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고의 시간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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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게임은 여행의 일종이다. 여행길에서 가끔 선택의 기회가 나타날 것이다. 선택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게이머는 때로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 것 같은 느낌에 빠지기도 하리라. 이러한 사실은 어쩌면 그를 두렵게 만들지도 모른다. 자신이 지금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느냐, 그리고 무엇과 마주하게 되느냐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폴란드 문학은 내 기억에 의하면 접해본 적이 거의 없다. 이번에 <태고의 시간들>이라는 작품을 구매하게 된 것은 알라딘에서 은행나무 출판사와 함께 진행하는 리뷰대회 때문이었다. '올가 토카르추크'라는 작가 이름을 보고 믿고 주문한 것도 있다. '올가 토카르추크'는 '페터 한트케'와 함께 이번 연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다. 개인적으로 어떤 문학상을 수상했다고 해서 그 작품을 꼭 챙겨 보는 편은 아니다. 스스로에게 맞는 내용을 다루고 있는 책을 찾아 읽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해되지도 않는데 고전이니까, 노벨 문학상까지 탄 사람이니까 하고 붙들고 있을 필요는 없다. 그래도 여기저기서 '올가 토카르추크'와 '페터 한트케'의 이름들로 들끓다 보니 한 작품씩이라도 꼭 읽어보고 싶었다.

이전에 이정명 작가의 <밤의 양들>을 읽을 때 신성한 예루살렘을 잘 드러낸 표지라고 생각해서 감탄한 적이 있었는데, 반면에 <태고의 시간들>은 표지는 좀 난해한 구석이 있다. '태고'라는 이름을 가진 마을을 표현해낸 그림이었다면 어땠을까. 뒤표지에서 폴란드라는 국가의 현실이 이 소설에 곁들여져 있다는 이야기를 꺼낸 건 좋은 방식이었다고 생각한다. 한국에서 폴란드라는 국가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을 본 적이 거의 없기 때문에,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수 있을 것이다.

'태고'는 사전적으로 '아주 먼 옛날'을 가리킨다. 하지만 <태고의 시간들>에서 '태고'는 폴란드에 있는 한마을의 명칭이다. 이 마을의 사방 경계선을 천사들이 지키고 있다. 소설 속에서는 '태고'에서 살고 있는 모든 것들의 시간이 다루어진다.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라인더와 한 마리의 개,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지 않은 영혼이나 천지창조의 시간까지 그려내고 있다. '~의 시간'이라는 제목으로 짧은 글들이 계속해서 이어진다. '미하우'와 '게노베파'라는 부부의 시간에서 그들의 자식들, '미시아'와 '이지도르'의 시간, 또 다음 세대로 넘어가서 '아델카'의 시간까지, 379페이지 동안 3세대의 시간을 아우른다. 작가가 태고의 시간들을 다루는 방식은 현실적이기도, 신성적이기도 하다. 전쟁이 주는 긴장과 불안, 두려움을 내보이다가도 갑자기 불쑥 성모 마리아가 나타나 호통을 치고, 수호천사가 나타나 '미시아'를 돌보기도 한다. 전쟁과 신화적인 이야기들이 겹쳐져 '태고'라는 신비한 공간을 만들어낸다.

소설이 중후반부에 이르면서 '전쟁'과 '죽음'이 깊이 있게 다루어진다. 가깝게 지내던 유대인들이 학살 당하는 것을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고, 자신들의 터전에서 숲으로 내몰리며, 또한 폭탄이 도처에 떨어지는 소리를 듣는 불안정한 상황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역사 책에서 보던 사건의 큰 흐름이 아니라 전쟁 속에서 실제로 이를 겪은 사람들이 어떻게 그 시기를 견뎌냈는지가 서술되어 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여기에다가 폴란드가 가지고 있던 특수한 상황-공산주의-에 대한 묘사가 더해졌다. 공산주의의 시대는 한국에서 경험할 수 없는 체제이기 때문에 어제까지만 해도 자신이 관리하던 재산들을 순식간에 나라에 빼앗기는 모습이 생경했다. '부의 재분배'라는 좋은 취지로 시작한 사상이지만, 애초에 그렇게 재산을 국가에 몰수당하는 과정에 처해있던 사람들은 꽤 억울했을듯하다.

 

"미시아, 그렇게 생각할 필요 없어요. 여자들이 집에서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데요. 아이를 낳고, 가사를 돌보고, 무슨 말인지 아시잖아요..."

"하지만 돈을 벌거나, 집에 돈을 가져오진 못하죠."

 

 

이 책은 사실 꽤 페미니즘적인 소설이다. 전쟁을 치르러 나간 남편 '미하우'를 기다리며 육아를 홀로 감내하는 어머니 '게노베파'가 있었고, 해낼 수 없을 것처럼 보였지만 어찌어찌 아이들을 잘 길러내는 '미시아'가 있었으며, 또한 홀로 용감하게 아이를 키워나가는 '아델카'가 존재한다. 작가는 이들의 고생스러운 삶에 대해 '어머니들은 위대하다'던가 '집에서 육아에 치여 온전한 인생을 살아내지 못하는 미시아를 두고 바람을 피우는 남자라니!' 따위의 주관적인 평가를 내리지는 않는다. 그저 그들의 '시간'과 아이들의 성장을 묘사할 뿐이다. 적극적으로 나서서 여성을 옹호하고 있지는 않지만, 가정에 온 시간을 할애하는 여성들의 모습을 집중적으로 다룬다는 점이 페미니즘적으로 느껴졌다.

전쟁의 혼란 속에서 배움이 적었던 여성들에게 남편을 잃는 일이란 무척 절망적이었을 것이다. 살아갈 방도가 전혀 없다고 좌절했대도 무리가 아니다. 실제로 전쟁통에 사망한 남자가 이 세상에 두고 간 가정 속 여성들은 생존을 위해 어떤 시간들을 보내야 했을까. 이번 소설에서는 드러나지 않은 다른 폴란드 여성들의 삶이 궁금해졌다.

'태고'라는 이름을 가진 마을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단편적인 시간들을 그러모아 써낸 <태고의 시간들>. 전쟁을 거치는 중에도 다른 이들처럼 살고, 늙고 죽어간 이 평범한 이야기엔 특별한 교훈이 담겨있지는 않다. 독자는 책을 읽으면서 동네 사람들의 시간이 서로 얽혀들고 종국에는 한 올씩 풀려나가는 모습을 목격할 뿐이다. 사이사이에 덧붙여진 신화적 스토리들을 배제하고 본다면, 가장 보편적인 사람들의 인생사를 다루고 있다. 보통의 삶이기에 시시하게 보일 수 있어도, 죽음까지 이르는 길은 아직 걸어본 적 없기에 '태고' 사람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여 본다.

 

인간들은 동물이나 식물, 사물보다는 자신이 훨씬 치열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동물들은 식물과 사물보다는 스스로가 더 치열하게 살고 있다고 여긴다. 식물들은 사물보다는 더 치열하게 살고 있다고 꿈꾼다. 그런데도 사물들은 여전히 존속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존속은 다른 무엇보다 더욱 강한 생명력을 의미한다. - P52

이 경계는 기성품처럼 준비된 사람들을 만들어낼 수 있어. 우리는 그들이 어딘가에서부터 여기로 온다고 느끼지. 내가 가장 무서운 건, 이곳을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이야. 마치 솥 안에 갇혀 있는 것처럼 말야. - P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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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민 골짜기의 모험 1 무민 골짜기의 모험 1
토베 얀손 지음, 천미나 옮김 / 온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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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릭터 상품으로만 보던 '무민'을 동화책으로 만나보니 좀 생소한 느낌이 들었다. 평면으로만 만나다가 입체적인 '무민'을 보고, 나름대로의 인생사(?)를 읊는 캐릭터와 맞닥뜨리니 친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친구가 급작스럽게 막 쏟아놓는 인생사를 듣는 것처럼 당황스럽다. 솔직히 난 '무민'에 대해서 진짜 아는게 하나도 없다. 이 캐릭터를 애초에 알게 된 계기 자체가 연신 귀엽다며 열광하던 동생때문이었다. '뭐, 곰돌이같고 귀엽긴 하네.'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무심하게 지나가던 캐릭터가, 이야기가 존재하는 동화책마저 가지고 있다니! 이건 꼭 읽어봐야겠다 싶었다. 난 새로운 걸 마주하는 데 무척 열성적인 사람이니까. 그런데 가볍게 읽고 넘기려던 동화책이 생각보다 깊이 있고, 의미 있는 말들을 많이 건네서 흠칫 하는 마음이 들었다. 책을 덮고 나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동화책에서든 애니메이션에서든 어릴 때는 깔깔거리고 지나가던 장면들이었는데, 어른이 되고 나니까 참 그렇네, 하고 공감가는 대사들이 가득해서 놀란 적이 종종 있었다. 영화관에서 애니메이션을 보다가 그런 대사들이 등장하면 주변에 앉은 어린 아이들의 반응을 살피느라 주위를 휘휘 둘러보곤 했었다. 물론 역시나 세상 즐거운 표정들 뿐이었다. 그걸 다 이해한다면, 어린아이라는 말이 좀 어울리지 않을 것 같다. 때로는 나이에 맞게 지내는 게 좋으리라는 생각도 든다.

요즘은 피규어를 모으고, 영화관에서 애니메이션을 관람하는 어른들의 행보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키덜트', 즉 아이와 어른의 합성어까지 등장했다. 하지만 "다 큰 애가 왜 이래?"라는 꾸중을 듣던 때가 있었다. 나도 20살이 넘어서 디즈니나 픽사 애니메이션을 보며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엄마에게 혼난 적이 있다. 그 때 엄마의 대사도 비슷했다. "아니, 20살이 넘은 애가 뭐 이런 걸 보고 있어?". 그 때는 아무런 대꾸도 못하고 우물쭈물 거렸지만, 시간이 한참 흐르고 나서야 내 행동의 답을 찾아냈다. 어린 아이들이 보는 컨텐츠 속에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꼭 알아야 할 진리들이 담겨 있기에, 배울만한 가치가 있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올바른 가치관을 심어주는 것이 책과 영화의 기본적인 기능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책이나 영화에 주 타겟층이란 것이 분명히 존재하겠지만, 무엇을 보든 무언가를 깨우칠 수 있고 이전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한 거라는 게 나의 지론이다.

<무민 골짜기의 모험 1>에도 내가 어릴 때였다면, 충분히 와닿지 못했을 내용들이 적지 않았다. 어른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 한 줄 한 줄 속에 작가의 의도를, 작가가 아이들에게 가르쳐 주려고 했던 바를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글귀들이다. "사실은 진짜 무시무시한 녀석은 아닐 수도 있어. 우리 마음 속 두려움이 그대로 비친 건지도 모르지. 분명... 우리가 녀석을 오해했을 거야." 라던가, "세상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은 법이죠. 하지만 세상 모든 게 딱 우리에게 익숙한 방식대로 있을 필요는 없잖아요?" 라는 부분들. 두려움이라는 게 뭔지도 잘 몰랐고, 익숙한 방식을 만들어내는 과정 속에 있었던 어린 나는 무민의 귀여움에만 집중했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림 옆에 적힌 글들을 읽으면서 작가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어떤 것들에 대해 듣는다.

책을 읽는 내내 딱 이 책을 즐겨 읽을 나이의 나였다면, 무슨 마음으로 '무민'의 이야기들을 받아들였을까, 생각해 보았다. 그런데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몰입이 되질 않는다. 무턱대고 '무민' 가족의 집으로 들이 닥치는 '밈스' 가족들을 보면서, '가택침입'이니 신고해야 한다는 이야기만 맴돈다.

결론적으로, 어린이 동화라는 선을 긋지않고 가끔은 폭 넓은 독서를 할 필요도 있다는 의견을 어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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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하다
선현경 지음, 이우일 그림 / 비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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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서도 스치듯이 언급되었던 <하와이 파이브 오>라는 드라마로 고등학생 때 하와이의 매력을 알게 되었다. 미주 지역으로 여행을 가기에 넉넉한 형편이 아니어서 포기해 버렸지만, '하와이'라는 지역은 오래전부터 내게 항상 도피하고 싶은 장소였다. 맘껏 서핑을 하고(할 줄도 모르면서), 신비롭게만 느껴지는 하와이 원주민 언어도 배우면서 시간을 보내보고 싶었다. <아쿠아맨>으로 한국에 잘 알려져 있는 배우 '제이슨 모모아'를 굉장히 좋아해서 '하와이'의 뉴스에 끊임없이 관심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자신의 부족을 상징하는 그의 팔 문신은 나를 설레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니 <하와이하다>라는 몇 번이고 읽고 싶은 책이, 그것도 매력 있는 그림들로 가득한 책이 눈에 띄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선현경 이우일 부부가 그리고 쓴 이 하와이 일기에는 아기자기한 그림들이 가득하다. 하와이의 풍경과 자신들의 모습을 그려 넣었는데, 하나하나 오려서 책을 구멍 내고 싶을 지경이었다. 짧은 글들과 유쾌한 그림들 덕분에 책장은 술술 넘어간다. 글이 일기 형식으로 적혀 있어서 부담도 없고, 상황과 그때 느낀 감정들이 세세하게 표현되어 있다. 2017년 10월부터 2019년 3월까지 "조금 긴 하와이 살이"가 어땠는지 소소하게 기록되어 있다.

여행 에세이의 큰 단점을 꼽아보라면, 어딘가로 떠나는 일이 지나치게 신성화된다는 것 아닐까. 짧게나마 다른 국가에서 지내본 경험으로 말해보자면, '집 밖으로 나가면 개고생이다'라는 말은 틀리지 않았다.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문화와 맞닥뜨리기도 하고, 종종 다른 사람들의 오해를 사기도 한다. 억울해서 어딘가 호소하고 싶어도, 마음을 나눌 외국인 친구를 사귀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하와이하다>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하와이에 처음 가서 집과 차를 구하는 일이 얼마나 힘들었고, 이질적인 문화 속에서 겪는 불편한 점들을 세세하게 언급해주었기 때문이다. 일기 형식으로 쓴 글의 특징이자 장점이다. 단순하게 표면적으로 좋은 일들만 드러낼 수 없고, 깊은 감정들까지 보여줘야 하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하와이 생활의 낭만이 크게 그려진다. 아무래도 아예 거주하는 것이 아니라, '여행'이기 때문에 돌아오고 나면 좋은 추억들만 남고야 만다.

이 글의 저자인 선현경 이우일 부부는 미국 포틀랜드에서 2년 동안 지내다가 별다른 준비 없이 하와이로 떠난다. 처음에 정착하는 일에 힘도 빠지고, 하와이식 느긋한 일 처리 방식에 답답하기만 했다. 그러던 부부가 '보디보드'에 빠지면서 삶이 점차 변하기 시작한다. 방 안에서 낙서하는 일만 즐기던 이우일 만화가는 하루도 빠짐없이 바다로 나가서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된다. 선현경 작가는 남편과 함께 파도를 타고, 훌라댄스와 요가 수업까지 받아 가며 하와이안의 삶에 동화된다. 서울에 사는 가족들과 한국말로 말하는 기쁨을 그리워하던 이들이 파도를 두고, 친구들을 두고 하와이를 떠나고 싶지 않아 귀국 날짜를 미루는 상황까지 이른다.

물론 외국에 나가서 좋은 결과로만 끝나는 게 아니라는 것은 나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 당장 보드를 들고 하와이 바다로 떠나고 싶게 만드는 이 다정한 글이 위로가 되었다. 또 밖으로 나가고 나면, '사람 사는 게 다 비슷하다'라는 걸 깨닫게 될 것을 알면서도, 여행을 꿈꾸게 만드는 책이었다. 느긋하게 기다려주는 상대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를 깨닫고, 묵혀두었던 보드를 꺼내 로컬들과 함께 파도를 종횡무진하고, 서로의 몰랐던 모습을 발견하는 이 따뜻한 이야기는 하와이가 아니었어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변화일 것이다. 그래도 <하와이하다>를 읽고 나면, 다른 독자들도 하와이에 대한 애정에 생각이 흐려져 꼭 이곳이어야 했다고 느끼게 될지도 모르겠다. "근심 걱정을 잊고 느긋한 하루를 보내라는 인사"인 '샤카'라는 손짓을 하고, 방대한 생활의 지혜를 가지고 그들만의 문화를 전파하며 다른 이들을 돕는 어른들이 있고, '파도'를 통해 기다림의 미학을 일깨우는 '하와이'.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나라의 다정함에 책을 덮고 나서 괜히 몇 번이고 책을 쓰다듬었다.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은 간접적인 기억이다.

여행을 떠나고 싶지만 여건이 충분하지 않아서 '여행 가고 싶다'라는 말을 몇 번이고 하는 나 같은 이들이 분명 많을 것이다. 그럴 땐 주저 없이 <하와이하다>를 들고 '알로하 스피릿'을 맘껏 만끽하기를!

저마다 코드가 있고 성격이 있듯이 인생에도 코드가 있는 거다. 액션, 모험, 코미디, 범죄, 다큐멘터리, 드라마, 공포, 뮤지컬, 미스터리 뭐 그런거. - P257

우리가 하와이로 온 이유는 이거였다. 앞으로 우린 다른 삶을 살게 되겠구나. 멋도 모르고 이 섬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 P241

어쩌면 기회는 파도처럼 매일매일 찾아오는지도 모른다. 기회를 놓쳤다면 다시 맘을 가다듬고 기다리는 거다. 기다리면 다시 온다. 파도처럼. - 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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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돌보지 않는 나에게 - 정여울의 심리테라피
정여울 지음 / 김영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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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출간되지 않은 새 책들을 고를 때는 아무래도 긴장된다. 사전에 설명을 듣긴 하지만, 역시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하지만 이번 책은 '정여울' 작가의 신간이라는 이유로 안심했다. 나는 작가 정여울로서의 작품들보다 사실 여러 책들의 말미에 적혀있던 '문학평론가 정여울'이라는 타이틀을 존경했다. 문학평론가라는 직업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감이 전혀 오질 않던 때에 막연한 동경을 하게 만들었던 분이다. 정말로 만약에 내가 이 길로 들어서게 된다면 마음속 우상으로 꼽게 되는 인물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를 돌보지 않는 나에게>는 책 제목으로도 여실히 느껴지듯이, 정여울 작가의 심리 에세이다. 심리학을 전공하시고 깊은 임상 심리 경험을 쌓으신 분들만 쓰는 줄 알았던 분류의 책이라서 조금 놀랐다. 하지만 작가라는 직업 자체가 여러 사람을 관찰하고, 이를 바탕으로 글을 써내는 사람들이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고개를 주억거리게 되었다. 이것은 내 억측일 뿐이었고, 정여울 작가는 개인적인 흥미로 심리학을 공부한 데서 나온 지식들로 책장을 채워 넣었다. 책을 넘기면서 수없이 들었던 생각은 문체가 참 따뜻하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이것이고, 이런저런 해결방안을 택하세요, 하는 딱딱한 글이었다기보다는 가깝게 지내는 선배가 자신의 트라우마를 털어놓고 이런저런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해보니 도움이 되더라, 하는 글이었다. "사랑이 없는 세상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쓴 내 뜨거운 다정함의 기록이다."라는 프롤로그의 말처럼, <나를 돌보지 않는 나에게> 속에는 작가 본인에게 하는 것인지, 독자들에게 건네는 말인지 모를 그 글귀들이 가득하다. 그리고 행간마다 그녀의 다정함이 꾹꾹 눌러 담겨 있다. 신체적으로 얻은 병만 누군가의 극복기가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병 또한, 나와 같은 고통을 안고 있던 이들이 조금씩 극복해 나가는 이야기가 제일 힘이 된다는 사실을 새삼 이 책을 통해 깨달았다.

작가 본인이 글쓰기를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인 덕분에, 마음을 치유하는 방식 중 하나로 '글쓰기'가 자주 등장한다. 자신이 가르치는 아이들이 글쓰기를 통해 상처를 어떻게 대면하고, 상황을 헤쳐나갔는지를 소개하던 말들이 기억에 남는다.

"타인의 시선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를 끊임없이 신경 쓰는 마음의 습관을 멈추고, 글을 쓰는 이 순간만은 세상에 종이와 펜, 그리고 나만 있다고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마음을 고백할 곳이 지금 이 순간 이 종이 위밖에 없다면, 스스로에게 더없이 솔직해질 수 있지 않을까(155p)".

이 문장을 읽는데 예상치 못하게 울컥해서 스스로에게 놀랐다. 아마 사람 사귀는 일에 서툴고, 대화를 해 나가는 방식을 잘 모르던 어린 내가 일기를 쓰는 것으로 감정을 풀어내던 때가 떠올랐던 것 같다. 그리고 동시에 중학교 때 내게 글을 너무 추상적으로만 쓴다고 하시던 국어 선생님이 떠올랐다. 그때는 아무리 봐도 내 글이 어디가 추상적인지 모르겠다고 투덜거리고, 선생님이 내 재능을 너무 몰라봐주신다고 원망하기만 했다. 그런데 정여울 작가의 책을 읽고서, 나로서도 무의식적으로 글에 상처를 드러낼까 봐 두려워했구나, 하고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당신의 아픔을 극적으로 요약하는 핵심 문장은 무엇인가(177p)", 물으며 내 마음을 후벼 파는 작가에게 심통이 나면서도, 그녀가 본인의 아픔을 꺼내놓자 어느새 그녀의 '심리 테라피'에 심각하게 고민하고, 때로는 따라 하기도 하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누구의 눈치도 볼 것 없이 솔직하게 모두 드러내놓을 수 있는 것. 이것이야말로 심리 에세이의, 특히 <나를 돌보지 않는 나에게>의 크나큰 장점이다.

사실 책을 몇 장 읽지 않았을 때에는 따뜻함이 철철 넘치는 그녀의 글이 걱정스러웠다. 상대에게 친절하게 위로를 건네는 건 별반 어렵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늘 칭찬만 할 수 없는 건, 때로는 무책임함으로 쉽게 변하기도 하는 탓이다. 하지만 "나는 아무런 상처도 없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되고 싶다. 상처 입은 치유자는 자신의 상처를 통해 처절하게 배운 지혜를 타인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 쓸 줄 아는 사람이다(198p)",라고 말하며 사람들의 '치유자'가 되기를 자처하는 그녀의 글 한 줄 한 줄에 내 고민들을 마치 편지에 답장하듯 또박또박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친구들을 만나 처음으로 한참 동안 내가 가졌던 트라우마에 대해 털어놓기도 했다. 그렇게 내 상처들을 꺼내 보이면서,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모르는 새에 또 많이 변했구나, 싶었다. 이 책을 읽게 될 다른 독자들에게도 스스로와의 대면은 어려운 일이겠지만, 그 일에 실패하게 되더라도 적지 않은 위로를 얻게 될 것이라 확신한다.

심리학 공부는 현대인들에게 굳이 병원에 가지 않아도 스스로 치유할 수 있다는 믿음을 준다.

상황이 더 심각해지기 전에, 아직 자신을 돌볼 수 있을 때,

우리는 자기 치유의 첫걸음을 시작해야 한다.



슬픔은 더 이상 우리를 파괴하지 못한다.

괴로움과 나는 동의어가 아니다.

슬픔과 나는 동의어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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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린
오테사 모시페그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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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에게도 싫다고 말하지 못하는 여자애였다.˝

작가 오테사 모시페그의 장편소설 <아일린>은 ‘아일린‘이라는 젊은 여성이 ˝어떻게 사라졌는지에 관한 이야기다˝. 소설은 ‘아일린‘이 나이가 들어서 1964년 24살의 자신을 회상하는 식으로 전개된다. 그녀는 알코올중독자 아버지 밑에서 자랐고, 끝없는 아버지의 폭언으로 자신을 혐오하는 일밖에 알지 못하는 여성이었다. 경찰관으로서 동네의 존경을 받는 아버지가 집에서는 딸에게 수치심을 안기고, 늘상 술에 취해 제정신인 때가 거의 없다. ˝아버지는 내가 무슨 일을 하든 다 잘못이라고 확신했고 내게도 그렇게 말했다˝, 이 문장에서 엿볼 수 있듯이 아버지는 ‘아일린‘이 자기혐오로 점철될 수 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그런 와중에도 ‘아일린‘은 ˝아버지가 변하기를, 내게 잘해주기를, 나를 들들 볶은 지난 오륙 년에 대해 사과하기를 바˝란다. 어머니도 돌아가시고 언니는 결혼해 집에 들어오지도 않으니, 그녀에게 남은 가족이라고는 아버지뿐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아일린‘이 아버지에게 기대를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이런 아버지와 지긋지긋한 동네 ‘X빌‘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던 ‘아일린‘이 결국엔 그곳을 떠나기까지 일주일간의 여정이 책에 담겼다. ‘아일린‘이 ˝탈출을 갈망하면서도 매번 게으름과 두려움에 눌려˝ 지내다가, 늘 꿈꿔오던 뉴욕으로 가게 되는 이유는 급작스러운 사건의 발생때문이었다. 이 글에서는 그 사건을 언급하지 않으려고 한다. 소설의 말미에 등장하는 당황스러운 사건을 목격할 기회를 다른 이들에게도 주고 싶다.


˝리베카가 곁에 있으니 아버지의 자비를 구걸할 필요가 없다. 아버지는 고래고래 소리지르고 울부짖을 수 있지만
날 아프게 할 수는 없을 거다. 난 어쨌거나 사랑받고 있다˝.

소설 <아일린>에는 자기연민, 자기혐오, 그리고 인생을 향한 무력함 등이 가득하다. 부정적인 감정들이 끊이지 않는 소설 속 세계에서 그녀는 ‘리베카‘라는 직장 동료를 만나게 된다. ‘리베카‘를 통해 전혀 다른 세상을 만나게 될 거라고 기대하는 ‘아일린‘을 보며 나로서도 결말에 대한 흥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하지만 노인이 된 ‘아일린‘이 깨달은 거라고는 혼자로 지내는게 진정으로 편하다는 것 뿐이었다. 외롭고 부당한 어린 시절을 보낸 ‘아일린‘에게 더 큰 보상이 주어지길 바랬던 나는 실망했다. 한편으로는 그게 또 인생이니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일린> 뿐만이 아니라 여러 소설을 읽고 나면 모든 인생이 마치 동화처럼 불행함의 끝에 왕국과 왕자를 얻게 되는 건 아니라는 데 대한 씁쓸함이 남는다. 가상의 세계를 인지할만 한 판단력을 가질 나이가 되었지만, 소설 속의 사람들만큼은 현실과 달라주길 바라는 나도 모르게 갖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자신을 탓하는 걸 그만두고 아버지에게서 벗어나던 날의 다행스러움은 씁쓸함을 상쇄하고도 남는다.
소설 <아일린>은 자기혐오에 빠져있는 사람들의 감정 묘사를 재치있게 표현해냈다. 그것이 가장 큰 장점이었다고 생각한다. 작가 오테사 모시페그는 자신의 존재가치에 어울리지 않게 스스로의 몸뚱아리가 너무 큰 부분을 차지한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이 뭔지 정말 잘 아는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술주정뱅이 아버지가 아무 생각없이 던진 말들에 한 여자아이의 인생이 짓밟혔다는 데 대해 진심으로 애도를 표한다.

아버지가 보기에 내가 저지를 수 있는 최악의 범죄는 나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무언가를 하는 것, 딸의 의무가 아닌 무언가를 하는 것이었다. 나만의 의지가 있다는 증거는 최고의 배반으로 간주되었다.

이 문장에서는 딸, 즉 아일린의 시점만 그려졌지만, 소설 <아일린>을 보면 부모에게 휘둘린 또 하나의 피해자 남자 아이가 등장한다. 이건 ‘아일린‘이라는 여성이 어떻게 사라졌는지에 관한 이야기다. ‘사라지다‘라는 단어에 두 가지 의미가 응축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아버지로 인해 그녀의 자아가 사라졌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그녀가 그런 아버지의 눈 앞에서 사라졌다는 뜻이다. 이렇게 ‘아일린‘처럼 또 하나의 남자 아이처럼 가부장적인 부모 때문에 사라져가는 아이들이 있다고 소설은 경고를 보낸다. 진짜로 들었어야만 하는 이야기들이 있었는데 우리가 무심하게 지나쳐 왔다고 소설을 이용해 비판한다. 아이들이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어떤 것이든 도전해 볼 수 있기를, 자신만의 의지를 가지고 삶을 살아가주기를 바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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