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얼굴을 가진 지식 - 인간의 얼굴을 가진 지식 서강인문정신 7
강영안 지음 / 소나무 / 2002년 6월
평점 :
절판


남한 사회와 학계에 ‘인문학의 죽음’이라는 테제가 제출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96년을 기점으로 대학은 신자유주의 시장법칙 속에 스스로의 학적 영혼과 그 모든 실천기제들을 번제하기 시작했고, 기초학문으로서의 자연과학 분과들과 인문학의 기초적 분과들은 그 유용성을 의심받기 시작했다. 그것은 일견 자연스런 과정이다. 하긴, 자본주의 권력과 시장이 교육 부분을 용케 잠식하지 않았다는 것이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일 것이다. 그것은 남한 사회 교육 풍토의 특수성에서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고, 또한 나쁘게 말한다면, 학문에 대한 봉건적 순수성 따위가 그러한 전진적 폐절을 용인하지 않았던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또 하나 지적할 수 있는 것은 학문을 가르치고 전수하는 남한의 제도적 패러다임이 정치사회적 변화에 얼마나 둔감한가 하는 것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상황이기도 한 것이다. 소위 아카데미즘의 폐해는 스스로의 학적 권위를 계속적으로 생산하는 데 있어서, 일부 학회나 학회지 그리고 어떤 권위에 의존하는 타성을 쉽게 벗어버리지 못한다는데 있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권위를 떠받치는 진정한 원동력이 다중(multituse)의 지적 역량과 그 감수성에 있음에도, 아카데미즘은 ‘과학’이라는 폐쇄된 구조 내부에서 한발짝도 나오고 싶어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혹자가 지적하기를 인문학의 죽음을 운운하면서 우는 소리는 내지 말라고 한 것은 일리가 있다. 하여간 스스로 자초한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강영안 교수가 말하는 인문학의 죽음은 이러한 상황을 읽어 내는 것에서 시작한다.

 우리가 현재 맞이하고 있는 인문학 위기의 근원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이야기되는 인문학의 위기는 주로 사회적?경제적 유용성과 관련이 있다. 문화대학 출신 학생들이 비문과대 출신에 비해 입사시험 응시 자격에서부터 더 많은 제한을 받는다든가, 인문학과 관련된 분야의 연구비가 적다든가, 인문학 분야의 학자 지망생이 비인문학보다 수적으로나 질적으로 떨어진다든가 하는 것은, 인문학이 현재 사회적으로나 정책적으로 받고 있는 홀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현상들이다.(6)

다시 말해, <사회적?경제적 유용성>의 위기가 바로 인문학의 위기‘처럼’ 회자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강영안 교수가 보기에 이러한 유용성의 위기는 인문학의 본질적 계기에 비춰본다면 ‘엄살떠는 것’에 불과하다. 인문학은 본래 <무용지물(無用之物)>이다. 그러니, 이러한 외적 유용성의 상실이란 전반적 위기의 진단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내적 유용성, 즉 <인격과 삶을 변화시키고 삶의 의미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수단으로서의 유용성마저 상실>(19)되는 데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내적 의미와 유용성마저 상실되는 것은 어떤 이유 때문인가? 인문학의 ‘불가능한 꿈’이 시작되는 곳에 이 상실의 혐의가 놓인다. 불가능한 꿈이란 어떤 것인가? <요컨대 근대 인문학은 여타 과학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과학’이 되었다.>(20)

이러한 과학적 인문학의 꿈이 가지고 있는 긍정적 측면을 놓치지 않으면서 강영안 교수는 그 꿈의 불가피한 실천적 아포리를 파악하고자 한다.

 인문학도 다른 과학처럼 엄밀한 과학적 절차를 밟아야 한다는 요구로 인해 과거에 볼 수 없었던 수준 높은 연구 성과가 여러 인문학 분야에 산출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인문학은 과학이 되면서 그 어느 때보다 풍부하고 다양한 지식을 제공해 주었지만 구체적 삶과 인격과는 점점 거리가 생겼고 ‘인간성’ 형성이라는 원래의 목적은 퇴색되고 말았다.(23)

 <인격>과 <인간성> 그리고 <구체적 삶>, 이러한 인문학의 토대와 목적이란 바로 ‘윤리적 타당성’외에 다른 것이 아닐 것이다. 이 지점에서 강영안 교수의 관점이 드러난다. 따라서, 인문학의 근원에서 작동하는 이 윤리적 요구는 ‘책임성’으로 이어질 것이다.

 동아시아 전통의 사람들이 ‘이치’를 따진다든지 고대 헬라스 사람들이 ‘로곤 디도나이logon didonai’를 요구한 것은 무엇을 안다고 할 때, 무엇을 주장할 때, 또는 무엇을 할 때는 이유와 근거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염두에 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의 논리적 연역 가능성이나 경험적 검증 가능성에 대한 요구라기보다는, 주장에 대해 근거 없는, 터무니없는 소리를 할 것이 아니라 ‘근거 있게’ 즉 스스로 책임지는 발언을 해야 한다는 하나의 윤리적 요구였다.(50)

 그러므로, 진정한 인문학의 위기는 인문학이 그의 ‘윤리적 책임성’이라는 본래의 토대를 망각하고 ‘과학’이라는 불가능한 꿈을 향해 스스로를 주형해 내려고 했다는 데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꿈의 틀거리 역할을 한 것인 바로 <인간을 배제한 객관주의>다. 이 틀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그러나 인문학의 본래 지평을 완전히 허물지는 못했다. 그것은 근대 과학적 철학 초기에서도 드러나는 바라고 강영안 교수는 이야기 한다. 이를테면, 데카르트의 경우 그의 방법적 회의가 목표로 하고 있는 ‘모든 학문의 토대’라는 이념은 바로 그의 건축적 상상력에서 비롯되었으며, 이러한 상상력이야말로 근대 과학 이념에서 추방되어 마땅한 것이었다는 말이다.(39-40) 따라서, 과학과 객관주의는 애초에 인문학의 근본을 흔들지 못한다.

이러한 강영안 교수의 진단은 이제 어떤 방식의 해법을 마련할 것인가? 여기에서 강영안 교수는 정치적 방식보다는 학문내적 전환을 촉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후설이 토대를 잃고 형해화되어 가는 철학에 대해 ‘사태 자체로’를 외쳤듯이 강영안 교수는 두 가지 대상에 방점을 찍는다. 바로 ‘삶’과 ‘텍스트’다. 이 두 대상은 일종의 해석학적 순환(hermeneutical circle)속에 놓여 있는 것처럼 얘기 된다. 그런데, 과연 삶이란 텍스트의 매개를 통해서만 이해되고 변화되는 것인가? ‘텍스트에는 안과 밖에 없다’는 데리다의 말은 이 경우 매우 진실한 옹호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텍스트 해석을 통해 주체의 진정한 자기성(selfhood)을 이해하려고 했던 리꾀르도 또한 이러한 방향으로 사유의 위기를 돌파하려 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텍스트가 철학하기, 곧 삶의 정수를 이해하고 변혁하는 데 있어서 필수적이라면, 그 텍스트를 이해하는 기술(techne)이 없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삶의 정수를 뽑아 올리는 것은 철학자만의 특권인가? 여기에 대해서 강영안 교수는 별다른 대답을 마련하고 있지 않은 것 같다. 다만, 철학에서 인문학적 진정성을 기대할 수 있는 곳이 다름 아니라, 그것의 기본 즉 텍스트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주장을 펼친다. 그래서, 이 책의 마지막 장이 주자의 독서론에 대한 논변이라는 것을 주목한다면, 당대의 석학으로서 강영안 교수가 겸손하게나마 또는 조심스럽게 학자적 본분을 지키며 내놓는 해법은 매우 온건하다.

 인문학의 중심인 독서 공부는 모든 학문에 필요하다. 형이상학적 체계를 구성하든, 자연을 연구하든, 사회현상을 기술하든 간에 책과 텍스트를 읽는 행위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내가 만들지 않은, 나 보다 먼저 있어 온 텍스트를 읽고 생각하며, 읽을 바를 스스로 실천에 옮기거나, 읽은 바를 바탕으로 새로운 텍스트를 만드는 것은 인간의 삶의 근본 양식이다. 인간의 삶은 어떤 방식으로든 문자/텍스트/책을 떠나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인문학은 고전 텍스트를 단지 협애한 과학적 연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삶의 의미를 묻고 기술을 배우는 방식으로 새로이 폭넓고 다양하게 읽음으로써 오늘날 우리 문화가 절실히 필요로 하는 삶의 학문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194)

 <인간의 삶은 어떤 방식으로든 문자/텍스트/책을 떠나 있을 수 없다>라는 단언은 뒤에 오는 <협애한 과학적 연구>에 대한 비판인 동시에 그러한, 텍스트 해석이야말로 ‘과학’의 토대며 나아가 <삶의 학문>을 위한 기본이라는 것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으로 들린다.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 우리는 이러한 강영안 교수의 주장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리고, 또 더 나아가야 한다. 문제의식 자체가 삶과 인문학이라면, 그것의 첨예한 지점은 텍스트에서만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차라리 텍스트를 뚫고 나가는 사유의 ‘힘’이 더욱 필요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그 힘은 바로 ‘독창성’이라고 불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잠시 주의하자. 이것은 어떤 텍스트적 맥락을 완전히 벗어나고자 하는 헛된 망상을 일컬음이 아니다. 진정 궤도를 이탈하는 체험을 하고자 한다면, 그 궤도의 ‘권태’가 무엇이며, 그 궤도가 속한 공간의 위상이 어떤 것인지 알아야 한다. 이 궤도와 위상이야말로 서양 철학이 근대 이후 구축해온 거대한 정신의 체계다. 사실상, <읽기의 경우에 완벽한 이해가 언제나 지연되어 있듯이 쓰기에도 언제나 완벽한 독창성은 저만치 물러서 있다.>(189) 그렇다면, 이런 한에서 우리는 텍스트의 세계를 일탈하기 위해 언제나 유예되는 권태를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무한한 텍스트의 지평에서 만나는 다른 주체들, 철학자들과 개념들과 사물들의 위상을 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유예되는 텍스트의 의미와 함께 그것의 위상을 파악하고자 하는 것은 일종의 사유의 모험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모험은 절대 철학하는 자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유아론적 철학은 존재하지 않는다. 철학은 언제나 상호주관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이다.>(191) 이제 여기서 강영안 교수의 진의가 드러난다. 텍스트와 철학과 삶은 이 상호주관적 장 안에 포진해 있는 우리 사유의 ‘황금비율’이 된다. 그렇다면, 상호주관성이라고 했을 때 여기에는 분명 ‘타자’의 함의가 있다. 왜냐하면, 삶이야말로 이 타자성의 윤리적 전개의 장소 외에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강영안 교수의 논의를 따라 가면서 뚜렷한 무언가를 배우게 된다. 즉, 삶(타자)과 철학과 텍스트가 진정한 독창성과 조우할 때, 그때야말로 인문학의 철학이 가능해진다는 것, 그리고, 철학은 이 긴장된 벡터장을 분명 관념이 아닌 현실 안에 정위해야 한다는 것 말이다. 이 가능성을 타진하고 실천하는 것이 강영안 교수의 논의를 뛰어 넘는 미래 사유의 임무일 것이며 강영안 교수 자신이 바라는 바일 것이다. - Noma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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