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돌보지 않는 나에게 - 정여울의 심리테라피
정여울 지음 / 김영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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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출간되지 않은 새 책들을 고를 때는 아무래도 긴장된다. 사전에 설명을 듣긴 하지만, 역시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하지만 이번 책은 '정여울' 작가의 신간이라는 이유로 안심했다. 나는 작가 정여울로서의 작품들보다 사실 여러 책들의 말미에 적혀있던 '문학평론가 정여울'이라는 타이틀을 존경했다. 문학평론가라는 직업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감이 전혀 오질 않던 때에 막연한 동경을 하게 만들었던 분이다. 정말로 만약에 내가 이 길로 들어서게 된다면 마음속 우상으로 꼽게 되는 인물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를 돌보지 않는 나에게>는 책 제목으로도 여실히 느껴지듯이, 정여울 작가의 심리 에세이다. 심리학을 전공하시고 깊은 임상 심리 경험을 쌓으신 분들만 쓰는 줄 알았던 분류의 책이라서 조금 놀랐다. 하지만 작가라는 직업 자체가 여러 사람을 관찰하고, 이를 바탕으로 글을 써내는 사람들이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고개를 주억거리게 되었다. 이것은 내 억측일 뿐이었고, 정여울 작가는 개인적인 흥미로 심리학을 공부한 데서 나온 지식들로 책장을 채워 넣었다. 책을 넘기면서 수없이 들었던 생각은 문체가 참 따뜻하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이것이고, 이런저런 해결방안을 택하세요, 하는 딱딱한 글이었다기보다는 가깝게 지내는 선배가 자신의 트라우마를 털어놓고 이런저런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해보니 도움이 되더라, 하는 글이었다. "사랑이 없는 세상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쓴 내 뜨거운 다정함의 기록이다."라는 프롤로그의 말처럼, <나를 돌보지 않는 나에게> 속에는 작가 본인에게 하는 것인지, 독자들에게 건네는 말인지 모를 그 글귀들이 가득하다. 그리고 행간마다 그녀의 다정함이 꾹꾹 눌러 담겨 있다. 신체적으로 얻은 병만 누군가의 극복기가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병 또한, 나와 같은 고통을 안고 있던 이들이 조금씩 극복해 나가는 이야기가 제일 힘이 된다는 사실을 새삼 이 책을 통해 깨달았다.

작가 본인이 글쓰기를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인 덕분에, 마음을 치유하는 방식 중 하나로 '글쓰기'가 자주 등장한다. 자신이 가르치는 아이들이 글쓰기를 통해 상처를 어떻게 대면하고, 상황을 헤쳐나갔는지를 소개하던 말들이 기억에 남는다.

"타인의 시선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를 끊임없이 신경 쓰는 마음의 습관을 멈추고, 글을 쓰는 이 순간만은 세상에 종이와 펜, 그리고 나만 있다고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마음을 고백할 곳이 지금 이 순간 이 종이 위밖에 없다면, 스스로에게 더없이 솔직해질 수 있지 않을까(155p)".

이 문장을 읽는데 예상치 못하게 울컥해서 스스로에게 놀랐다. 아마 사람 사귀는 일에 서툴고, 대화를 해 나가는 방식을 잘 모르던 어린 내가 일기를 쓰는 것으로 감정을 풀어내던 때가 떠올랐던 것 같다. 그리고 동시에 중학교 때 내게 글을 너무 추상적으로만 쓴다고 하시던 국어 선생님이 떠올랐다. 그때는 아무리 봐도 내 글이 어디가 추상적인지 모르겠다고 투덜거리고, 선생님이 내 재능을 너무 몰라봐주신다고 원망하기만 했다. 그런데 정여울 작가의 책을 읽고서, 나로서도 무의식적으로 글에 상처를 드러낼까 봐 두려워했구나, 하고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당신의 아픔을 극적으로 요약하는 핵심 문장은 무엇인가(177p)", 물으며 내 마음을 후벼 파는 작가에게 심통이 나면서도, 그녀가 본인의 아픔을 꺼내놓자 어느새 그녀의 '심리 테라피'에 심각하게 고민하고, 때로는 따라 하기도 하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누구의 눈치도 볼 것 없이 솔직하게 모두 드러내놓을 수 있는 것. 이것이야말로 심리 에세이의, 특히 <나를 돌보지 않는 나에게>의 크나큰 장점이다.

사실 책을 몇 장 읽지 않았을 때에는 따뜻함이 철철 넘치는 그녀의 글이 걱정스러웠다. 상대에게 친절하게 위로를 건네는 건 별반 어렵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늘 칭찬만 할 수 없는 건, 때로는 무책임함으로 쉽게 변하기도 하는 탓이다. 하지만 "나는 아무런 상처도 없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되고 싶다. 상처 입은 치유자는 자신의 상처를 통해 처절하게 배운 지혜를 타인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 쓸 줄 아는 사람이다(198p)",라고 말하며 사람들의 '치유자'가 되기를 자처하는 그녀의 글 한 줄 한 줄에 내 고민들을 마치 편지에 답장하듯 또박또박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친구들을 만나 처음으로 한참 동안 내가 가졌던 트라우마에 대해 털어놓기도 했다. 그렇게 내 상처들을 꺼내 보이면서,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모르는 새에 또 많이 변했구나, 싶었다. 이 책을 읽게 될 다른 독자들에게도 스스로와의 대면은 어려운 일이겠지만, 그 일에 실패하게 되더라도 적지 않은 위로를 얻게 될 것이라 확신한다.

심리학 공부는 현대인들에게 굳이 병원에 가지 않아도 스스로 치유할 수 있다는 믿음을 준다.

상황이 더 심각해지기 전에, 아직 자신을 돌볼 수 있을 때,

우리는 자기 치유의 첫걸음을 시작해야 한다.



슬픔은 더 이상 우리를 파괴하지 못한다.

괴로움과 나는 동의어가 아니다.

슬픔과 나는 동의어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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