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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사람들
박영 지음 / 은행나무 / 2019년 11월
평점 :
겨울이라는 계절에도 여러 가지 얼굴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작가 '박영'의 <이름 없는 사람들>은 겨울의 혹독하고 매서운 추위와 닮아 있다. '이름 없는 사람들'이라는 제목과 뒤표지의 소개 글로 나는 이미 이 책이 절망의 끝을 보여주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이름 없는 사람들>에서 보이는 나약하고 순수한 사람들과 빠져나올 수 없는 범죄의 굴레는 영화 <원라인>을 떠올리게 했다.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을 파멸로 이끌어야 한다,는 점에서 두 작품은 몹시 흡사하다. 이미 삶이 재난과도 같기 때문에 타인의 울부짖음은 그들에게 소용이 없었고, 그릇된 행동을 통해 불우한 처지에서 벗어나 자유를 획득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게다가 두 작품 속의 '김진우(<이름 없는 사람들>)'와 '민재(<원라인>)'는 죽음을 감수하더라도, 스스로 무모한 싸움을 멈추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린 것마저 닮아있다. 이들의 용기 있는 결정에 안도하면서도, 세상의 끝에 내몰린 사람들을 생각하면 마냥 기뻐할 수만도 없다. 내가 살고 있는 휘황찬란한 도시의 빛은 "그들의 실패와 죽음을 연료로" 만들어졌으나, '도시'의 이면에 '이름 없는 자'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는 것을 자주 잊어버린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도시는 그토록 많은 사람들의 삶이 부서지고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아름"답기 때문이다. '박영' 작가의 <이름 없는 사람들>은 도시의 어두운 면을 덮어 버리려는 현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작품이다.
또한 저자는 극도의 경쟁으로 사람들을 내모는 현 사회를 비판한다. 화자인 '김진우'가 처한 상황은 '투견'들의 인생에 종종 빗대어진다. 싸우지 않으면 먹히고야 말기 때문에 외로운 싸움을 지속하는 '투견'들에게서 '김진우'가 가진 쓸쓸함이 드러난다. 투견들 중에서도 각별히 친했던 '하얀 개'가 '김진우'에게서 따스함을 느끼고 나서, 더 이상 싸우기를 거부하는 장면은 독자들의 마음을 아리게 한다. 작품 속에서 '하얀 개'는 '김진우'라는 사람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결국 '김진우'도 사채업자인 '재'가 종용하는 싸움을 지속하고 싶지 않았고, 누군가의 다정한 손길을 절실히 바랬음을 간접적으로나마 알 수 있다.
'투견'처럼 끊임없는 전쟁 속에서 살아가는 '김진우'에게 희망은 'T타워'와 '나비'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특히 'T타워' 광고판에서 밝고 따뜻한 세상에서 영원히 순수한 상태로 살아갈 아이들의 모습은 '김진우'가 유일하게 쫓는 빛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누군가가 보여주려고 하는 "허울 좋은 명분"일뿐이며, '자유'는 끝끝내 주어지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예측할 수 있다. '영상 매체'는 종종 허구의 세계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이런 허구적인 유토피아는 무지하고 나약한 영혼들의 믿음에 의해 유지된다. 그들은 빚이 '0'이 되리라는 '갑'의 회유에 넘어가 하루하루를 살아낸다. 'T타워'라는 유토피아가 있었다면, 디스토피아로 'B구역'이 등장한다. 이전의 화재로 크게 불타버린 그곳에 사람들은 '식인귀'가 산다고 말하며, 접근하기를 꺼린다. 하지만 '재'에게 빚을 지고, 삶의 끝에 선 이들에게는 'B구역'보다 '도시'가 더 "지옥"같은 장소였다. 작가는 'B구역'을 통해 우리가 가진 헛된 공포심을 지적하며, 도시의 숨겨진 불완전한 면을 까발린다.
외적으로 볼 때 허약하기 짝이 없는 '재'에게 휘둘리는 '김진우'를 보며 '돈'에 대한 두려움을 느꼈다. 누군가는 '돈'이 종이에 불과하고, 사람들의 신념에 의해서 유지되는 가상적인 존재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름 없는 사람들>에서 '돈'은 막강한 권력의 도구가 되고, 절대적인 복종의 이유가 된다. 돈 때문에 주어지는 범죄의 굴레에서 적극적으로 벗어나 보려고 애쓰거나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없다. 사실 '김진우'의 그런 모습이 못마땅했으나, 그는 다른 선택지가 있음을 알지 못하는 우매한 '을'이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사채업자인 '재'는 절박한 사람들의 두려움과 공포를 교묘히 이용할 줄 아는 '갑'이었다. "재는 세상의 가장자리에서 피를 빨아먹으며 중심가를 향해 거대한 세력을 키워나갔"고, "자신만의 빛나는 타워를 세울 준비를" 했다. 그는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 가장자리에 서있는 자들만을 노린 것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김진우'는 세상의 끝에까지 가야 했고, 그곳에서 비로소 또 다른 시작을 발견한다. 한 쪽에서만 보면 '재'라는 캐릭터만 나쁜 것처럼 비치지만, 그 또한 세상의 어두운 면을 알고 있던 자라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역시나 사람을 극단적인 선택으로 내모는 사회를 비판하지 않을 수가 없다. 세상에 절대적인 악은 없다는 사실을 또 한 번 뼈저리게 깨닫는다.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듯
흔들리던 종소리가 들려오는 듯합니다.
이 소설에 시간을 내주신 모든 분들의 귓가에도
그 소리가 가닿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박영' 작가의 마지막 말에 괜스레 숙연해진다. <이름 없는 사람들>은 누군가의 잘못을 비난하기 위해 쓰였다기 보다,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종을 울리고 있을 사람들을 인지해야 한다,고 말하려는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에게는 이름이 없고, 안정적으로 머물 자리도 소유하고 있지 않다. 이 도시는 그들의 슬픔을 통해 빛나고 있기에, 그들의 삶은 우리와 무관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