는 도대체 제기될 가치조차 없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이 지점에서 일어나는 흔한 오해란, 다시 말해, ‘도래’만을 기다리는 한 무리의 ‘인터네셔널’ 그룹에게는 이상한 악몽과 같다. 아니, 그래서야 어찌 ‘다중’이 맑스주의적인 ‘과학성’을 담보하겠느냐는 것이다. 일거에, ‘헛소리’이며, ‘분열책동’이 되는 것으로서의 이유치고는 상당히 익살맞은 것이기도 한 ‘오해’란 따라서 일종의 ‘관성에 집착하는 불안’에서부터, 또는 좀 더 심하게 얘기하자면, 이론전 고답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혁명론은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되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따라서, 비르노가 이 책을 통해서 밝히고자 하는 바는 뚜렷하다. ‘사회적 주체’로서의 ‘다중’의 테제를 첨예화하는 것. 그러려면, 우선 오래된 유물들을 책상 위에서 치워버림으로써 쟁점의 날을 세울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민중> 개념에 대한 비판을 시도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비판 작업이 ‘다중’ 개념에 대한 융숭한 대접을 동반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비르노에게 <민중>은 해묵은 것이기도 하지만, 여전히 힘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다중’이 ‘민중’보다 더 풍부한 역사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은 명약관화하다. 누가 그것을 부정하겠는가? 그렇다면, 이제 중요한 것은 그 ‘빈곤함’이 역설적으로 이제 막 ‘도래’하는 주체성에 대한 ‘독려’와 수행력이 되게하는 그 본질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이것은 ‘민중’ 개념을 사멸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다중’에 새로운 함의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다중’은 그 자신만을 증인으로 소환할 수 있는 미래완료의 주체성이기 때문이다.


한나 아렌트와 하이데거,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비르노에게 중요한 시금석이다.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 <잡담>과 <호기심> 등의 개념이 중요해 지는 것은 오직 이런 의미에서다. 모든 것은 ‘다중’의 잠재성에 의해 비판될 것이다. 아렌트의 <정치의 노동화>라는 테제는 <노동의 정치화>에 의해 전복된다. 하이데거에 의해 채택된 현존재분석은 비르노에게 ‘다중’의 한 속성으로 ‘긍정’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경계를 그어 놓았던 <공통의 장소>와 <특별한 장소>의 이분법은 경계의 소멸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진행되는 이유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다. 비르노의 ‘다중’은 바로 1968년의 낭떼르와 이탈리아 삐아트 노동자들의 경험 속에서 나온 것이지, ‘프랑스노동총동맹(CGT)’이나 이탈리아 공산당의 상집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실천 속에서터져 나왔으므로, 당연히 지금까지의 노동정치적 담론들을 전복하는 힘을 가질 것이다.


이를테면, 급진적 언사로 자신을 치장하는 의회사회주의자들의 립서비스란 이런 경우 경멸의 대상이다. 투쟁에 대한 심각한 크레틴병 증상에 시달리는 이 한꾸러미의 좌파 데모고그, 또는 지식논공상들이 68년 프랑스와 69년 가을의 역사적인 기점에서 반동의 역할을 맡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사회적 주체성의 변화를 읽지 못하는 무능력이 이들의 면죄부가 될 수 없다는 것도 또한 분명하다. 이후 전세는 역전되었고, 이들 도둑고양이 무리들은 여전히 자본의 쓰레기통을 뒤지며, 거기서 뭔가 야릇한 음식물(예를들어 ‘신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임무’ 따위)을 찾기를 고대하면서 여전히 의회찬가에 열중하고 있는 중이다. 하여간 우리가 이 무리들에게그리 많은 노고를 투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여기/지금 작렬하는 ‘다중’의 주체성과 그 전대미문의 역동성이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 대상에 대한 비르노의 시선은 상당히 엄격하다. 그것은 비르노 스스로가 부여한 이론적 금욕성이기도 하고, <열광적인 단순화나 피상적인 축약>(45)으로 인한 전략적인 실책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비르노에게 ‘다중’은 일의적으로 규정되거나 단순화될 수 없는 <양가성>이다. 즉, <다중은 존재양식이며, 그것도 오늘날 만연해 있는 존재양식이다. 하지만 모든 존재양식과 마찬가지로, 다중은 양가적이다. 다시 말해서 다중은 자신 내부에 상실과 구원, 묵인과 갈등, 예속과 자유 등을 모두 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46) 그러나, 과거로의 퇴행은 허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중요한 요점은 이러한 양자택일의 가능성들이 민중/일반의지/국가라는 성좌 안에서 나타났던 것과는 상이한, 특수한 생김새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같은 쪽) 여지없이 화살은 ‘민중’에게로 향하고 있다. 그리고, 과녁은 ‘다중’의 본질적 실재를 밝혀 놓는 쪽으로 갈수록 더 나은 결과를 내게 될 것이다. 결정적인 것은 앞서 얘기했듯이 ‘열광’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두려움과 불안>이라는 테제는 부정적인 외양과는 달리 ‘다중’을 정의하는 가장 그럴듯한 속성 중에 하나가 된다.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경계가 붕괴했다는 것이야말로 이 ‘두려움과 불안’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현상이다. 통상 우리가 포스트-포드주의라고 부르는 자본주의 구성체에서 노동시간과 여가시간의 구분은 없다. 네그리가 아주 명민하게 꿰뚫어 본 바와 같이 ‘삶/여가’를 지배하는 자본의 시계는 공적인 노동의 시간, 즉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지옥’과 사적인 향유의 시간을 구분해서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른 것이다. 노동과 여가는 완전히 겹쳐진다. 따라서, <안정적인 ‘내부’와 불확실하면서도 지상에 있는 ‘외부’를 현실적으로 구별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삶의 형태의 영속적인 가변성(verialité) … 그러므로 두려움과 불안은 완전히 포개진다.>(53) 이것을 우리는 비르노와 함께 <혼란스러움perturbant>의 양상이라고 부를 수 있다.


다중이 처한 상황이 이렇게 될 때, 다중은 새로운 방어기제를 작동시키게 된다. <지성>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일자>로 환원되지 않는 <다양성>에 노출된 ‘지성’이며, 발산하는 <일반지성>과 같다. <내 관점에서는 포스트-포드주의 시대에 다중이 공연하는 악보는 지성이라고, 즉 유적 인간 능력으로서의 지성이라는 점을 나는 결코 주저하지 않고 말하겠다. 맑스의 용어를 따르면 근대적 거장의 악보는 일반지성, 즉 사회의 일반적 지성이며, 사회적 생산의 중심축이 된 추상적 사유이다.>(109) 다중의 악보인 일반지성은 이렇게 해서 맑스의 ‘기계’로부터 탈주하여 사회적 중심들을 하나씩 무너뜨리면서 전사회적인 공통성의 장소가 된다. 그 장소는 그리스의 아고라와 같다. 온간 잡담과 수다스러움이 난무하는 곳. 따라서, 언어는 다중의 악보에 쓰여진 음표들이며, 이렇게 해서 <일반지성은 정신의 추상화가 직접적으로, 그리고 그 자체로 실질적 추상화이게 되는 바로 그런 단계>(111)로 진입한다. 그러나, 여기 중대한 문제가 있다. 이때, 일반지성은 다중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태어나자 마자 소외된 상태에 있다.  부당한 탈취. 자본주의하에서 이러한 ‘탈취’는 ‘소유권(저작권)’이라는 법리적 사기수단에 의해 정당화될 것이다. 이제, 인간의 노동역량 뿐만 아니라 인간의 유적본질 자체가 착취의 대상이 된다. <인간이라는 동물이 지닌 가장 유적인 소통과 인지 능력을 작동하게 하는 것(그리고 이득을 얻게 하는 것)은 역사적 지표, 역사적으로 결정된 형태를 갖는다. 오늘날 일반지성은 임금노동의 영속화로, 위계적인 체계로 잉여가치 생산의 정점으로 표방된다.>(115) 부르주아지의 기생본능은 매우 끈질긴 것이다. 만만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사실상 이들의 본질 자체(기생)가 취약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숙주가 영양공급을 거부하는 사태에서 기생충들은 모조리 죽어나갈 수밖에 없다.


<불복종>과 <탈주(엑소더스)>가 진정한 의미에서 ‘파괴적’인 힘을 가진다는 것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부르주아 사법체계에 보기 좋은 구멍을 뚫어버리는 힘이 이것이다. 네그리가 말했던 다중의 ‘야만성’, 스피노자적 역능(puissance)의 구현도 또한 이것을 의미한다. 삶-정치를 통해 파고드는 제국의 촉수를 일시에 태워버리는 힘이란 소통과 자율성에 의해 형성된 다중의 잉여를 기생충들에게 나누어주기를 거부하는 행위에 의해 가능하다. <탈퇴는 이러한 잉여를 자율적이고 긍정적이며 가장 고귀하게 표현하며, 이러한 잉여가 국가 행정 권력으로 ‘양도’되는 것을 훼방하거나 이러한 잉여가 자본주의적 기업의 생산적 원천으로 배치(configuration)되는 것을 방해한다.>(123) ‘양도’에 대한 거부, 또는 잉여가치의 전유에 대한 욕망.


그리고, 비르노는 책의 말미에 다중의 속성들을 테제화함으로써 독자들의 인식을 다시 한번 일깨운다.

<테제 1. 이탈리아에서 포스트-포드주의(와 더불어 다중)는 일반적으로 ‘1977년 운동’으로 지칭되는 사회적 투쟁과 함께 출현했다.

테제 2. 포스트포드주의는 맑스의 「기계에 관한 단상」의 경험적인 실현이다.

테제 3. 다중은 그 자체로 노동사회의 위기를 반영한다.

테제 4. 포스트-포드주의적 다중에게서 노동시간과 비-노동시간의 모든 질적인 차이는 사라진다.

테제 5. 포스트-포드주의에서는 ‘노동시간’과 훨씬 더 긴 ‘생산시간’ 사이의 항상적인 간극이 존재한다.

테제 6. 포스트-포드주의는 한편으로는 극히 다양한 생산모델들의 공존에 의해서, 다른 한편으로는 본질적으로 동질적이라 할 수 있는 노동 외부의 사회화에 의해서 규정된다.

테제 7. 포스트-포드주의에서 일반지성은 고정자본에 상응하는 것이 아니라 주요하게는 산 노동의 언어적 상호작용으로 제시된다.

테제 8. 포스트-포드주의적 노동-역량 전체는 가장 숙련되지 않은 노동마저도 포함하는 지적인 노동-역량이며, ‘대중의 지성성’이다.

테제 9. 다중은 ‘프롤레타리아화 이론’과는 완전히 무관하다.

테제 10. 포스트-포드주의는 ‘자본의 꼬뮤니즘’이다.>(168-191)

 

이 테제들은 빠올로 비르노의 ‘다중’이 책의 원제목(A Grammar of the Multitude)이 암시하는 바로서의 그 문법(Grammar)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어느 것 하나 그냥 지나칠 수 없는 통찰력을 담고 있는 이 테제들의 가치는 이후 우리가 생생하게 감각하게 될 ‘다중’의 <탁월한 기예>와 정치와 투쟁에 의해 실증될 것이고, 실증되고 있으며, 아마 많은 것들은 이미 이루어졌다.- Noma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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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거울 속의 슬픈 얼굴 - 사람 담은 최민식의 사진 이야기
최민식 글, 사진 / 현실문화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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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의 참상을 언어로 되살리며 독일 시인인 파울 첼란은 <진실로 말하는 자는/어둠을 본다>(『죽음의 푸가』 중)고 했다. 인간 카니발리즘의 정점에 선 시인의 감수성은 고통을 통해 지옥이 도래했음을 단박에 깨쳤을 것이다. 그리고, 그 지옥의 집정관들이 현실을 냉혹하게 집행하고, 또 다른 방관자들이 피해자들로부터 등을 돌릴 때, 예술은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모양으로 그 당사자들을 불러 세우는 법이다. 현실은, 따라서 어느 누구도 피해갈 수 없다. 더구나, 그것이 고통과 가난과 죽음의 현실일 때는 더 그렇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어느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누구보다 그 현실을 외면하는 것이 우리들 자신이라는 것을 말이다. 현란한 자본의 거리에서, 또는 시시각각의 정보들 속에서, 바쁘게 뛰어가는 일상 속에서 말이다. 우리는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사는 데 너무 익숙하다.

 

최민식은 그런 우리들의 비겁한 패배주의에 직설적으로 말을 건다. 아니 다가와 단숨에 목을 잡아챈다. 이럴 경우 완곡하게 에둘러 충고하는 것은 불필요하다는 것을 그는 안다. 사진이 곧 그렇기 때문이다. <사진은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고 할 때, ‘거짓’은 하루에도 수 천 수 만 장이 소비되는 광고 전단지 속의 예쁜 배우들의 몸매와 얼굴을 말하고자 함일 것이다. 하긴, 사진 자체가 리얼리티는 아니다. 그러나, 사진은 리얼리티를 존중해야 한다. 그것이 기본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리얼리티는 어디 있을까? 최민식은 그것이 주로 얼굴에 나타난다고 보고 있다. 환하게 웃는 어린애들로부터 일에 찌든 노동자들의 피로한 얼굴과 세월의 강이 흐르는 노인들의 주름살에 이르기까지, 얼굴은 인간적 개별성이 첨예하게 표현되는 리얼리티의 장소다. 그리고, 최민식은 그 장소에서 벌어지는 표정의 사건들 중에서 가장 환하게 드러나는 사건을 포착한다. <빛과 인물과 풍경이 하나가 되는> 그 지점. 최민식이 사진을 통해 기술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이것이 전부다. 따라서, 한국전쟁 종전 직후부터 지금까지 일흔 해가 넘는 시간 동안 그가 올곶게 추구한 것은 삶을 치장하는 기술이 절대 아닐 것이다. 삶의 본성은 ‘벌거벗은 것’이다. 완전한 ‘날것’으로서의 삶, 그 순간이 바로 삶의 절정이며 사진의 리얼리즘이 담아야할 최고의 순간이며, 그것으로 충분하다.

 

가난한 사람들, 불구인 자들, 고아와 노숙자들. 최민식의 사진이 놀라운 것은 이들의 시선을 똑바로 쳐다본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럴 수 있는가? 철학자 레비나스는 세상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이들의 시선이야말로 가장 존귀한 타자의 시선이며, 우리는 그 시선을 똑바로 대할 때 신성하고 초월적인 윤리적 경험을 겪게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우리는 일상 속에서 그렇게 하지 못한다. 비참한 자들의 시선을 피해간다. 그들이 어떤 위해를 가하지 않을까 불안해하며, 짐짓 경원시한다. 위선인 것이다. 사진은 위선을 참아낼 수 없다. 그들, 민중들 중에서도 가장 가난하고 불행한 자들의 시선은 최민식과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그대로의 모습일 것이다. 여기에 최민식의 현실인식과 사진에 대한 역사적 책무라는 것이 놓인다. 이쁘고, 보기 좋은 것을 담아내는 사진은 사진의 본령이 아니라고 그는 말한다. 그리고, 참 무던히도 흑백의 이미지만을 찍는다. 색깔이 아닌 명암이 삶과 죽음의 대척점에 서 있는 민중들의 의식을 표정으로 포착하는 데 긴요하다. 만약, 사진이 이 본래의 책무를 망각한다면 사진은 죽는다. 아무리 색감이 뛰어나고, 보기 좋다 하더라도 그것은 죽은 이미지만의 잔치일 뿐이다. 역사의식과 민중에 대한 애정과 사려가 담기지 않은 것은 최민식에게 ‘상업사진’일 뿐이다. 그리고, 화려한 기교와 초현실적인 이미지에 집착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시류에 따라 작가의식에 옷을 바꿔 입히는 짓을 마뜩찮아 하는 이 혈기왕성한 고령의 작가에게 중요한 것은 기교도 색감도 아니고, 그 철학의 깊이일 뿐일 것이다.

 

『종이거울 속의 슬픈 얼굴』에 실린 80여장의 사진과 그의 글들은 이와 같은 철학으로 보여지고 읽힐 수 있을 것이다. 난해하지 않고, 다만 ‘도발’하는 철학. 우리는 그 어떤 충격적인 사건이나 책에서도 느끼지 못하는 예술의 진정한 급진성(radicality)을 볼 수 있다. 왜냐하면, 파괴하지 않고 파괴하는 법을 최민식은 알고 있는 듯하기 때문이다. 궁륭을 날아다니는 예술은 숭고하지만, 삶의 모순에 도발하지 못한다. 그러나, 진창을 헤매는 예술은 어둠을 말함으로써 우리에게 ‘도발’한다. 그게,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최민식 사진의 고귀한 ‘권능’이다. - Noma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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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와 니힐리즘
마르틴 하이데거 지음, 박찬국 옮김 / 철학과현실사 / 200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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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에서 40년의 프라이부르크 대학에는, 하이데거가 강의하던 '니체'와 함께 전쟁선동이 막 정점을 향해 가고 있던 총통 히틀러와 나치의 깃발이 공존하고 있었다. 1933년, 후설 이후 이 대학 총장직을 이어받은 하이데거가 이런 정치적 변화들에 무감하였다고 볼 수는 없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니체를 '위해' 이 강의를 하였다기 보다, 니체와 니체의 시대를 하이데거 자신과 그의 시대의 알레고리로 읽어내려고 한다고 우리는 상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밝히고 있다시피, 시대를 초월하는 철학이 가장 부적절하고, 그렇다고 철학이 반시대적이지도, 시대에 부합하지도 않는 것이라면, 철학은 시위를 떠나기 전의 화살도 시대의 정점을 표시하는 과녁도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온전히 활의 시위 자체, 그 긴장의 점철과 연속일 뿐이다(243). 따라서, 이 강의, 혹은 이 책에서 하이데거가 니체를 바라보는 관점이란 일정한 전통 위에 니체를 배치하고, 그 속에서 팽팽한 긴장감을 부여하는 데 있는 것이다. 전통이란 이때, 플라톤 이래 서구 형이상학을 지배해 왔던 존재망각의 역사 자체를 의미하며, 그 가장 비근한 친족으로 데카르트를 위시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니체의 '반시대적 고찰'(동명의 니체의 책, 『반시대적 고찰』)에 익숙한 우리로서는 이러한 전략이 가지고 있는 함의에 처음부터 의구심을 가지게 하기에 충분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많은 부분에서 하이데거는 대가다운 세심함과 철저함으로 스스로의 관점에 오류가 없음을 천명하고, 단지 그 텍스트의 선정에 있어서 협소했음(「부록」)만을 시인하고 있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많은 니체 해석자들이 파악하고 있는 바와 같이 하이데거가 결정적으로 간과한 것은 니체 후기 저작군(群)들 중 중요한 대목들에서였으며(백승영), 특히 그의 초인 사상에 관해서 중대한 오해가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 책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비중이 감소하는 것은 아니다. 애초에 니체는 오해되고 있었고, 그 진의가 완전히 왜곡될 정도로 은폐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물며, 우리는 니체해석에 있어서는 하이데거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야 정당한 평가가 내려질 수 있다고 말해도 괜찮을 정도인 것이다. 예의 그 문학적이고 낭만적인 니체 해석이 횡행하던 시절에 하이데거는 그러한 해석이 가질 수 있는 가당찮은 오류들을 책상 머리에서 제쳐두고, 모든 것을 니체적 사태, 즉 사건(Erignis) 자체에로 지향했던 것이다. 따라서, 니체에 관해 어떤 식의 낭만적 우상화나 분석적 비하를 은연중에 품고 있는 독자들은 마땅히 하이데거의 해석에 먼저 귀를 기울여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끝내 밝혀낼 수 없을지도 모르는 하나의 질문을 던져 두고자 한다. 도대체 하이데거가 니체를 연구하면서, 또 그 이후 어째서 나치에 부역할 수밖에 없었던가 하는 질문 말이다. 철학이 삶과 함께 하고 그 삶이란 처음부터 정치적이라면, 하이데거의 선택은 어떤 의미에서든 철학적일 수밖에 없다. 그가 불충분했던 것일까? 그는 반유대주의자 프리취에게 보낸 니체의 경멸 섞인 서한을 몰랐던 것일까? 아마 그럴지도 모른다. 우리는 철학사에 이 특유한 국면, 즉 하이데거적 '결'을 대가의 실수를 대하는 당혹감 정도로 치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최종심급에서 철학이 삶의 결을, 또 삶이 철학의 결을 결정한다면 그러한 징후들은 반드시 철학 내부에 존재한다. 첫째로 우리는 하이데거의 니체가 데카르트적 주체성의 정점을 표현한다고 하는 대목을 접하게 될 것이다.

니체의 말에서는 셸링과 헤겔, 라이프니츠와 데카르트의 형이상학, 즉 근대 형이상학의 근본입장이 나타나 있다. 그리고 오직 그것만이 말하고 있으며 그것도 실로 데카르트가 정립한 근대형이상학이 말하고 있다. 니체 자신은 근대 형이상학을 개시한 데카르트와 결별했다고 믿었을지라도 말이다.(69)

다시 말해, 니체의 아우라는 데카르트다. 그러나, 그 후계자가 끝내 부정하고자 하는 아우라며, 그래서 더욱 강력한 것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왜냐하면, 니체에게 데카르트는 근대적 주체 즉, 코기토의 창립자이며, 문법적으로나 철학적으로나 불분명한 전제에 근거하고 있지만, 니체 자신이 그러한 데카르트의 전제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Cogito ergo sum'은 하이데거에게 형이상학의 근본명제가 된다. 그것은 어떤 전제의 전제보다 더 명백한 것이며, 모든 형이상학적 사유를 '지배'하는 근본 판단이다. 그러므로, 이 판단명제의 객관적 명증성은 추론으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이며, 오로지 직관으로 명약관화할 뿐인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이러한 직관을 토대로 펼쳐지는 이성의 활동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사유'다. 데카르트에게 사유란 '표상성'이다. 이성은 형이상학적 대상으로서의 범주(Category)를 인식하며, 그것만이 형이상학의 대상으로서의 근본표상이 된다. 사유가 표상을 다루는 한에서 표상은 Cogito 또한 표상한다. 이때 Cogito는 어떤 다른 표상과는 달리 스스로 표상하는 바, 그 표상을 표상하는 표상이라는 이중적 규정 속에 놓이게 된다. 따라서, 니체가 만약 사유를 자신의 철학의 인식론적 원리로 인정한다면, 데카르트가 전제하고 있는 그러한 표상성을 은연중에 인정하는 것이 된다. 하이데거가 착목하는 지점이 여기에 있다. 그리고, 니체의 공과는 이러한 데카르트적 전제를 정점에까지 밀어 올렸다는 데 있다. 주체성. 다시 말해, Cogito의 가능성을 실체적으로 고양시키는 것 말이다.

우리가 근대라고 부르는-서구의 역사가 지금 그것의 완성기로 들어서기 시작하고 있는-시대는 인간이 존재자의 척도와 중심이 되는 것, 즉 모든 대상화와 표상가능성의 근저에 놓여 있는 기체(基體, subiectum)이다. 니체가 근대의 형이상학을 정초한 데카르트를 아무리 예리하게 비판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데카르트가 인간을 아직 완전히 그리고 결정적으로 기체로서 설정하기 않았기 때문이다. 데카르트가 기체를 에고(ego) 즉 자아로서 표상하는 것, 다시 말해 기체에 대한 '에고이스틱한' 해석이야말로 니체에게는 아직 충분히 주체주의적(subjectivistisch)이지 않은 것이다. 존재자들에 있어서 인간이 갖는 무조건적 우위에 대한 설로서의 초인에 대한 설에서야 비로소 근대 형이상학은 자신의 본질을 완전하면서 동시에 극한에 이르기까지 규정하게 된다. 이러한 설에서 데카르트는 자신의 최고의 승리를 구가하는 것이다.(84)
 
하이데거가 바라보는 초인은 따라서, <존재자들에 있어서 인간이 갖는 무조건적 우위>에 선 인간 주체가 된다. 이때, '존재자'는 데카르트적 방식의 표상이며, 그 표상을 지배하고 그것에 대해 명령하는 지점에서 주체는 비로소 Cogito를 넘어 초인이 된다. 그러나, 여기서 하이데거가 처음에 전제했던 이성-범주로서의 주체가 니체에게는 문제가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하이데거에게도 이것은 간과할 수 없는 것이었을 것이다. 하이데거는 따라서, 온당하게도 니체의 주체가 온전히 이성-범주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것을 시인한다. 그것은 의지(volo)이며, 엄밀하게 말하자면, '권력에의 의지(Wille zur Macht)'다. 이렇게 해서, 하이데거는 니체철학의 핵심에 와닿는다. 그리고, 우리가 애초에 말했다시피, 하이데거 이전에 그토록 왜곡되었던 니체 '철학'의 내용을 매우 올바르게 지적하게 된다. 권력에의 의지가 가지고 있는 내재적 성격, 다시 말해, 권력에의 의지야말로 권력의 본질규정이라는 것을 하이데거는 분명하게 깨닫고 있다. 따라서, 권력은 그 자신만을 목적으로 삼으며, 진리나 이데아와 같은 가상을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 증대하는 권력만이 참된 권력이고, 스스로 지배하기를 멈춘 권력은 사멸하는 어떤 것일 뿐이다. 그러나, 진리와 이데아가 완전히 불필요해 지지는 않는다. 그것은 그 자체로 <필연적인 오류>며, 인간의 생존을 위해서 필요한 가상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권력이 가지고 있는 본질로서의 권력에의 의지가 '어떻게' 전개되는가를 물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영원회귀. 하이데거가 바라보는 관점에서 말하자면, 그리고, 오늘날의 대부분의 아카데믹한 해석자들이 말하는 바에 따르면, 그것은 '동일한 것의 영원회귀'다. 하여간, 권력은 그 자신만을 목적으로 스스로를 확대하고 증가시키므로, 이러한 패턴에서 '동일자'인 것만은 확실하다. 그러나, 여기에 중대한 문턱이 존재한다. '생성'이라는 것. 니체에게 영원회귀를 규정짓는 가장 핵심적인 개념은 '존재'가 아니라 '생성'이다. 하이데거는 알고 있었다.

모든 존재자가 권력에의 의지로서 즉 끊임없이 자신을 강화하는 것으로서, 하나의 지속적인 '생성(ein st ndiges Werden)'이어야만 하고 이러한 생성은 그러나 결코 자신에서 이탈하여 자신 밖의 어떠한 목적을 향해서 나갈수 없으며 오히려 항상 권력의 고양의 원운동 안에 진입하면서 오직 이 권력의 고양에로 귀환할 뿐이므로, 존재자 전체도 또한 이러한 권력의 생성으로서 항상 거듭해서 스스로 회귀하며 동일한 것을 재현하지 않으면 안된다.(32-33)

그러나, 이때의 생성은 '동일한 것의 생성'이다. 동일한 것은 '권력'이며, 생성은 '고양'과 '귀환'으로 설명된다. 그렇다면, 하이데거에게 권력의 고양과 귀환은 동일한 것의 그것이며, 양적인 것이다. 질적인 변화가 고려된다면, 생성은 결코 동일한 것으로 회귀할 수 없다. 니체도 그러한가? 우리는 의구심을 품는다. 우리에게 생성을 긍정하는 니체는 디오니소스며, 짜라투스트라이고 또한 아리아드네이기 때문이다. 왜 이런 결절점이 형성되는 것인가? 하이데거가 파악하는 니체가 형이상학자로서의 니체, 즉 플라톤 이래 형이상학의 완성자이자 그 정점을 표현하는 인물이라는 것을 우리는 상기해야만 한다. 하이데거에게 이것은 이 책 전체를 통해서 마치 실천적 요청(!)처럼 매번 강조된다. 그리고, 여기서 플라톤주의 형이상학은 데카르트에 와서 일정한 완성을 보는 표상성의 형이상학이며, 주체적 형이상학이다. 또한, 결정적으로 그것은 생성이 아니라 '존재(einai)'의 형이상학이다. 하이데거가 이 사실을 간과할리 없다.

그는 니체적 니힐리즘을 <고전적 니힐리즘> 또는 <극단적, 탈-자적 니힐리즘>이라고 명명하면서 시작한다. 그렇다면, 이때 '니힐'은 온전히 '무(nicht)'인가? 하이데거에 의하며, 그것은 존재를 표현하는 또 다른 방식일 뿐이다. 마치 '비합리주의자가 합리주의를 분쇄하기 위해 합리주의에 더 밀착하듯이 무신론자가 신을 부정하기 위해 신에 더 가깝듯이' 니힐리즘은 스스로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존재'에 더 가까워져야 한다. 따라서, 니힐리즘은 그 스스로의 본질규정인 '존재'를 철저하게 부인하고서야 온전히 성립할 수 있다. 그러나, 존재는 니힐리즘에 의해 사라지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고전적 니힐리즘은 존재망각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가 된다. 니체에게는 어떤가? 니체에게 애초에 존재로서의 존재 자체가 있었던가? 우리는 니체의 '존재'를 '생성'의 관점에서만 이해한다. 다시 말해, 니체의 존재는 '생성'의 존재이지 '존재의 생성'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이것을 거꾸로 세운다. 이것을 우리는 하이데거 철학의 필연적 귀결로 이해할 수 있다. 서구 형이상학 전체를 '존재망각'의 역사적 심화로 해석하고, 자신의 철학을 새로운 '존재사유'로 이해하는 하이데거에게 '생성'으로서의 존재가 들어설 여지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원회귀를 늘 동일한 '존재'의 회귀가 아니라, 늘 차이나는 '생성'의 회귀로 이해할 수 있다. 이때 권력에의 의지는 다시, 늘 다른 것들을 추구하며, 그것을 지배하고 욕망하는 권력의 본질규정일 것이다. 더 나아가 여기서 주체란 권력에의 의지에 다름 아니며, 그렇다면, 표상되는 바 그 표상의 근거로서만 활동하는 것이 아니다. 차라리 이때 주체는 가상이며, 권력에의 의지만이 (생성으로서) 존재한다. 인식론적으로 해석과 평가의 활동을 펼치는 권력에의 의지는 그것만으로 자기충족적일 수 있는 것이다. 주체란 여기서, 권력에의 의지가 펼쳐내는 차이들의 스펙트럼일 뿐, 어떤 개체적 특유성을 향유하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Cogito란 권력의지의 분열자이지, 권력 자체를 추구하는 동일자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데카르트적 Cogito는 파산한다. 그것은 하이데거의 분석이 정당하게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모든 표상들의 기체로서 존재하는 것이지만, 여기서는 그러한 표상들의 한 내용이 될 뿐이기 때문이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권력에의 의지 뿐이다. 우리의 분석은 이 지점에서 표상성 자체를 의문에 부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렇게 보았을 때, 권력에의 의지는 표상성을 넘어서 있기 때문이다. 표상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으나, 그보다 근원적으로 작동하는 것은 생성의 주체(주체의 생성이 아니라)인 권력에의 의지인 것이다.

하나의 함정이 자꾸만 우리를 가로막는다. 주체라는 형상 말이다. 우리가 권력에의 의지라고 했을 때, 자꾸만 우리를 가로막는 '주체'는 매우 인격적으로 상정될 수 있다. 그러나, 보아왔다시피, 그것은 인격적 함의를 띄고 있지 않다. 마치 평가와 해석을 행하는 것을 '주체'라고 놓았을 때, 우리가, 모든 표상을 끌어 모으고, 지배하는 하나의 다른 표상으로서 주체를 놓는 것처럼 우리는 그렇게 권력에의 의지를 이해하고야 마는 것이다. 문제는 마찬가지로 '표상'이다. '표상'의 본질이란 수동적 힘의 반영인 바, 지배당하고 해석 '당하기'를 바라는 대상일 뿐인 것이다. 이러고서 우리는 그 지배의 '주체'를 그 대상의 반대편에 설정하고야 마는 것이다. 참으로 <표상이란 개념은 철학을 독살>(들뢰즈)하기에 충분한 것처럼 보인다.  

만약 우리가 그 표상을 제거하고 권력에의 의지만을 바라본다면, 여기서 지배와 복종, 해석과 평가는 늘 새로운 관계 안에 서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해석과 평가는 권력의 양과 질에 따라 증감하기도 하고 그 모습을 변형하기도 한다. 그에 따라 지배와 복종은 (주체가 아니라) 각각의 권력에의 의지가 펼치는 차이의 놀이가 된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방식은 여기까지 다다르지 않는다. 그에게 존재는 생성에 앞서며, 주체는 표상에 앞선다. 하이데거는 니체도 그러하다고 말하고 있다. 권력에의 의지, 영원회귀를 니체 철학의 정수로 해석한 하이데거는 그 내용의 '급진성'을 올곶게 받아들이지는 못한 것이 아닌가? 니체철학의 급진성은 하이데거의 판단과는 달리 데카르트에서 멈추지 않는다.

처음에 했던 질문을 상기해보자. 우리는 그 질문에 대해 어떻게 하이데거를 '위해' 답변할 수 있을까? 어떻게, 그의 삶이 선택한 정치적 판단을 정당화할 수 있을까? 철학은 그 질문에 대해 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이에 대한 정확한 답을 기대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행한 이 강의에 대한 판단으로부터 약간의 도움을 얻을 수는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하이데거에게 니체는 주체성의 철학자며, 따라서 그 주체가 '누구'인가에 정치적 판단이 놓여지게 된다 는 것. 그렇다면, 그(들)는 히틀러인가? 나치인가? 아니면, '금발의 야수', 아리안 종족인가? 다시 한번, 우리는 하이데거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하는 것으로 이 책에 대한 서평의 짧지만, 매우 시니컬한  결론을 대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니체의 철학은 이미 시위를 떠난 화살이지 않았는가?"<Noma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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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네킹
최윤 지음 / 열림원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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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에 대한 갈증이 이 소설을 쓰게 했다. 황량한 시간을 가로질렀기 때문이다.>(최윤, 작가 후기). 그러나, 필연적으로 아름다운 것은 죽고 말 것이다. 다시 말해, 그 죽음을 조장한 황량한 시간이야말로 아름다움을 있게 만든다. 크로노스가 잘라낸 우라노스의 성기는 생성과 죽음을 반복하는 시간성이 어머니의 자궁을 빌려 영원한 하늘에 대해 행한 복수였다. 키프로스섬에 닿기 까지 무수한 포말들이 애도한 것은 그래서, 포악한 현실, 그 권위의 팔루스를 향한 것이다. 거기서 탄생한 아름다움은 그 자신의 생존의 공허를 담고 있을 수밖에 없다. 현실 없는 꿈이 부유하는 세계는 달리 말해, 신화 자체이며, 그것이 결여하고 있는 것은 포악한 현실 자체가 된다. 그러나, 문제는 날것의 현실이 포악하다 하지만 추구할 만한 가치를 상실하고, 그것이 신화 속에서 또다른 '현실'의 이름으로 재생산될 때다. 현실의 포악성은 '투쟁'의 진실에 놓여 있다. 투쟁할 만하지 않은, 그래서 전의를 상실한 현실만큼 비루한 것도 없다. 그것이 신화 속에서 재생산된다면, 그 또한 비루함의 반영일 뿐일 것이다.

작가 최윤이 소설을 통해 시선을 던지는 지점은 이곳이다. 작가가 말하는 <황량한 시간>이란 그래서, 그렇게 단순하게 신화적 상상력으로 치환되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황량한 시간을 가로질>러 다다른 곳이 키프로스섬이라면, 마땅히 아프로디테는 제우스를 분별없는 사랑에 빠지게 하고, 아레스를 그녀의 침실로 끌어 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작가의 신화적 상상력이 평범하지 않다는 것은 마땅히 이러한 관점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최윤의 현실은 비루하지 않으며, 따라서 신화는 어둠을 가로질러 날카롭게 공명하는 북가죽처럼  그 팽팽한 장력을 잃지 않는다.

어디서부터 시작하는가? 사랑에서부터다. 육체와 정신이 함께 단련되는 것은 진도 선도 아니고 미를 통해서라는 것이 작가가 처음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아름다움 속에서 가능한 것, 지니는 그렇게 사랑을 열락(悅樂)의 한 가운데서 받아들인다.
 
그녀는 E의 단단하고도 부드러운 몸을 가능한 한 팔을 넓게 벌려 안았다. … 한순간 그녀를 가두고 있는 천의 끈이 툭 하고 끊기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더 이상 E의 안내가 필요 없었다. 그녀는 E에게 끝도 없이 따뜻한 위무의 말을 속삭이듯 그녀의 몸을 춤추게 했다. 가장 단순하고, 가장 깊은 희열 속에 모든 사건, 모든 기억이 하얗게 산화해 흔적도 없이 우주 저 멀리로 날아가버릴 때까지 그들의 몸은 단 하나의 리듬으로 춤을 추었다.(143-4)

우리는 이 아름다운 구절에서 두 사람의 육체와 함께 위악적이고 포악한 현실의 한쪽 벼랑에서 가뭇없이 뛰어내리는 미적 경험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후 우리는 알 수 있다. 최윤의 아프로디테, 지니가 지니고 있는 그 기억, <가장 깊은 희열 속>에서만 <하얗게 산화>할 수 있는 그 기억의 끈질김 말이다. 그래서, 우리의 사랑은 비애를 품고 있다. 그리고, 말이 없다. 말이 없어진 그날, 지니는 현실로 향한 출구마저 봉쇄당한다.

어쩌면 그날의 기억은 늘 그녀의 뇌수 한구석에 찰랑이되 앞으로 나가지 않는 물음표 모양의 거품을 붙이고 하얀 부표처럼 떠 있었을 수도 있다. 마침내 신체의 일부가 되어 따로 상기되기에는 너무 익숙한 어떤 기억 중의 하나로. 그러다가 서서히 물음표는 물에 쓸려 없어진다. 그 기억이 부표로 떠 있어 그녀는 그 밖으로 나갈 수가 없다. 그래서 그 부표 밖으로, 그녀의 목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는다. 그녀로 하여금 아주 일찍이 더 이상 세상에서 말이 필요 없다는 것을 일깨워준 밤, 그날로 그녀는 말을 잊었다.(100)

세상은 말이 필요없다. 그녀의 오빠와 언니가 그저 사악한 쾌락을 위해 자고 있던 그녀의 목을 번갈아 눌렀던 기억을 안겨준 세상이다. 세상과의 소통에 대한 체념은 말을 탈취당한 그 순간보다 이르게 온다. 저항이 필요없어지는 것도 이 순간일 것이다. 이미 일은 벌어졌고, 그 사건 자체가 세상을 끔찍한 것으로 만들었다. 아프로디테의 열락은 떠나온 현실의 기억으로 점철된다. 절정은 그 까무룩한 순간에 꺽이고 말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지니는 길을 떠난다. 열락과 기쁨이 없는 섬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녀가 그것을 안 것은 어느 순간, 그녀가 여행해 온 곳, 바다의 짠 감촉을 알고 나서다.

그녀는 그날 이후 조금씩 여행을 준비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바닷속 촬영이 있던 그날 … 그러나 그녀가 기억하고 있던 것은 단 한 번의 하강, 기온과 색채와 물의 촉감이 그녀의 몸 속에 만들어내던 무한한 안도감, 아마도 우뭇가사리의 뱃속으로 하강하듯이 거의 완벽에 가까운 믿음으로 바닷속으로 들어간 순간 떠남을 위한 그녀의 여행 계획은 이미 무르익었다고 보아도 좋다. 그녀가 감은 눈을 떴을 때, 그녀 앞에는 옅은 푸른색으로 투명하게 다가오는 물의 세상이 있었을 뿐이다.(119)

작가의 신화적 상상력이 작품에 무연하고도 확연히 겹쳐지는 이 장면에서 우리는 지니가 어디로 갈 것인지를 이미 예감한다. 그러면, 지니가 떠나온 위악한 그 현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남겨진 상어와 우뭇가사리와 불가사리, 그리고 소라는 지니 없는 삶을 어떻게 꾸려나갈 것인가? 지니의 광고 수입에 기생했던 그들, 가해자이자 착취자인 그들은 서서히 파멸하는 쪽을 택한다. 그렇다면 그들은 지니로 인해 파멸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지니를 이용했던 것은 그들이었고, 그런 만큼 그들은 우월감과 죄의식 사이를 요동치며, 삶의 기반을 상실해가는 책임을 스스로 떠맡으려 할 뿐이다. 이들이 발딛고 있는 현실은 , 모든 타자에 대한 감수성이 상실된 곳이며, 그래서, 지니를 애초에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들보다 아름다운 지니, 그들보다 막대한 힘을 가지고 그들을 제압하는 지니에게 그들은 폭력과 착취로 응답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우월감과 죄의식은 치유할 수 없을 정도의 나르시시즘을 반영할 뿐인 것이다. 따라서, 지니는 권위적인 제우스와 폭력적인 헤페스투스에게 책임이 없다. 이들은 모두 그날의 기억을 잊고 <씹어 삼키려>고만 할 뿐이다. 이들에게도 그 기억은 트라우마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춤을 추지 않는, 긍정되지 않는 상처는 반드시 분열되고, 파괴적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래서, 지니가 춤을 추기 시작하는 것은 처음엔 스스로를 위무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상처를 위무하는 춤은 공명을 만든다. 어떤 허위도 가식도 없이 펼쳐지는 상처의 춤, 고통의 제전, 그것은 타자의 상처를 대신한다기 보다, 그 상처를 그대로 드러나게 만드는 것이다. 그 춤을 둘러싼 사람들의 슬픔은 거기서 유래한다. 지니는 그녀의 상처를 통해 타자의 상처를 드러낸다. 그것을 희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오히려 빛나게 하는 힘이 거기 있다. 아름다움이 진실을 드러낸다면 그것은 어둠을 밝은 빛 속에 드러내는 것이며, 어둠을 밝게 치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작가는 그렇게 말하고 있다. 진실이 어둡다는 것을 부정하는 자는 애써 그것을 드러내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좋은 게 좋다는 것>이며,  굳이 그렇게 하는 것은 <아주 거추장스럽고 품이 들어가는, 그렇다고 별다른 대가도 돌아오지 않는 그런 귀찮은 일>(195: 불가사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 아프로디테가 알지 못한 지니의 비극이 있다. 해변에 다다른 지니, 광장 주변을 맴도는 지니, 춤을 추고 자궁과 같은 동굴에서 잠드는 지니는 영원히 바다로 돌아가지 못한다. 그녀의 상처가 만들어낸 춤이 이미 사람들을 사로잡았으며, 많은 이들이 그녀를 보기를 원하고, 궁금해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는 결정적으로 어린 나이에 사생아를 낳아 들쳐업고 다니는 해변가의 작은 소녀를 버리지 못한다. 연민. 인간과 세상에 대한 연민이 그녀를 잡아끈다. 소설의 마지막을 묘사하는 작가의 감성은 그래서 현실과 신화 사이에서 미세하게 진동한다.

바람과 바다를 동시에 가지기 위해서 그녀는 여기 누워 있다. 늘 움직이고 그 움직임은 세상의 어느 움직임보다도 변화무쌍하다. 그 움직임이 있는 한 어찌 희망하지 않을 수 있으랴./ 바람은 가끔 생명의 자연스런 부패에서 그녀를 보호하려는 듯 건조하게 불어와 주위를 배회하고, 자라기를 멈춘 채 풍성하게 펼쳐진 머리카락을 날리게 하며, 강인하게 굳어진 그녀의 몸의 이곳저곳을 실로폰처럼 두드리다가, 마침내 그녀가 단단한 세계에서 유연한 세계로, 형체에서 추상으로, 유채색에서 무채색으로 그렇게 멀리, 마침내 액체나 기체 혹은 그 어느 것도 아닌 무형으로 세상 깊이 스며드는 일을 돕는다.(278-9)

바람과 바다. 바람은 뭍에서 불어온다. 바다는 그녀가 돌아갈 곳이다. 그 사이에서 죽음을 맞는 지니. 바다가 아니라, 흙의 원질로 돌아가는 아프로디테는 여기서 온전히 현실의 회귀점이며, 동시에 신화적 상상력의 곶(串)이다. 작가의 <아름다움>이란 그래서, 결코 현실을 저버릴 수 없다. 순수한 신화도 순수한 현실도 불가능하며, 그 양자택일은 파멸일 뿐이다. 현실과 신화에 대한 복합적인 감수성이란 그렇듯 서로가 서로를 침식하고 때로 추동하며, 심연으로 떨어트리기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레스(솔배감펭)는 여신의 죽음이 뭍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고 편안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순수한 신화를 쫓던 소라는 경계에 어정쩡하게 선 여신에 당황해하고, 끝내 외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현실과 신화가 만나는 곳, 땅에 발 딛고 선다는 것은 작가의 숙명이다.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의 작가 최윤이 그 숙명을 신화를 통해 엮어낼 때, 궁극적으로 바라는 바는 작가 자신의 말처럼 <아름다움>이다. 여기 우리는 한 마디를 덧붙인다. 그 아름다움은 지니가 펼쳐내는 그 고통의 춤, '어두운 진실의 아름다움'일 것이라고 말이다. 허위의식 없는 그 아름다움의 열망은 바로 그 춤을 통해 공명될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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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염 2007-10-25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