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자들 - 장강명 연작소설
장강명 지음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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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고는 살인이었으므로 그들은 '죽은 자'들이었고, 해고자 명단에 오르지 않은 사람은 '산 자'가 되었다"

 

책 <산 자들>의 강점은 스토리의 생생함이다. 전직 기자 출신인 '장강명' 작가의 특기가 발휘되어 작품은 소설이 아니라 여러 인물의 인터뷰 같았다. 특히 <음악의 가격>이라는 작품에 이르러서는 작가의 현실이 대입됨으로써 소설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이 작품이 허구의 것이 아니라 우리가 버텨내고 있는 현실에 가깝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려던 의도로 읽힌다. <산 자들>은 이토록 생생하게 현 사회의 '을'들에 대한 이야기가 담겼다. '을'들이 살아가는 사회는 "경제적으로 합리적인 일"을 중시하는 곳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산수의 법칙만이 작용한다. "사람 한 명은 돈으로는 몇 억 원, 차로는 몇 대에 해당(<공장 밖에서>)"하는 것이다. "치수 사업이 중요하냐, 노동자들의 생명이 중요하냐(같은 작품)"와 같은 질문은 소용없다. '능률'과 '효용'만이 중요시되는 사회에서 이는 지나치게 낭만적인 질문이다. "우정이나 동료애 같은 단어가 공허하고 기만적인 구호처럼 들"리고, "직장의 의미라든가 업의 본질이라든가 자아실현이라든가 하는 따위의 말도 마찬가지"라는 구절은 현 사회의 문제점을 꿰뚫는다. 사회 초년생은 '인맥'과 '경력'을 위해 작은 일이라도 마다해서는 안 되고(<카메라 테스트>), 중장년층도 자리보전만이라도 다행이라고 여기는 사회에서 기본적 권리와 개인의 가치관은 경시된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오직 생존만을 추구하며 살아"간다. 극한의 경쟁으로 내몰린 이들은 젖어 들어가는 종이배와 닮아 있다. 누군가는 싸우다 지쳐 포기하고 돌아서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이들에게는 포기도 사치다. <현수동 빵집 삼국지>라는 작품에서 엿보이듯이 현상을 유지하는 것 이외에 다른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어려운 현실 속에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협력'이자 '연대'일 것이다. 하지만 사회가 불안정할수록 사람들은 "각자도생"을 추구한다. 세상 모두가 경쟁자가 되고, 오로지 자신의 '생존'만이 우선순위로 고려된다. 한 쪽에서 누군가는 쫓겨나지 않기 위해 싸우는데, 그 집에 들어오려고 밀려드는 사람은 많아 집값이 치솟는 상황에서도 이를 알 수 있다.(<사람 사는 집>). 현상의 이면을 읽어내지 못하고, 그저 눈앞에 있는 이익을 위해 달린다. 사회에서 내몰린 사람들이 "저희도 좀 같이 살면 안 됩니까?(<공장 밖에서>)"하고 묻지만,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타인의 고통을 묵살한다. 당장 한 푼이 중요한데, 어떻게 작은 돈이라도 기부하는 일을 떠올릴 수 있겠는가. '산 자'와 '죽은 자'는 때로 서로를 향해 덤벼들기도 한다. 괜히 애꿎은 상대를 향해 분풀이를 하는 것이다. 누군가를 원망해야 하는 상황에서, '사회'라는 존재는 '개인'에게 너무도 크고, 범위조차 불분명하다.

이기적인 사람들만을 비판할 수는 없다. 사회가 그들이 극단적인 결정을 내리도록 내몰기 때문이다. 본성과 상관없이 최소한의 생존을 위협받는 동물은 돌변하기 마련이다. 작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회에 대항해 '을'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고 주장한다. 사람들은 기세등등한 '갑' 앞에서 대역 죄인처럼 행동하고(<대기발령>), 그들이 원하는 게 값싼 노동력 뿐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부림 당하기를 멈추지 않는다(<대외활동의 신>). "애초에 뭔가 괜찮은 걸 노려볼 기회가 저한테 있기나 했습니까"라고 작가는 사회에 묻는다. 또한 "처음부터 컵에 물은 반밖에 없었습니다. 그 반 컵의 물을 마시느냐, 아니면 그마저도 마시지 못하느냐였습니다."라는 대사로 '을'들이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는 불리함을 역설한다. 사실 작가는 작품 내내 균형 잡힌 시각을 선보이고 있으며, 어떤 한 쪽을 철저히 옹호하지도 않는다. 다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을'의 입장에 서있기에, 독자의 편집으로 소설은 '을'들이 사회에 내놓고 싶은 일종의 보고서 역할을 떠안는다.

<산 자들>을 읽으면서 온종일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작은 개인으로서 가지고 있는 무력함이 절절히 느껴졌기 때문이다. "역병에는 역병의 역할이 있"듯이 이미 어떤 질서가 정해져 있고, 내가 그것을 바꿔내기에 얼마나 부족한지를 작가는 매 작품마다 일깨워 주었다. 그래도 무언가를 시도해보려는 나에게 어른들은 자주 말하곤 했다. "무수한 불의를 혼자서는 도저히 다 바로잡을 수가 없어... 그것도 힘없는 보통 사람이라면 더더욱(...) 이제 세상을 조금씩 바꿀 수 있는 기회가 너한테 점점 많이 생길 거야. 대학 들어갈 때까지만 참아줘." 그래, 모든 건 대학이 들어가고 나서야 가능했다. 꿈을 좇는 것도, 사회에 반기를 드는 일도. 하지만 대학에 입학하고 나면, 그제서야 숨겨져 있던 능선들이 눈에 들어온다. 직장, 결혼, 노년 등등. 개인적인 문제들 때문에 사회를 바꿔보려는 시도가 좌절되지만, 여론이 형성되기 전까지 견뎌야 하는 아니꼬운 시선들도 무시할 수 없다. 우리는 이렇게 여러 이유를 들어가며 사회를 변화시키는 일을 뒤로 미룬다. 사회에 가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외국으로 도피하는 회피 방법을 택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나는 작품을 끝까지 읽고 난 후에, <산 자들>은 내가 가진 것이 이리도 부족함을 알리려는 의도가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작가는 매 작품마다 사회가 "아직 기회가 있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독자들에게 전달한다. 또한 사회가 '합리적인 것'이라고 강요하는 일들이 '을'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 있으며, 왜 늘 '을'이 잘못에 책임을 져야만 하는지 캐릭터들의 입을 빌려 의문을 제기한다. 마지막 작품 <새들은 나는 게 재미있을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작가는 독자들에게 "사람은 대부분 옳고 그름을 분간하고, 그른 것을 옳게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주지시키고, 행동 변화를 요구한다.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서야 함을 질문의 형태로 제시함으로써, 우리 스스로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이미 와 있음을, "덤벼보기 전에 그게 적당한 기회라는 걸 알아챌 수"없다는 점을 자각하게 만든다.

<산 자들>에는 사회와 대항해야 할 이유에 대해 묻는 사람들이 있었다. 지금 있는 자리에 만족하고, 변화를 원치 않는 무리는 어느 집단에나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는 살아남았기 때문에 '죽은 자'들에게 진 빚이 있다. 아무리 부딪혀도 유의미한 변화를 만들어내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런 경우가 훨씬 많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암살>이라는 영화에서 '전지현' 배우가 했던 대사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행동에 나서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자 한다.

그렇지만 알려줘야지. 우린 계속 싸우고 있다고.

이것이 '산 자들'로서 해야만 하는 의무다.

그는 대외 활동을 다시 해야 했다. 그를 반겨주고 인정해 주는 곳에 가야 했다. 설사 그들이 자신을 환영하는 이유가 값싼 노동력 때문이라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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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사람들
박영 지음 / 은행나무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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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라는 계절에도 여러 가지 얼굴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작가 '박영'의 <이름 없는 사람들>은 겨울의 혹독하고 매서운 추위와 닮아 있다. '이름 없는 사람들'이라는 제목과 뒤표지의 소개 글로 나는 이미 이 책이 절망의 끝을 보여주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이름 없는 사람들>에서 보이는 나약하고 순수한 사람들과 빠져나올 수 없는 범죄의 굴레는 영화 <원라인>을 떠올리게 했다.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을 파멸로 이끌어야 한다,는 점에서 두 작품은 몹시 흡사하다. 이미 삶이 재난과도 같기 때문에 타인의 울부짖음은 그들에게 소용이 없었고, 그릇된 행동을 통해 불우한 처지에서 벗어나 자유를 획득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게다가 두 작품 속의 '김진우(<이름 없는 사람들>)'와 '민재(<원라인>)'는 죽음을 감수하더라도, 스스로 무모한 싸움을 멈추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린 것마저 닮아있다. 이들의 용기 있는 결정에 안도하면서도, 세상의 끝에 내몰린 사람들을 생각하면 마냥 기뻐할 수만도 없다. 내가 살고 있는 휘황찬란한 도시의 빛은 "그들의 실패와 죽음을 연료로" 만들어졌으나, '도시'의 이면에 '이름 없는 자'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는 것을 자주 잊어버린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도시는 그토록 많은 사람들의 삶이 부서지고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아름"답기 때문이다. '박영' 작가의 <이름 없는 사람들>은 도시의 어두운 면을 덮어 버리려는 현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작품이다.

또한 저자는 극도의 경쟁으로 사람들을 내모는 현 사회를 비판한다. 화자인 '김진우'가 처한 상황은 '투견'들의 인생에 종종 빗대어진다. 싸우지 않으면 먹히고야 말기 때문에 외로운 싸움을 지속하는 '투견'들에게서 '김진우'가 가진 쓸쓸함이 드러난다. 투견들 중에서도 각별히 친했던 '하얀 개'가 '김진우'에게서 따스함을 느끼고 나서, 더 이상 싸우기를 거부하는 장면은 독자들의 마음을 아리게 한다. 작품 속에서 '하얀 개'는 '김진우'라는 사람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결국 '김진우'도 사채업자인 '재'가 종용하는 싸움을 지속하고 싶지 않았고, 누군가의 다정한 손길을 절실히 바랬음을 간접적으로나마 알 수 있다.

'투견'처럼 끊임없는 전쟁 속에서 살아가는 '김진우'에게 희망은 'T타워'와 '나비'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특히 'T타워' 광고판에서 밝고 따뜻한 세상에서 영원히 순수한 상태로 살아갈 아이들의 모습은 '김진우'가 유일하게 쫓는 빛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누군가가 보여주려고 하는 "허울 좋은 명분"일뿐이며, '자유'는 끝끝내 주어지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예측할 수 있다. '영상 매체'는 종종 허구의 세계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이런 허구적인 유토피아는 무지하고 나약한 영혼들의 믿음에 의해 유지된다. 그들은 빚이 '0'이 되리라는 '갑'의 회유에 넘어가 하루하루를 살아낸다. 'T타워'라는 유토피아가 있었다면, 디스토피아로 'B구역'이 등장한다. 이전의 화재로 크게 불타버린 그곳에 사람들은 '식인귀'가 산다고 말하며, 접근하기를 꺼린다. 하지만 '재'에게 빚을 지고, 삶의 끝에 선 이들에게는 'B구역'보다 '도시'가 더 "지옥"같은 장소였다. 작가는 'B구역'을 통해 우리가 가진 헛된 공포심을 지적하며, 도시의 숨겨진 불완전한 면을 까발린다.

외적으로 볼 때 허약하기 짝이 없는 '재'에게 휘둘리는 '김진우'를 보며 '돈'에 대한 두려움을 느꼈다. 누군가는 '돈'이 종이에 불과하고, 사람들의 신념에 의해서 유지되는 가상적인 존재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름 없는 사람들>에서 '돈'은 막강한 권력의 도구가 되고, 절대적인 복종의 이유가 된다. 돈 때문에 주어지는 범죄의 굴레에서 적극적으로 벗어나 보려고 애쓰거나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없다. 사실 '김진우'의 그런 모습이 못마땅했으나, 그는 다른 선택지가 있음을 알지 못하는 우매한 '을'이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사채업자인 '재'는 절박한 사람들의 두려움과 공포를 교묘히 이용할 줄 아는 '갑'이었다. "재는 세상의 가장자리에서 피를 빨아먹으며 중심가를 향해 거대한 세력을 키워나갔"고, "자신만의 빛나는 타워를 세울 준비를" 했다. 그는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 가장자리에 서있는 자들만을 노린 것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김진우'는 세상의 끝에까지 가야 했고, 그곳에서 비로소 또 다른 시작을 발견한다. 한 쪽에서만 보면 '재'라는 캐릭터만 나쁜 것처럼 비치지만, 그 또한 세상의 어두운 면을 알고 있던 자라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역시나 사람을 극단적인 선택으로 내모는 사회를 비판하지 않을 수가 없다. 세상에 절대적인 악은 없다는 사실을 또 한 번 뼈저리게 깨닫는다.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듯

흔들리던 종소리가 들려오는 듯합니다.

이 소설에 시간을 내주신 모든 분들의 귓가에도

그 소리가 가닿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박영' 작가의 마지막 말에 괜스레 숙연해진다. <이름 없는 사람들>은 누군가의 잘못을 비난하기 위해 쓰였다기 보다,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종을 울리고 있을 사람들을 인지해야 한다,고 말하려는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에게는 이름이 없고, 안정적으로 머물 자리도 소유하고 있지 않다. 이 도시는 그들의 슬픔을 통해 빛나고 있기에, 그들의 삶은 우리와 무관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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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프롬 - 사랑의 혁명을 꿈꾼 휴머니스트 클래식 클라우드 15
옌스 푀르스터 지음, 장혜경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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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의 거장'을 찾아 떠나는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 15번째 도서는 <에리히 프롬>이다. 이전과 달리 '옌스 푀르스터'라는 외국인 작가가 가이드 역할을 맡았다. 11월부터 '인생 여행단'이라는 '클래식 클라우드' 서포터즈 활동을 하면서 총 3권의 책을 만났다. 그중에서 이번이 가장 흡족하고, 생각할 여지를 많이 준 도서였다. '에리히 프롬'이 '소유', '존재', '자유' 등의 소재를 다룬 저서를 써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에리히 프롬>을 쓴 '옌스 푀르스터'의 문체 덕분인 것도 있다. 그는 무언가에 관해 단언하지 않고, 여러 생각들을 제시한 후 자신의 의견은 이렇다,고 얹어 주었다. 그러니까 판단은 철저히 독자의 몫인 것이다. 독자에게 가르치려 들지 않는 자세는 서문에도 명시되어 있다. "누가 옳고 그른가는 부차적 문제다. 누군가가 수많은 사람에게 중요한 주제를 새로이 고민하게 하여 더 나은 이론이 나올 수 있도록 생각의 문을 열었다는 사실이 훨씬 더 중요하다", 혹은 "연구는 토론을 선도하기 위해 존재하고 이론은 언젠가 반박당하여 더 나은 이론이 생겨날 수 있기 위해 존재한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무엇이 옳다, 고 제시하지 않았으며 '에리히 프롬'의 의견이나 이번 책 자체에도 여러 의견이 제시될 수 있도록 내버려 두었다. 책을 이토록 능동적으로 읽으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에리히 프롬'과 '옌스 푀르스터'에게 빨려 들었다. 실제로 무슨 생각까지 했냐 하면, '옌스 푀르스터'에게 현재 느끼고 있는 개인적 고민들을 털어놓고 싶었다. 감정들을 누군가의 앞에 쏟아내는 일에 서투르지만, 왠지 나를 섣부르게 재단하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들었다. 이렇게 모호한 문체가 누군가에게는 답답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으나, 나는 오히려 스스로 생각을 쥐어짜낼 거리가 생겨서 즐거웠다.

이제 '에리히 프롬'에 대해 집중을 해볼까 한다. '에리히 프롬'은 '사회심리학자'로, <소유나 존재냐>, <자유로부터의 도피> 등의 유명한 저서들을 남겼다. 그는 각 사회마다 '성격'이라는 것이 존재하며, 인간은 자신이 처한 환경이나 사회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사회가 개인을 병들게 하므로 심리학자들도 이 사회의 억압적 구조를 고발하고 바꿀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또한 개인에게도 적극적으로 사회적 과정에 참여할 것을 권유했으며, 개인이 정치에 어떤 영향력을 미치는지 잘 이해하고 있는 자들이 상위 자리를 차지하기를 바라는 학자였다. 나 또한 개인이 취하는 행동들의 원인이 사회 저변에 위치해 있다고 믿기 때문에, 책을 읽는 동안 크게 공감할 수 있었다. 불안하고 억압된 사회에 산다고 해서 모두가 범죄자가 되고, 옳지 않은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옌스 푀르스터'가 지적한 바처럼, '프롬'이 개인의 어릴 적 환경이나 상황을 고려하지 못한 데 대해서는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프로이트'의 사상이 이미 주도하고 있던 때에 이런 혁신적인 생각을 가질 수 있었던 '프롬'에 대해 놀라운 마음이 든다. 그리고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와 같은 문제이긴 하지만, 가정 환경도 사회의 영향을 받아 결정되므로 그의 생각은 옳았던 듯하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이라는 책을 펴내며, '사랑'에 관한 의견을 펼치기도 했다. 그는 사랑이 "자신을 갈고닦는 훈련"이며, 태생적인 외로움을 극복하고 존재의 핵심을 찾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자신을 적극적으로 깨닫는 일"에 그치지 않고, "상대를 적극적으로 깨"달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프롬'의 주장을 따라가다 보면, 사랑하는 상대를 해치는 일은 발생할 수가 없다. 자신이 존재하는 근본적인 이유를 깨닫게 해준 상대를 망가뜨리는 일은 필연적으로 스스로를 해롭게 하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20세기를 살았던 '프롬'이 내 아버지에게서 보이는 가부장적인 태도가 아니라 상호 존중에서 비롯된 사랑을 지향하는 사고방식을 발견할 수 있었다. 대다수의 흐름을 따라가지 않고, 개별적인 사고를 할 수 있다는 점이 위대한 사상가의 자질인가, 싶기도 했다. 나였다면 무의식에 박힌 사회의 스테레오 타입이 주는 영향을 피하지 못하고 좌절하고 말았을 것이다.

'에리히 프롬'과 저자 '옌스 푀르스터'의 고향인 독일은 한국과 닮은 구석이 있었다. 그들도 능률과 성과만을 중시했고, 이것이 '소유'와 '물질주의'에 관한 물음으로 이어졌다. '에리히 프롬'은 소유를 경계했으며, 받으려 하기보다는 주는 삶을 선택하라고 말했다. 그는 여러 사상으로 독자들의 마음을 흔든 저술가답게, "내적 활동(정서적, 지적, 창조적 활동), 자기가 가진 힘의 생산적 소비" "행복의 길이요, 목표"라는 '소유'의 대안을 제시했다.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소유'에 관한 물음은 익숙하고, 끝을 알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소유'나 '물질'에 관한 생각들은 상황에 따라 변하고, 확언을 하기 어렵다. 그러니까 '에리히 프롬'의 말에 동의를 할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 딱 잘라 말하기가 곤란하다. 하지만 물질적으로 빈곤한 현재의 상태로 볼 때, '소유'를 포기하라는 '프롬'의 주장은 설득력을 얻지 못한다. 내려놓을 것이 없는데, 이미 빈손을 더 털어내라는 조언은 내 마음을 휘두르지 못했다. 기본적으로 소비에 크게 관심이 없기 때문에 그의 주장이 와닿지 못했던 이유도 있을 것이다.

'소유', '존재', '자유', '사랑' 등의 주제는 확실히 논란의 여지가 많은 주제들이다. <에리히 프롬>의 저자인 '옌스 푀르스터'는 '프롬'의 인생사와 그가 머무른 장소를 언급할 뿐만이 아니라, 이런 주제들을 표면으로 꺼내 독자들에게 끊임없이 책에 참여할 여지를 제공한다. '에리히 프롬'의 견해에는 공감하는 바가 더 컸지만, 누군가에게는 불편한 요소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옌스 푀르스터'가 언급했듯 옳고 그름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런 생각들을 할 계기를 제공해주었다는 것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그러니 다른 독자들도 <에리히 프롬>과 함께 즐겁게 토론에 참여해주면 좋겠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이번 클래식 클라우드 서포터즈 활동 중에 최고로 꼽고 싶다. 또한 '에리히 프롬'이 말년에 머물렀던 스위스의 '무랄토' 지역에 가고 싶어졌다. '프롬'에 대한 애정도 있지만, 장소 자체에 크게 매력을 느끼기도 했다. "쓸데없는 물건들이 유혹하지 않"고, "그저 숨 쉬고 커피 마시고 공기를 즐기"는 일이 전부이며, "내려놓기가 쉬울"듯하다,는 저자의 표현에 나는 언제 갈지도 알 수 없는 다음 여행의 목적지를 '스위스'의 '무랄토'로 설정해두었다.

#내가뽑은명문장

물질주의자면서 바라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물질적인 게 아니니까. 행복, 관계, 아름다운 인생 같은 걸 바라니 전부 다 가졌으면서도 가진 게 하나도 없다고 느끼는 거지.

그래, 이것으로 내 인생 전체에 걸쳐 가지고 있던 의문이 해결되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정신적이고 감정적인 것들을 물질로 모두 '구매'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된 사람들이 생겨났다. 좋은 대학과 직장에 가면 만사가 해결되리라는 믿음을 가지게 된 내 부모의 세대들처럼(결국 그들이 옳지 않았음을 우리 세대가 온 몸으로 증명해내고 있다), 물질이 만사형통의 해결책이라고 여기게 된 사람들이 안타깝다. 그리고 이 문제의 원인은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해결되지 못하는 사회 구조에 책임이 있다.

불리한 인격 발달은 교육 방식 때문이기도 하지만 구체적인 사회 현상의 탓도 크다.

어릴 때 무언가를 잘못하면 어른들은 늘 부모의 교육 방식을 지적했다. 나로서도 부모의 얼굴에 먹칠하지 않기 위해서 노력을 무진장했다. 어른이 되고서야 부모가 주는 영향력만큼이나 또래 집단과 더 큰 사회가 내 인격 발달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음을 깨달았다. 내 그릇된 행동으로 부모가 책임을 지는 것은 부모가 이른바 내 직속 상관이기 때문이다. 아이 하나가 잘못되면 온 동네에 책임이 있다,던 말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

사격수의 편견 실험은 사회의 스테레오 타입이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매우 확실한 사례이다.(210p)

"의식과 무의식의 불일치"를 강조하는 부분이다. 내가 의식적으로는 인종을 차별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무의식적으로 박힌 사회적인 편견이 행동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예시가 제기되었다. 이는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가난이나 유리천장을 극복해내지 못하리라는 예측만큼이나 나를 무력해지게 만들었다. 이미 내 무의식에 새겨진 사상들은 별 수 없는 것이겠지만, 후대의 아이들에게 올바른 생각을 심어줄 수 있는 좀 더 건강한 사회가 되기를 희망해본다.

시간이 촉박하다. 최근에 한 기후학자가 텔레비전에 나와 말하기를, 20층 건물에서 떨어지는 남자가 2층을 지나며 '아직은 다 괜찮아'라는 농담을 했다고 한다. 이 남 자는 기후변화를 대하는 우리 인류의 모습이다. 되돌릴 수 있을까?(248p)

아, 이만큼 경각심을 들게 만드는 문장이 있었던가. 기후 변화의 심각성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다만 모두 실천이 부족할 뿐이지. 이 문장도 독자들에게 단순한 자극만을 주고, 실천을 이끌어내지는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후 변화에 대한 두려움으로 간담이 서늘해지고, 팔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아파트에서 떨어지는 일에 비유하니까 기후 변화가 더욱 실제적인 위협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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짓기와 거주하기 - 도시를 위한 윤리
리차드 세넷 지음, 김병화 옮김, 임동근 해제 / 김영사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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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건축'이라는 학문이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에 대해 던지는 물음들을 좋아한다. 그래서 '건축' 관련 서적이나 영화라면 일단 관심을 가지고 보는 편이다. '건축'이라는 단어 자체가 주는 어떤 환상을 가지고 있는 것도 <짓기와 거주하기>라는 책을 선택하는 데 한 몫 했을 것이다. <짓기와 거주하기>라는 책에 기대했던 바는 정말 약소했다. 누구든지 '건축'이라는 학문에 다가서기 쉬운 인상을 주고, '도시'라는 소재에 관해 흥미를 유발할 수 있는 내용이기를 바랐다. 하지만 '리처드 세넷'이 써내려간 이 책은 '도시'를 다각도로 조망하고, 그 과정에서 여러 학문을 아우른다. 도시와 관련된 여러 이론과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심리, 그리고 현 도시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성에 이르기까지. 저자 '리처드 세넷'이 가진 지식의 방대한 양을 따라 잡으려면, 꽤 애를 써야만 했다. 내가 그를 따라 잡기에는 아직 너무도 어리고, 부족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곤 했다. 간단하면서도, 또 얕지는 않은 무언가를 기대했던 사람으로서는 좀 당혹스러운 면이 없지 않았다. 그래도 중반부를 넘어가면서 책의 흐름에 적응이 되기 시작했다. 그래도 역시 이번 도서는 '도시계획'이나 '도시'라는 주제에 꾸준히 눈길을 두고 있던 독자들에게 권해야 할 것 같다. 편집 상에서 책의 맨 뒤에 '리뷰'나 '평론'이라는 단어가 아니라, '해제'라는 파트가 삽입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이 책의 난이도를 짐작해볼 수 있겠다.

<짓기와 거주하기>에서 실제 몇몇 도시들이 언급되기도 했는데, 그 중에서 인천에 위치한 '송도'가 등장해서 반가웠다. '리처드 세넷'이 '송도'에 대해 지적한 부분들은 주목할 만 했다. 저자는 도시라는 공간이 지어지는 것에 그치지 않고, 거주하는 사람들과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우리에게는 주인과 노예 관계에서 물러나 버리는 헤겔의 방식이 아니라 환경을 건설하는 상호작용적 열린 방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송도'는 거주하는 사람들이 수동적으로 도시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처방적 스마트 시티는 이런 마비화의 장소"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열린 도시'를 지향해야 하며, 그것은 거주자들에게 어느 정도 자율을 배분함으로써, 혹은 그들과의 소통을 통해 성취될 수 있다는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도시'뿐만이 아니라, 내가 사는 건물만 고려해보더라도 '짓는 자'와 '거주하는 자'의 의견 교환은 절실히 필요해 보인다.

책을 읽는 동안 '도시'라는 거대한 장소가 내게 생각보다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깨달았다. 자유의지에 따라 행한 일이라고 믿었지만, 그저 도시계획에 따라 움직였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한편으로, 현 도시가 "만든 사람의 의도에 한정되지 않"고, "시간 속에 열"린 채로 개선될 수 있도록 거주자들이 적극적으로 관여해야 한다는 사실을 '리처드 세넷'은 일깨우고 있다. 이제껏 도시를 계획하는 사람들의 일이라고만 여겨왔는데, 거주하는 사람들이 도시에 대해서 더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으므로, 그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도시계획가들의 전문적인 지식과 세월의 흐름, 마지막으로 거주자들의 도시에 대한 애정이 하나로 모아질 때, 비로소 하나의 도시가 탄생한다. 도시계획가와 도시 거주자들의 상호 존중과 겸손함을 통해서 '도시'가 만들어져야 함을 알 수 있었던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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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과 정의 - 문학으로 읽는 법, 법으로 바라본 문학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안경환.김성곤 지음 / 비채 / 2019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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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 한 해 '법'과 '정의'에 대해 성찰하는 책들이 쏟아져 나왔다. <판결과 정의>(창비 출판), <법의 이유>(arte 출판) 등에 이어 영화나 소설을 통해 '법'과 '정의', 그리고 현 사회를 돌아보려는 <폭력과 정의>(비채 출판)가 등장했다. 믿었던 국가에 배신당한 대한민국 국민들이 그만큼 깨어있는 인식을 가지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증거일 테다. '법'이나 '정의'에 대해 살펴보는 일은 분명히 가치 있는 일이고, 언제가 되었든 반드시 거쳐가야 하는 과정이다. 하지만 '법'과 '정의'라는 단어는 접근하기 전부터 다가서기 어렵다는 인식을 준다. 그런 독자들을 위해 <폭력과 정의>가 출판된 것이다. 우리에게도 친숙한 <메이즈 러너>, <캡틴 아메리카>, <괴물>, <왕자와 거지> 등의 작품을 소재로 삼고 있기 때문에 흥미로우면서도, 심도 있게 본래 가지고 있던 법이나 정의, 사회에 대한 생각들이 옳은지 파헤친다. 사실 <폭력과 정의>라는 제목만 들으면 어둡고 어려운 책일 거라고 여겨지기 쉬울 듯하다. 또한 "문학으로 읽는 법, 법으로 바라본 문학"이라는 부제목이 붙었으나, 이 책에는 영화를 소재로 삼은 경우가 훨씬 많다. 게다가 책은 법에 관해서만 다루고 있지 않다. '안경환', '김성곤' 두 작가의 연륜으로 과거부터 이제까지의 사회를 조망하며, 우리가 가진 편견이 과연 절대적 진리인지에 대해서도 묻고 있다. 그러니까 책의 표지만을 보고 <폭력과 정의>를 판단할 수는 없다. 표지에 쓰인 문구들보다 훨씬 포괄적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 '법의 이면'에서는 법 제도와 변호사라는 직업에 관해 살펴보고 있고, 2부 '정의와 편견'은 언제나 논란의 대상이 되는 '정의'와 우리가 가진 '편견', '차별'등의 일상적인 폭력에 관해 논의한다. 3부 '사회와 사람'이라는 장은 하나의 단어로 추출하기가 어렵다. 다만 특징이라고 하자면, 남북한 분단 상황에 대해 주로 서술하고 있다는 점이다. 1부에서 3부에 이르기까지 소설이나 영화를 통해 독자들에게 다양한 시각을 제공하고, 평소 가지고 있던 인식의 틀을 깨주려는 시도가 엿보이는 작품이다. 또한 법이라는 게 문제가 발생했을 때 완전한 구원이 되어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경고를 한다. 때로 "구원은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양극단의 싸움이 아닌, 시스템을 벗어나 외부로 나가는 제3의 길에 있는지도 모른다"라는 것이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동화 <백설공주>에 담긴 여성에 대한 편견을 지적한 부분이다. 배우 '키이라 나이틀리'를 통해서 나는 이미 우리가 익숙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디즈니 동화들이 실은 여성차별적이라는 사실을 주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백설공주>에서 "여성의 아름다움을 판단하는 거울의 목소리가 언제나 남자 목소리로 되어 있다는 점"이나 왕자가 난쟁이들에게 했던 대사-"이 여인을 나에게 주면 내 소중한 소유물로 삼겠소"-도 "여성은 남성의 소유물이라는 암시가 깔려 있는 것"이라고 지적한 부분은 생소했기 때문에 글을 쓰고 있는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았던 것이다. 이전에 왜 꼭 공주들은 왕자가 구해주러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어야만 하냐는 항의는 들어본 적이 있고, 나도 무척 공감했던 기억이 있다. 동화를 읽는 당시만 해도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에 어린아이들이 어른들의 지식을 얼마나 무력하게 수용하는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거울의 목소리가 남성이었다는 점과 왕자가 '소유물'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는 점은 기억조차 나지 않아서 <폭력과 정의>를 읽는 내내 해당 부분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이외에도 <폭력과 정의>에는 여러 장에서 시스템의 틀 안에서 어떠한 이의 제기도 없이 무언가를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독자들에게 일침을 가한다. 더 나아가 아무리 힘없는 약자라도 나라의 최고 법원으로 하여금 법을 바꾸게 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며, 진지한 참여와 토론을 통해 법이나 사회의 오류가 극복될 수 있다는 점을 주지시킨다.

<폭력과 정의>를 통해서 나는 이전에 관람했던 영화나 읽었던 소설들에 대해 색다른 시각을 획득할 수 있었으며, 평소에 가지고 있던 생각들을 절대적 진리로 여기지 않고, 경계할 수 있게 되었다. 각 장마다 내용이 길지 않으므로, 독서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라도 쉽게 완독이 가능하다는 장점 또한 가지고 있는 책이다.

이 영화는 우리가 절대적 진실이라고 믿는 것들이 사실은 얼마나 허구적이며, 또 얼마나 쉽게 조작될 수 있는가를 잘 드러내고 있다.(...)즉 중요한 것은 ‘진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잘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 P165

기드온이 피리를 뿜어내듯 분 나팔 소리에 법이, 정의가, 판사의 양심이 그리고 인간 존엄을 표방하는 헌법정신이 장단을 맞추었던 것이다. 여기에 법제도의 위력이 있다. - P134

이 재판 결과는 인권유린과 인간성의 희생 아래 경제성장 일변도로 달음박질해온 한국 현대사에 대한 심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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