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히 프롬 - 사랑의 혁명을 꿈꾼 휴머니스트 클래식 클라우드 15
옌스 푀르스터 지음, 장혜경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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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의 거장'을 찾아 떠나는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 15번째 도서는 <에리히 프롬>이다. 이전과 달리 '옌스 푀르스터'라는 외국인 작가가 가이드 역할을 맡았다. 11월부터 '인생 여행단'이라는 '클래식 클라우드' 서포터즈 활동을 하면서 총 3권의 책을 만났다. 그중에서 이번이 가장 흡족하고, 생각할 여지를 많이 준 도서였다. '에리히 프롬'이 '소유', '존재', '자유' 등의 소재를 다룬 저서를 써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에리히 프롬>을 쓴 '옌스 푀르스터'의 문체 덕분인 것도 있다. 그는 무언가에 관해 단언하지 않고, 여러 생각들을 제시한 후 자신의 의견은 이렇다,고 얹어 주었다. 그러니까 판단은 철저히 독자의 몫인 것이다. 독자에게 가르치려 들지 않는 자세는 서문에도 명시되어 있다. "누가 옳고 그른가는 부차적 문제다. 누군가가 수많은 사람에게 중요한 주제를 새로이 고민하게 하여 더 나은 이론이 나올 수 있도록 생각의 문을 열었다는 사실이 훨씬 더 중요하다", 혹은 "연구는 토론을 선도하기 위해 존재하고 이론은 언젠가 반박당하여 더 나은 이론이 생겨날 수 있기 위해 존재한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무엇이 옳다, 고 제시하지 않았으며 '에리히 프롬'의 의견이나 이번 책 자체에도 여러 의견이 제시될 수 있도록 내버려 두었다. 책을 이토록 능동적으로 읽으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에리히 프롬'과 '옌스 푀르스터'에게 빨려 들었다. 실제로 무슨 생각까지 했냐 하면, '옌스 푀르스터'에게 현재 느끼고 있는 개인적 고민들을 털어놓고 싶었다. 감정들을 누군가의 앞에 쏟아내는 일에 서투르지만, 왠지 나를 섣부르게 재단하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들었다. 이렇게 모호한 문체가 누군가에게는 답답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으나, 나는 오히려 스스로 생각을 쥐어짜낼 거리가 생겨서 즐거웠다.

이제 '에리히 프롬'에 대해 집중을 해볼까 한다. '에리히 프롬'은 '사회심리학자'로, <소유나 존재냐>, <자유로부터의 도피> 등의 유명한 저서들을 남겼다. 그는 각 사회마다 '성격'이라는 것이 존재하며, 인간은 자신이 처한 환경이나 사회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사회가 개인을 병들게 하므로 심리학자들도 이 사회의 억압적 구조를 고발하고 바꿀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또한 개인에게도 적극적으로 사회적 과정에 참여할 것을 권유했으며, 개인이 정치에 어떤 영향력을 미치는지 잘 이해하고 있는 자들이 상위 자리를 차지하기를 바라는 학자였다. 나 또한 개인이 취하는 행동들의 원인이 사회 저변에 위치해 있다고 믿기 때문에, 책을 읽는 동안 크게 공감할 수 있었다. 불안하고 억압된 사회에 산다고 해서 모두가 범죄자가 되고, 옳지 않은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옌스 푀르스터'가 지적한 바처럼, '프롬'이 개인의 어릴 적 환경이나 상황을 고려하지 못한 데 대해서는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프로이트'의 사상이 이미 주도하고 있던 때에 이런 혁신적인 생각을 가질 수 있었던 '프롬'에 대해 놀라운 마음이 든다. 그리고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와 같은 문제이긴 하지만, 가정 환경도 사회의 영향을 받아 결정되므로 그의 생각은 옳았던 듯하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이라는 책을 펴내며, '사랑'에 관한 의견을 펼치기도 했다. 그는 사랑이 "자신을 갈고닦는 훈련"이며, 태생적인 외로움을 극복하고 존재의 핵심을 찾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자신을 적극적으로 깨닫는 일"에 그치지 않고, "상대를 적극적으로 깨"달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프롬'의 주장을 따라가다 보면, 사랑하는 상대를 해치는 일은 발생할 수가 없다. 자신이 존재하는 근본적인 이유를 깨닫게 해준 상대를 망가뜨리는 일은 필연적으로 스스로를 해롭게 하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20세기를 살았던 '프롬'이 내 아버지에게서 보이는 가부장적인 태도가 아니라 상호 존중에서 비롯된 사랑을 지향하는 사고방식을 발견할 수 있었다. 대다수의 흐름을 따라가지 않고, 개별적인 사고를 할 수 있다는 점이 위대한 사상가의 자질인가, 싶기도 했다. 나였다면 무의식에 박힌 사회의 스테레오 타입이 주는 영향을 피하지 못하고 좌절하고 말았을 것이다.

'에리히 프롬'과 저자 '옌스 푀르스터'의 고향인 독일은 한국과 닮은 구석이 있었다. 그들도 능률과 성과만을 중시했고, 이것이 '소유'와 '물질주의'에 관한 물음으로 이어졌다. '에리히 프롬'은 소유를 경계했으며, 받으려 하기보다는 주는 삶을 선택하라고 말했다. 그는 여러 사상으로 독자들의 마음을 흔든 저술가답게, "내적 활동(정서적, 지적, 창조적 활동), 자기가 가진 힘의 생산적 소비" "행복의 길이요, 목표"라는 '소유'의 대안을 제시했다.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소유'에 관한 물음은 익숙하고, 끝을 알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소유'나 '물질'에 관한 생각들은 상황에 따라 변하고, 확언을 하기 어렵다. 그러니까 '에리히 프롬'의 말에 동의를 할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 딱 잘라 말하기가 곤란하다. 하지만 물질적으로 빈곤한 현재의 상태로 볼 때, '소유'를 포기하라는 '프롬'의 주장은 설득력을 얻지 못한다. 내려놓을 것이 없는데, 이미 빈손을 더 털어내라는 조언은 내 마음을 휘두르지 못했다. 기본적으로 소비에 크게 관심이 없기 때문에 그의 주장이 와닿지 못했던 이유도 있을 것이다.

'소유', '존재', '자유', '사랑' 등의 주제는 확실히 논란의 여지가 많은 주제들이다. <에리히 프롬>의 저자인 '옌스 푀르스터'는 '프롬'의 인생사와 그가 머무른 장소를 언급할 뿐만이 아니라, 이런 주제들을 표면으로 꺼내 독자들에게 끊임없이 책에 참여할 여지를 제공한다. '에리히 프롬'의 견해에는 공감하는 바가 더 컸지만, 누군가에게는 불편한 요소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옌스 푀르스터'가 언급했듯 옳고 그름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런 생각들을 할 계기를 제공해주었다는 것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그러니 다른 독자들도 <에리히 프롬>과 함께 즐겁게 토론에 참여해주면 좋겠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이번 클래식 클라우드 서포터즈 활동 중에 최고로 꼽고 싶다. 또한 '에리히 프롬'이 말년에 머물렀던 스위스의 '무랄토' 지역에 가고 싶어졌다. '프롬'에 대한 애정도 있지만, 장소 자체에 크게 매력을 느끼기도 했다. "쓸데없는 물건들이 유혹하지 않"고, "그저 숨 쉬고 커피 마시고 공기를 즐기"는 일이 전부이며, "내려놓기가 쉬울"듯하다,는 저자의 표현에 나는 언제 갈지도 알 수 없는 다음 여행의 목적지를 '스위스'의 '무랄토'로 설정해두었다.

#내가뽑은명문장

물질주의자면서 바라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물질적인 게 아니니까. 행복, 관계, 아름다운 인생 같은 걸 바라니 전부 다 가졌으면서도 가진 게 하나도 없다고 느끼는 거지.

그래, 이것으로 내 인생 전체에 걸쳐 가지고 있던 의문이 해결되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정신적이고 감정적인 것들을 물질로 모두 '구매'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된 사람들이 생겨났다. 좋은 대학과 직장에 가면 만사가 해결되리라는 믿음을 가지게 된 내 부모의 세대들처럼(결국 그들이 옳지 않았음을 우리 세대가 온 몸으로 증명해내고 있다), 물질이 만사형통의 해결책이라고 여기게 된 사람들이 안타깝다. 그리고 이 문제의 원인은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해결되지 못하는 사회 구조에 책임이 있다.

불리한 인격 발달은 교육 방식 때문이기도 하지만 구체적인 사회 현상의 탓도 크다.

어릴 때 무언가를 잘못하면 어른들은 늘 부모의 교육 방식을 지적했다. 나로서도 부모의 얼굴에 먹칠하지 않기 위해서 노력을 무진장했다. 어른이 되고서야 부모가 주는 영향력만큼이나 또래 집단과 더 큰 사회가 내 인격 발달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음을 깨달았다. 내 그릇된 행동으로 부모가 책임을 지는 것은 부모가 이른바 내 직속 상관이기 때문이다. 아이 하나가 잘못되면 온 동네에 책임이 있다,던 말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

사격수의 편견 실험은 사회의 스테레오 타입이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매우 확실한 사례이다.(210p)

"의식과 무의식의 불일치"를 강조하는 부분이다. 내가 의식적으로는 인종을 차별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무의식적으로 박힌 사회적인 편견이 행동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예시가 제기되었다. 이는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가난이나 유리천장을 극복해내지 못하리라는 예측만큼이나 나를 무력해지게 만들었다. 이미 내 무의식에 새겨진 사상들은 별 수 없는 것이겠지만, 후대의 아이들에게 올바른 생각을 심어줄 수 있는 좀 더 건강한 사회가 되기를 희망해본다.

시간이 촉박하다. 최근에 한 기후학자가 텔레비전에 나와 말하기를, 20층 건물에서 떨어지는 남자가 2층을 지나며 '아직은 다 괜찮아'라는 농담을 했다고 한다. 이 남 자는 기후변화를 대하는 우리 인류의 모습이다. 되돌릴 수 있을까?(248p)

아, 이만큼 경각심을 들게 만드는 문장이 있었던가. 기후 변화의 심각성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다만 모두 실천이 부족할 뿐이지. 이 문장도 독자들에게 단순한 자극만을 주고, 실천을 이끌어내지는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후 변화에 대한 두려움으로 간담이 서늘해지고, 팔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아파트에서 떨어지는 일에 비유하니까 기후 변화가 더욱 실제적인 위협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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