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고의 시간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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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게임은 여행의 일종이다. 여행길에서 가끔 선택의 기회가 나타날 것이다. 선택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게이머는 때로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 것 같은 느낌에 빠지기도 하리라. 이러한 사실은 어쩌면 그를 두렵게 만들지도 모른다. 자신이 지금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느냐, 그리고 무엇과 마주하게 되느냐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폴란드 문학은 내 기억에 의하면 접해본 적이 거의 없다. 이번에 <태고의 시간들>이라는 작품을 구매하게 된 것은 알라딘에서 은행나무 출판사와 함께 진행하는 리뷰대회 때문이었다. '올가 토카르추크'라는 작가 이름을 보고 믿고 주문한 것도 있다. '올가 토카르추크'는 '페터 한트케'와 함께 이번 연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다. 개인적으로 어떤 문학상을 수상했다고 해서 그 작품을 꼭 챙겨 보는 편은 아니다. 스스로에게 맞는 내용을 다루고 있는 책을 찾아 읽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해되지도 않는데 고전이니까, 노벨 문학상까지 탄 사람이니까 하고 붙들고 있을 필요는 없다. 그래도 여기저기서 '올가 토카르추크'와 '페터 한트케'의 이름들로 들끓다 보니 한 작품씩이라도 꼭 읽어보고 싶었다.

이전에 이정명 작가의 <밤의 양들>을 읽을 때 신성한 예루살렘을 잘 드러낸 표지라고 생각해서 감탄한 적이 있었는데, 반면에 <태고의 시간들>은 표지는 좀 난해한 구석이 있다. '태고'라는 이름을 가진 마을을 표현해낸 그림이었다면 어땠을까. 뒤표지에서 폴란드라는 국가의 현실이 이 소설에 곁들여져 있다는 이야기를 꺼낸 건 좋은 방식이었다고 생각한다. 한국에서 폴란드라는 국가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을 본 적이 거의 없기 때문에,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수 있을 것이다.

'태고'는 사전적으로 '아주 먼 옛날'을 가리킨다. 하지만 <태고의 시간들>에서 '태고'는 폴란드에 있는 한마을의 명칭이다. 이 마을의 사방 경계선을 천사들이 지키고 있다. 소설 속에서는 '태고'에서 살고 있는 모든 것들의 시간이 다루어진다.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라인더와 한 마리의 개,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지 않은 영혼이나 천지창조의 시간까지 그려내고 있다. '~의 시간'이라는 제목으로 짧은 글들이 계속해서 이어진다. '미하우'와 '게노베파'라는 부부의 시간에서 그들의 자식들, '미시아'와 '이지도르'의 시간, 또 다음 세대로 넘어가서 '아델카'의 시간까지, 379페이지 동안 3세대의 시간을 아우른다. 작가가 태고의 시간들을 다루는 방식은 현실적이기도, 신성적이기도 하다. 전쟁이 주는 긴장과 불안, 두려움을 내보이다가도 갑자기 불쑥 성모 마리아가 나타나 호통을 치고, 수호천사가 나타나 '미시아'를 돌보기도 한다. 전쟁과 신화적인 이야기들이 겹쳐져 '태고'라는 신비한 공간을 만들어낸다.

소설이 중후반부에 이르면서 '전쟁'과 '죽음'이 깊이 있게 다루어진다. 가깝게 지내던 유대인들이 학살 당하는 것을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고, 자신들의 터전에서 숲으로 내몰리며, 또한 폭탄이 도처에 떨어지는 소리를 듣는 불안정한 상황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역사 책에서 보던 사건의 큰 흐름이 아니라 전쟁 속에서 실제로 이를 겪은 사람들이 어떻게 그 시기를 견뎌냈는지가 서술되어 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여기에다가 폴란드가 가지고 있던 특수한 상황-공산주의-에 대한 묘사가 더해졌다. 공산주의의 시대는 한국에서 경험할 수 없는 체제이기 때문에 어제까지만 해도 자신이 관리하던 재산들을 순식간에 나라에 빼앗기는 모습이 생경했다. '부의 재분배'라는 좋은 취지로 시작한 사상이지만, 애초에 그렇게 재산을 국가에 몰수당하는 과정에 처해있던 사람들은 꽤 억울했을듯하다.

 

"미시아, 그렇게 생각할 필요 없어요. 여자들이 집에서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데요. 아이를 낳고, 가사를 돌보고, 무슨 말인지 아시잖아요..."

"하지만 돈을 벌거나, 집에 돈을 가져오진 못하죠."

 

 

이 책은 사실 꽤 페미니즘적인 소설이다. 전쟁을 치르러 나간 남편 '미하우'를 기다리며 육아를 홀로 감내하는 어머니 '게노베파'가 있었고, 해낼 수 없을 것처럼 보였지만 어찌어찌 아이들을 잘 길러내는 '미시아'가 있었으며, 또한 홀로 용감하게 아이를 키워나가는 '아델카'가 존재한다. 작가는 이들의 고생스러운 삶에 대해 '어머니들은 위대하다'던가 '집에서 육아에 치여 온전한 인생을 살아내지 못하는 미시아를 두고 바람을 피우는 남자라니!' 따위의 주관적인 평가를 내리지는 않는다. 그저 그들의 '시간'과 아이들의 성장을 묘사할 뿐이다. 적극적으로 나서서 여성을 옹호하고 있지는 않지만, 가정에 온 시간을 할애하는 여성들의 모습을 집중적으로 다룬다는 점이 페미니즘적으로 느껴졌다.

전쟁의 혼란 속에서 배움이 적었던 여성들에게 남편을 잃는 일이란 무척 절망적이었을 것이다. 살아갈 방도가 전혀 없다고 좌절했대도 무리가 아니다. 실제로 전쟁통에 사망한 남자가 이 세상에 두고 간 가정 속 여성들은 생존을 위해 어떤 시간들을 보내야 했을까. 이번 소설에서는 드러나지 않은 다른 폴란드 여성들의 삶이 궁금해졌다.

'태고'라는 이름을 가진 마을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단편적인 시간들을 그러모아 써낸 <태고의 시간들>. 전쟁을 거치는 중에도 다른 이들처럼 살고, 늙고 죽어간 이 평범한 이야기엔 특별한 교훈이 담겨있지는 않다. 독자는 책을 읽으면서 동네 사람들의 시간이 서로 얽혀들고 종국에는 한 올씩 풀려나가는 모습을 목격할 뿐이다. 사이사이에 덧붙여진 신화적 스토리들을 배제하고 본다면, 가장 보편적인 사람들의 인생사를 다루고 있다. 보통의 삶이기에 시시하게 보일 수 있어도, 죽음까지 이르는 길은 아직 걸어본 적 없기에 '태고' 사람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여 본다.

 

인간들은 동물이나 식물, 사물보다는 자신이 훨씬 치열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동물들은 식물과 사물보다는 스스로가 더 치열하게 살고 있다고 여긴다. 식물들은 사물보다는 더 치열하게 살고 있다고 꿈꾼다. 그런데도 사물들은 여전히 존속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존속은 다른 무엇보다 더욱 강한 생명력을 의미한다. - P52

이 경계는 기성품처럼 준비된 사람들을 만들어낼 수 있어. 우리는 그들이 어딘가에서부터 여기로 온다고 느끼지. 내가 가장 무서운 건, 이곳을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이야. 마치 솥 안에 갇혀 있는 것처럼 말야. - P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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