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자들 - 장강명 연작소설
장강명 지음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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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고는 살인이었으므로 그들은 '죽은 자'들이었고, 해고자 명단에 오르지 않은 사람은 '산 자'가 되었다"

 

책 <산 자들>의 강점은 스토리의 생생함이다. 전직 기자 출신인 '장강명' 작가의 특기가 발휘되어 작품은 소설이 아니라 여러 인물의 인터뷰 같았다. 특히 <음악의 가격>이라는 작품에 이르러서는 작가의 현실이 대입됨으로써 소설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이 작품이 허구의 것이 아니라 우리가 버텨내고 있는 현실에 가깝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려던 의도로 읽힌다. <산 자들>은 이토록 생생하게 현 사회의 '을'들에 대한 이야기가 담겼다. '을'들이 살아가는 사회는 "경제적으로 합리적인 일"을 중시하는 곳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산수의 법칙만이 작용한다. "사람 한 명은 돈으로는 몇 억 원, 차로는 몇 대에 해당(<공장 밖에서>)"하는 것이다. "치수 사업이 중요하냐, 노동자들의 생명이 중요하냐(같은 작품)"와 같은 질문은 소용없다. '능률'과 '효용'만이 중요시되는 사회에서 이는 지나치게 낭만적인 질문이다. "우정이나 동료애 같은 단어가 공허하고 기만적인 구호처럼 들"리고, "직장의 의미라든가 업의 본질이라든가 자아실현이라든가 하는 따위의 말도 마찬가지"라는 구절은 현 사회의 문제점을 꿰뚫는다. 사회 초년생은 '인맥'과 '경력'을 위해 작은 일이라도 마다해서는 안 되고(<카메라 테스트>), 중장년층도 자리보전만이라도 다행이라고 여기는 사회에서 기본적 권리와 개인의 가치관은 경시된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오직 생존만을 추구하며 살아"간다. 극한의 경쟁으로 내몰린 이들은 젖어 들어가는 종이배와 닮아 있다. 누군가는 싸우다 지쳐 포기하고 돌아서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이들에게는 포기도 사치다. <현수동 빵집 삼국지>라는 작품에서 엿보이듯이 현상을 유지하는 것 이외에 다른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어려운 현실 속에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협력'이자 '연대'일 것이다. 하지만 사회가 불안정할수록 사람들은 "각자도생"을 추구한다. 세상 모두가 경쟁자가 되고, 오로지 자신의 '생존'만이 우선순위로 고려된다. 한 쪽에서 누군가는 쫓겨나지 않기 위해 싸우는데, 그 집에 들어오려고 밀려드는 사람은 많아 집값이 치솟는 상황에서도 이를 알 수 있다.(<사람 사는 집>). 현상의 이면을 읽어내지 못하고, 그저 눈앞에 있는 이익을 위해 달린다. 사회에서 내몰린 사람들이 "저희도 좀 같이 살면 안 됩니까?(<공장 밖에서>)"하고 묻지만,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타인의 고통을 묵살한다. 당장 한 푼이 중요한데, 어떻게 작은 돈이라도 기부하는 일을 떠올릴 수 있겠는가. '산 자'와 '죽은 자'는 때로 서로를 향해 덤벼들기도 한다. 괜히 애꿎은 상대를 향해 분풀이를 하는 것이다. 누군가를 원망해야 하는 상황에서, '사회'라는 존재는 '개인'에게 너무도 크고, 범위조차 불분명하다.

이기적인 사람들만을 비판할 수는 없다. 사회가 그들이 극단적인 결정을 내리도록 내몰기 때문이다. 본성과 상관없이 최소한의 생존을 위협받는 동물은 돌변하기 마련이다. 작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회에 대항해 '을'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고 주장한다. 사람들은 기세등등한 '갑' 앞에서 대역 죄인처럼 행동하고(<대기발령>), 그들이 원하는 게 값싼 노동력 뿐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부림 당하기를 멈추지 않는다(<대외활동의 신>). "애초에 뭔가 괜찮은 걸 노려볼 기회가 저한테 있기나 했습니까"라고 작가는 사회에 묻는다. 또한 "처음부터 컵에 물은 반밖에 없었습니다. 그 반 컵의 물을 마시느냐, 아니면 그마저도 마시지 못하느냐였습니다."라는 대사로 '을'들이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는 불리함을 역설한다. 사실 작가는 작품 내내 균형 잡힌 시각을 선보이고 있으며, 어떤 한 쪽을 철저히 옹호하지도 않는다. 다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을'의 입장에 서있기에, 독자의 편집으로 소설은 '을'들이 사회에 내놓고 싶은 일종의 보고서 역할을 떠안는다.

<산 자들>을 읽으면서 온종일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작은 개인으로서 가지고 있는 무력함이 절절히 느껴졌기 때문이다. "역병에는 역병의 역할이 있"듯이 이미 어떤 질서가 정해져 있고, 내가 그것을 바꿔내기에 얼마나 부족한지를 작가는 매 작품마다 일깨워 주었다. 그래도 무언가를 시도해보려는 나에게 어른들은 자주 말하곤 했다. "무수한 불의를 혼자서는 도저히 다 바로잡을 수가 없어... 그것도 힘없는 보통 사람이라면 더더욱(...) 이제 세상을 조금씩 바꿀 수 있는 기회가 너한테 점점 많이 생길 거야. 대학 들어갈 때까지만 참아줘." 그래, 모든 건 대학이 들어가고 나서야 가능했다. 꿈을 좇는 것도, 사회에 반기를 드는 일도. 하지만 대학에 입학하고 나면, 그제서야 숨겨져 있던 능선들이 눈에 들어온다. 직장, 결혼, 노년 등등. 개인적인 문제들 때문에 사회를 바꿔보려는 시도가 좌절되지만, 여론이 형성되기 전까지 견뎌야 하는 아니꼬운 시선들도 무시할 수 없다. 우리는 이렇게 여러 이유를 들어가며 사회를 변화시키는 일을 뒤로 미룬다. 사회에 가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외국으로 도피하는 회피 방법을 택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나는 작품을 끝까지 읽고 난 후에, <산 자들>은 내가 가진 것이 이리도 부족함을 알리려는 의도가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작가는 매 작품마다 사회가 "아직 기회가 있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독자들에게 전달한다. 또한 사회가 '합리적인 것'이라고 강요하는 일들이 '을'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 있으며, 왜 늘 '을'이 잘못에 책임을 져야만 하는지 캐릭터들의 입을 빌려 의문을 제기한다. 마지막 작품 <새들은 나는 게 재미있을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작가는 독자들에게 "사람은 대부분 옳고 그름을 분간하고, 그른 것을 옳게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주지시키고, 행동 변화를 요구한다.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서야 함을 질문의 형태로 제시함으로써, 우리 스스로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이미 와 있음을, "덤벼보기 전에 그게 적당한 기회라는 걸 알아챌 수"없다는 점을 자각하게 만든다.

<산 자들>에는 사회와 대항해야 할 이유에 대해 묻는 사람들이 있었다. 지금 있는 자리에 만족하고, 변화를 원치 않는 무리는 어느 집단에나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는 살아남았기 때문에 '죽은 자'들에게 진 빚이 있다. 아무리 부딪혀도 유의미한 변화를 만들어내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런 경우가 훨씬 많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암살>이라는 영화에서 '전지현' 배우가 했던 대사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행동에 나서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자 한다.

그렇지만 알려줘야지. 우린 계속 싸우고 있다고.

이것이 '산 자들'로서 해야만 하는 의무다.

그는 대외 활동을 다시 해야 했다. 그를 반겨주고 인정해 주는 곳에 가야 했다. 설사 그들이 자신을 환영하는 이유가 값싼 노동력 때문이라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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