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뮈 - 지중해의 태양 아래에서 만난 영원한 이방인 클래식 클라우드 16
최수철 지음 / arte(아르테)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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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작품은 인생의 부조리함을 포착하고, 반항하기를 멈추지 않은 작가 알베르 카뮈의 흔적을 찾아 떠나는 책이다. 그가 나고 자란 알제리와 활발한 작품 활동을 펼쳤던 장소, 프랑스를 포괄하는 여행이다.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는 여러 거장들에 대해 애정이 깊은 전문가들이 써낸 글인데, 각각의 책마다 특유의 스타일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바로 이전에 읽었던 <에리히 프롬>은 교양 심리학 서적 같았는데, <카뮈>는 작가 알베르 카뮈 평론집의 분위기를 강하게 풍긴다. 최수철 작가는 '우리'라는 단어를 반복해 사용해서 독자들에게 함께 여행을 하고 있는듯한 인상을 주었다. 이로써 작품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고, 생생하게 카뮈와 관련된 장소들을 감각할 수 있었다. 또한 카뮈의 작품들을 적재적소에 활용해 또 하나의 새로운 작품집을 만들어냈다. 특히 <카뮈>를 읽기 전에 그의 작품 중 하나인 <이방인>을 완독했기 때문에 더 몰입감 있는 독서를 할 수 있었다. 내 나름대로 선보인 분석과 일치하는 부분을 찾아냈을 때 희열을 느꼈고, 최수철 작가의 시각으로 작품을 새롭게 인식하는 경우도 존재했다. 카빌리, 제밀라 지역 등의 장소에서 발견하는 단서들은 <이방인>뿐 아니라, 알베르 카뮈의 작품들을 제대로 읽어내는 데 유용한 역할을 한다.

도서 <이방인> 깊이 읽기

알베르 카뮈의 대표작인 <이방인>은 제목부터 작가 본인과 닮아있다. 그는 알제리와 프랑스, 집 안, 학교에서 전부 '이방인' 취급을 받았다. 양쪽 모두에 속해있어서, 혼자만 지나치게 똑똑했기 때문에, 혹은 극도로 가난하다는 이유로 그는 무리에 섞이지 못하고, 겉도는 삶을 살았다. 나는 '이방인'이라는 제목이 현생에 잠시 머무르다가 죽음으로 순식간에 돌아가는 인간을 빗대어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카뮈>를 읽다 보니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자신과 무척 닮아있는 특정 개인을 묘사해내려는 의도와 밀접해 보였다. 글을 읽어내는 데 있어 오독이라는 것은 없다는 의견을 피력한 작가 카뮈를 떠올려 본다면, 어느 쪽이 전적으로 옳다고 편을 들 수는 없겠다. 이외에도 "뫼르소는 충동적인 살인으로 자신의 운명에 저항"한다는 해석이 개인적으로 놀라웠다. 나는 같은 장면을 저항이 아닌 어떤 체념, 굴복으로 읽었기 때문이다. "살인의 결과로 겪게 되는 위기에서 물러서지 않음으로써 끝까지 저항한다"라는 바로 뒤 문장에는 공감하는 바지만, 갑작스럽게 아랍인을 살해하는 장면이 어떤 운명에 대한 저항인지 아리송했다. 나약하고 무력한 삶을 살아야만 하는 개인의 운명에 대한 저항의 메타포였을까. 그렇다면 주변에 있었던 모든 대상이 잠재적인 살해의 대상이었던 것일까. 해당 장면에 대해 풀리지 않는 여러 의문들이 남는다.

나와 공통된 시선으로 책을 읽어낸 부분들에서 기쁨을 맛보기도 했다. <이방인>의 뫼르소가 죽음에 이르러서 더 많은 가능성과 삶의 영원성을 인식한다는 부분이나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우는 등의 사회적인 유희에 참여하지 않아 유죄 선고를 받게 되었다는 최수철 작가와 카뮈 본인의 설명은 나를 들뜨게 했다. 작품을 읽어내는 데 있어 정답이라는 것은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랬다.

카뮈 작품의 근원지 : 가난과 죽음

작가 알베르 카뮈는 가난과 죽음에 관해 끝없이 탐구하고, 글을 써내는 사람이었다. <이방인>에서 뫼르소가 사형 선고를 받은 후 죽음에 대해 명징한 깨달음을 얻게 되는 부분에서도 알 수 있다. 그는 죽음이 일종의 부조리라고 여겼고, 이 때문에 인간은 죽음을 인식하되 구애받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간의 유한함을 깨닫고, 기꺼이 죽음을 껴안으려는 시도에서 비로소 젊음을 얻을 수 있고, 자기만의 왕국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관심은 타인에 의해 그것이 결정되는 사형 제도로까지 확대된다. 단두대 위 사형수의 모습을 목격한 카뮈의 아버지는 트라우마에 시달렸고, 카뮈도 같은 악몽에 시달렸다. 아버지의 부재와 그 아버지가 목도한 사형의 부조리함은 카뮈에게 깊은 흔적을 남겼다. 작가 카뮈가 사형의 그릇된 면을 인지하고, 그에 저항하는 삶을 살았던 것은 모든 것을 포용하는 사랑을 중시하는 인물이었던 이유도 있으리란 생각을 한다. 그는 인간적 가치들이 어떤 것보다도 우선되어야 한다고 믿었고, 부조리에서 우리를 구원해줄 사랑의 중요성에 대해 역설했다. 여기에서 사랑은 특정 대상에 대한 단 하나의 사랑이 아니라, 전반적인 인간관계의 중요성을 언급한 것이다. 끝없이 질병과 싸우면서 죽음과 가까워졌다 멀어지는 상황 속에서도 인류애를 잃지 않으려던 작가의 용기가 돋보인다. 그는 연극과 글쓰기를 통해 자아를 재창조하고, 세상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려던 사람이었다.

가난 또한 죽음만큼이나 알베르 카뮈를 이해하는 데 있어 키포인트다. 그는 세계대전으로 아버지를 잃었고, 문맹인 어머니 밑에서 아주 어렵게 자랐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 인생의 거장들이 흔히 그렇듯이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았다. 가난으로부터 오히려 끈기를 배웠다고 믿었고, 자신이 실패하는 원인은 가난에 있지 않다고 여겼다. 그는 가난만이 진정한 깨달음을 제공해준다고 생각했다. 처음에 그도 가난을 회피하려고만 했으나, 이후에는 "자신에게 무상으로 제공된 태양과 바다에 탐닉한다". 태양과 바다와 같은 자연적인 소재는 그의 작품에서도 중요하게 활용되었다. 가난과 죽음에 대한 그의 태도에서도 엿볼 수 있듯 그는 "항상 역경을 극복"하는 사람이었다. 쉼 없이 반항하고 거부하는 삶을 살았던 카뮈는 생전에는 외톨이였으나, 지금 이 책을 읽고 있는 내가 보기에 그는 유일하게 깨어있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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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66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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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르테 출판사에서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를 출간하고 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클림트, 셰익스피어, 모차르트 등의 작품과 인생을 되돌아보는 계기를 제공하는 책을 만드는 작업이다. 나는 작년 11월부터 올해 1월까지 클래식 클라우드 인생 여행단이라는 서포터즈 활동에 참가했고, 1월에 제공받은 도서 <에리히 프롬> 우수 리뷰어로 뽑혔다. 그리고 덕분에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 중 새로 출간된 <카뮈>를 선물 받았다. 작가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다시 읽게 된 건 이런 연유에서다. '이방인'이라는 제목을 들었을 때, 타국에서 제대로 정착된 생활을 영위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떠올렸다. 그러나 카뮈의 작품을 전부 읽고 나면,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모두 이방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가 아무리 발버둥을 치더라도, 끝내는 죽음이라는 판결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결국 짧은 찰나의 생을 스쳐 지나가는 이방인들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작가 카뮈는 <이방인>에서 '뫼르소'라는 캐릭터가 죽음을 마주하는 과정을 통해 내게 저런 생각을 품게 만들었다.

휘청거리며 나아가는 인생

뫼르소는 작품 속에서 흔하게 '아무래도 상관없다'라는 문장을 사용한다. 이는 뫼르소의 평소 성격을 잘 드러내고 있다. 그는 삶을 주체적으로 살기보다 수동적인 자세로 외부의 자극을 받아들인다. 귀찮은 일에 휘말리더라도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무언가에 적극적으로 나서려는 태도를 보이지도 않는다. 또한 타인의 행동에 불편함을 느끼면서도, 딱히 거절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내버려 둔다. 세상 자체에 별 관심이 없는 듯 보였고, 어떠한 야심도 엿보이지 않았다. 나는 뫼르소가 이토록 무감하게 살아나가는 방식이 의지와는 다르게 포기해야만 했던 경험들이 축적된 데서 비롯되었다고 보았다. 비교적 똑똑하고, 세상을 개혁하려는 의지가 가득한 사람이 가정 형편을 이유로 학업을 그만두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들에게는 상식적이고, 일상적인 일보다도 어떠한 방식으로든 내일 생존하는 것이 중요한 법이다. 뫼르소도 이와 다르지 않으리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원체 말하기를 즐기지 않는 그에게서 지금의 성격과 태도가 어디에서 유래했는지를 듣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다음에 읽어볼 <카뮈>(최수철 지음, arte 출판)가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세상을 무력하게, 비틀거리며 살아나가는 것이 늘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누군가는 뫼르소가 양보할 줄 알고, 사람들의 매몰차게 내칠 줄 모르는 순진하고, 착한 성격이라고 긍정적인 면만을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별다른 의견을 내세우지 않고, 타인에게 끌려다니며 사는 삶이 위기 상황에서는 오해의 소지가 되었다. 뫼르소가 받은 재판에서 근본적으로 문제는 검사와 배심원 등에게 있지만, 그가 좀 더 분명하게 행동하고, 자신을 내세울 줄 아는 사람이었더라면, 판결의 방향을 전환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리라는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다. 인간에게는 각자만의 특성이 있고, 무엇이 옳은지에 대해서는 확언할 수 없다. 상황에 따라서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성격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방인>의 작품 세계에서는 뫼르소가 인생에 무감하고, 주도적인 사람이 아니었더라면, 하는 가정을 포기하기가 쉽지 않았다.

진실은 저 너머에

<이방인>은 총 2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뫼르소의 어머니가 죽는 것으로 시작해 그가 살인을 저지르게 되는 것으로 끝난다. 2부에서는 해당 사건에 관한 재판과 판결이 담겨있다. 1부에서 뫼르소라는 캐릭터가 구축되고, 긴장이 고조되다가, 2부에서야 재판 과정을 통해 독자는 어떤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뫼르소에 관한 재판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고 있고, 사건의 진상을 알고 있는 독자로서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별것 아닌 사소한 일들이 부풀려지고, 왜곡되어 확실한 증거처럼 여겨졌다. "마치 여름 하늘 속에 그려진 낯익은 길들이 죄 없는 수면으로 인도해 갈 수도 있고 감옥으로 인도해 갈 수도 있다는 듯이" 범죄를 저지를 만한 인간으로 사람들에게 평가되기 시작한다. 이렇듯 검사의 논점을 벗어난 서술 방식도 문제였으나, 재판 과정 자체에도 결점이 있었다. 재판장에서 변호사와 검사의 대립을 지켜보며 뫼르소는 자신이 배제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한다. 자신의 운명이 결정지어지는 상황에서 스스로 어떠한 의견도 쉬이 내세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또한 "결정의 진지성"이 의심되는 배심원에 의해 '죄인'이라고 낙인이 찍히는 데에 불만을 터뜨린다. 흔들리는 삶을 살아도, 확신과 신념을 지니고 있던 뫼르소의 반항기가 여기에서 비로소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그는 마지막으로 종교적 회개를 강요하는 사제에게 분노를 표출하는 것으로 정점을 찍는다. 스스로가 소유한 모든 것에 대한 확신을 내비치는 것이다. 비록 내적인 폭발이었고, 판결의 결과를 뒤집을 수는 없었으나 뫼르소가 보여준 태도의 변화는 놀라웠다.

검사와 배심원들의 그릇된 판단은 짚고 넘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 검사는 주요 논점(뫼르소의 살인)과 명백한 관련이 없는 증거(뫼르소가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보인 반응)를 들어가며, 죄의 성립을 주장했다. 검사가 내세운 논리가 어긋난 것임을 배심원들도 인지하고 있었다. 어이없어하며 폭소를 내뱉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끝끝내 배심원들은 검사의 화려한 언변에 넘어갔고, 뫼르소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아무래도 살면서 검사보다 배심원의 위치에 설 일이 많을 것이므로, 배심원들이 우매한 결정을 내리는 것에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나 또한 권력자의 말솜씨에 물 흐르듯 넘어가 누군가의 인생을 망치는 데 일조하면서 살아온 것은 아닐까. 법정에서뿐만 아니라, 나는 중요한 순간들에 권위적인 의견에 휘둘리지 않고, 옳은 판단을 내리는 배심원이었을까.

죽음에 이르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

뫼르소는 사형을 언도받고서야 인간은 모두 죄인이며, 벗어날 수 없는 숙명을 가지고 있고, 종국에는 사형을 선고받으리라는 진리를 깨닫는다. 죽음을 직시하고서야 그는 중요한 사실을 깨닫고, 해방감을 획득한다. 여기에서 '이방인'이라는 작품 제목의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우리는 각자의 사명을 다하다가 때가 되면 세상을 떠나가는 이방인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인류가 주인 의식을 가지고, 제멋대로 삶을 영위하며 살아가지만, 우리는 아주 잠시의 시간 동안 삶을 빌려 받아 살다가는 것뿐이다. 누구로부터 대출받은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로써 현 세상을 망치지 않아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뫼르소의 방식대로 생각하다 보면, 삶이 어쩐지 가볍게 여겨지기도 한다. 제대로 설명하기는 불가능하지만, 속박과 오래된 부담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듯한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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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아직 나를 모른다 - 뇌과학과 임상심리학이 부서진 마음에게 전하는 말
허지원 지음 / 홍익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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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에서 저자는 이 책으로 독자들을 설득하려 한다, 고 그 목적을 밝혔다. 우리 나름대로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하며 살지만, 그것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단순하게 정체성을 설정하고, 이를 프레임에 가두고 라벨링 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저자는 여러 번 강조했다. 생각보다 높은 자존감을 지니고 있을 수도 있고, 스스로를 너무 부정적인 감정으로 몰아세우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독자들이 스스로에 대해 그릇된 인식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는 점을 주지시키려는 책인 만큼 색다른 주장들이 여럿 눈에 띄었다. 예를 들어 저자는 높은 자존감이라는 건 유니콘과 같은 허상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대부분의 심리 에세이에서 우리는 높은 자존감을 강요받아왔다. 모두가 자존감이 없다면 인생을 살아가지 못할 것처럼 굴었다. 그래서 <나도 아직 나를 모른다>를 쓴 '허지원' 전문가의 이야기가 무척 생소했다. 하지만 삶을 돌이켜보니 대단한 사람들 사이에서 낮은 자존감을 유지하면서도, 나는 그럭저럭 잘 살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존감이 낮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지만, 썩 괜찮은 인간관계를 유지했고, 나름대로의 성적을 내면서 여태껏 살아왔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높은 자존감은 필수 요소가 아니었다. 저자는 높은 자존감이라는 단어 대신 '상태 자존감'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상황에 따라서 자존감이 유동적으로 변한다는 뜻이다. 항상 높은 자존감을 유지할 필요는 없고, 자존감이 낮을 때는 괜찮은 '척'하면 된다고 조언했다. 처한 상황에 따라 가면을 바꾸면서 사는 건 아주 당연한 일이라는 논리다. 처음에는 이런 이야기를 듣고, 굳이 그렇게까지 가면을 바꿔가며 인간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건가, 싶었다. 개인적으로 솔직함이 관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렇게 밑바닥까지 타인에게 내보이며 애정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고 단언했다. 돌이켜보니 내 자존감이 낮다고 여기저기 퍼뜨리고 다니는 것은 무책임하게 슬픔을 전가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타인에게도 최상의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고, 내 우울을 떠안고 싶지 않을 것이다. 또한 저자는 자존감이 낮았다가 어차피 다시 회복될 일인데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는 없다,라는 의도에서 그런 말을 꺼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상황에 따라 자존감이 낮을 수도 있는 일이지만, 가끔 그럴 땐 자존감에 아무 문제 없는 '척'하면 된다는 말이 꽤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나도 아직 나를 모른다>는 같은 상황을 뇌과학과 임상심리학의 측면에서 두 번 살펴본다. 내 경우에는 뇌과학 부분에서 새삼스럽게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우리가 하는 행동들이 뇌가 그렇게 프로그래밍 되어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무척 흥미로웠다. 예를 들어, 잘되지 않았을 때 남 탓을 한다던가, 그저 흘러가는 구름에서도 의미를 찾으려 하는 것도 뇌의 작용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뇌과학에서 내가 하는 적지 않은 행동들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희망을 발견했다. 당연히 뭐든 지나치면 문제가 된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남 탓을 하기 바쁘고, 상대의 행동 전부에 어떤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여긴다면, 인간관계를 지속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될 게 뻔하다. 하지만 뇌가 일으키는 작용들에 대해 공부하고 나니까, 잘못이라고 생각했던 일들이 진짜로 그렇다고 볼 수 있는지, 모호해졌다. 괜히 특정 행동이 주는 책임을 덜기 위해 그동안 과장되게 해석하고, 그로 인한 슬픔에 빠져왔던 게 아닐까, 자문하기도 했다. 내가 한 행동들이 별게 아니란 걸 마음속으로는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자책하면서 실수나 실패에 대해 변명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책을 읽는 동안 주 양육자인 부모가 아이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저자는 주 양육자가 제공한 원인으로 인해 부정적인 영향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그로부터 분리되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다. 우리는 이제 성장했으니 부모를 원망하는 건 그만두고, 자신을 재양육해줄 누군가를 찾으면 된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나도 개인적으로 특히 어머니에게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 내가 진짜 나인지 아니면 어머니의 축소판인 건지 분간할 수 없는 때가 적지 않았다. 높은 기대치를 갖고 있는 어머니로 인해 번번이 내 꿈을 저지당하거나 기회를 놓치는 때도 있었다. 그래서 원망하고 분노를 느끼는 일에 오랜 시간을 할애했던 적도 있었다. 나도 그런 시간을 통과해온 사람으로서 저자의 말에 동의한다. 놓쳐버린 과거를 안타까워하고, 원인 제공자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내비치면서 살아도 돌아오는 건 자기 파괴뿐이다. 그럴수록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낼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잃게 되고, 트라우마 안에 갇히게 된다. 이렇게 개인적인 경험을 털어놓는 건 저자의 주장을 지지하기 위해 서기도 하고, 내 글을 우연히 읽게 된 누군가가 하루빨리 우울감을 처분할 수 있게 되길 진심으로 바라기 때문이다.

에필로그에서 저자가 했던 말 중 인상 깊었던 구절을 언급하며 글을 마무리할까 한다. "당신을 절망하게 했고 당신이 저주했던 어떤 요인은 당신이 간과한 행운의 일부였습니다". 창의성이 높을수록 우울한 기질을 가진 사람들이 많고, 낮은 자존감을 가진 사람들일수록 세상 앞에 겸손하고, 다른 사람의 슬픔에 쉽게 공감한다. 즉 단점 안에도 분명히 장점이 존재한다.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부정적인 감정들을 한없이 이해하고, 귀 기울여줄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 사람들도 늘 즐겁길 바라고, 타인에게 관심을 갖는 것에도 한계가 반드시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주로 자신을 돌보는 일로 바쁘다. 그러니까 스스로를 긍정적이지 못한 감정들로 쌓은 탑 안에 가두는 건 결국 자기 자신만 아프게 할 뿐이다. 다른 사람들은 당신이 어떤 시기를 지나고 있는지 알 지 못할 수도 있고, 알더라도 깊은 우울을 견디지 못해 떠나가게 되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이제 그만 스스로를 몰아세우고, 저자가 내세운 "되면 좋고, 아니면 말고"식의 인생을 살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스스로를 가두면서 인생의 실수와 실패들에 관한 긴 변명을 늘어놓을 필요 없다. 몇 번이고 넘어져도, '그럭저럭 대충' 괜찮은 인생을 살 수 있다면 그걸로 된 거 아닐까.

글을 쓰다 보니까 타인에게 하는 말들인지, 스스로에게 건네고 싶던 말인지 구분할 수가 없어졌다.

책을 덮고 나니 인생은 참 외로움이나 우울과의 긴 싸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 단어가 주는 절망감과 무력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이렇게 길고 힘든 싸움을 해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태어난 것만으로도 사랑받고, 존중받을 이유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세상에 태어난 이유에 크게 집착하지 않고, 잘 흘려보내면서 하루하루의 전투를 버텨낼 수 있길, 모든 전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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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취향이 완벽하게 일치하는 일은 없겠지만 - 특별한 책 한 권을 고르는 일상의 기록
나란 지음 / 지콜론북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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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과는 다르게 에세이를 읽는 일이 잦아졌다. 인생 선배에게 조언을 듣기 위해서, 내가 가보지 않은 길에 들어선 사람에게 거기는 어떤지 들어보기 위해서, 갖가지의 이유로 에세이 분야의 책을 집어 든다. 보라색과 형광 노란색의 조화가 돋보이는 <우리 취향이 완벽하게 일치하는 일은 없겠지만>은 내가 꿈꾸는 길 위에 서 있는 사람의 삶이 궁금해 읽게 되었다. 이 책의 저자는 성북동에서 인사동으로 이전한 큐레이팅 서점 부쿠에서 북 큐레이터로 활동한 경력이 있다. 북 큐레이터라는 직업의 정확한 정의가 무엇인지 설명하기 어렵고, 공식적인 아카데미는 당연히 찾아볼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러나 막연히 그녀가 나아간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에 조금은 절박한 심정으로 책을 펼쳐들었다.

북 큐레이터를 해보고 싶다는 나름의 소망을 내보이면, 되돌아오는 반응은 비슷하다 : "그게 뭔데", 라거나 "그거 해서 뭐 먹고 살 건데?" 사실 돈에 매이는 삶을 살아서는 안된다면서도, 적지 않은 양의 물질을 생산해낼 수 없는 꿈은 타인에게 컨펌을 얻어낼 수 없다. 북 큐레이터처럼 종종 돈이 되지 않는 목표를 세우던 나는 이전에도 저런 질문들을 수없이 받았다. 나는 예술을 좋아하던 아이였고, 예술은 불확실성이나 배고픔으로 연결되는 일이 잦기 때문이다. 사람들, 주로 부모의 압박에 우물쭈물거리던 나는 먹고살기 어려운 꿈들을 놓치며 살아왔다. '나란' 작가는 서점 일도 부와는 거리가 멀다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돈 때문에 서점하는 거 아니니까. 떡볶이 사 먹으려고 책 파는 거 아니니까"라고 당당하게 외친다. '가치 창출 전문가'로서의 북 큐레이터라는 직업에 대한 확신과 그것이 주는 기쁨을 아는 자만이 내뱉을 수 있는 포효였다. 또 그녀는 "만족이나 보람, 기쁨 따위를 쥐여주는 일이라면 그건 가성비가 꽤 좋은 일이 맞다"라고 말했다. 일정 이상의 수익을 낼 필요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정신적인 충만함을 제공하는 일을 찾아야 오랫동안 견지할 수 있다는 확신을 주는 문장이었다. 이렇게 나는 또 굴하지 않고, 북 큐레이터로서의 인생을 꿈꿀 이유를 찾아냈다.

"세상이 넓은 것에 비해 책 읽는 사람들의 세계는 좁다. 우울한 현실이지만 동시에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덕분에 우리는 언젠가 만나게 될 테니. 우연이 아닌 필연으로서."

책덕후들의 세계는 실제로도 좁은 편이다. SNS로 책에 대한 애정을 표출하면서 겪은 경험을 통해 깨달은 바다. 그러니 당신이 책에 열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우리의 인생 속에서 언젠가 한 번쯤은 스쳐갔을지도 모른다. 혹은 가까운 미래에 우연히 서로를 발견하게 될 가능성도 있다. 우리가 마주친 멀지 않은 미래에 내가 당신에게 멋진 책을 한 권 추천해줄 수 있는 큐레이터로 성장해 있다면 좋겠다. '우리 취향이 완벽하게 일치하는 일은 없겠지만'서도, 책이라는 공통의 취향을 가지고 있으므로, 분명히 만나게 되리라는 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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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의 삶 (어나더커버 특별판) - 제4회 문학동네 대학소설상 수상작
임솔아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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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의 삶>에서 등장한 강이, 소영, 아람을 보면서 내 삶 속에도 존재했을 그들을 떠올렸다. 어른들에게 소위 날라리라고 불렸던 그들은 학교에서 철저히 외부인 취급을 받았고, 함께 놀아서는 안 되는 아이들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어린 나의 눈엔 그들이야말로 세상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난 세상에 삐딱한 시선을 유지하면서도, 절대로 어른들이 그어놓은 선 밖으로 벗어나는 일은 없었지만, 그들은 자유로워 보였으므로 항상 선망의 대상이었다. 당시에 그들과 무척 어울리고 싶어 하던 기억이 있는데, 나는 받아들여진 적이 없었다. 그 아이들도 세상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나의 태도를 알아차렸던 것이다. 임솔아 작가의 작품을 읽고 나서야 비로소 내 삶을 스쳐간 강이, 소영, 아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외부인 취급을 받는 서로를 향한 유대와 지워지지 않는 외로움을 실감했다. 게다가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꿈을 좇겠다는 의지를 강력히 표시하는 소영이나, 부모의 지나친 다정함에 중압감을 느끼는 강이, 길가에 버려진 것들 모두에게서 자신을 발견하는 아람, 세 아이는 나와 닮은 구석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소설 속 아이들의 삶을 객관적으로 보기가 어려웠다. 때로는 언니로, 또 엄마 같은 마음으로 아이들의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내가 도울 수 있는 게 없어 자주 안타까웠고, 벼랑 끝에 서 있는 아이들을 보호하지 못하는 사회에 분노가 일었다.

강이, 소영, 아람은 이른바 가출 청소년들이다. 누군가는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꿈에 대한 지원을 얻기 위해서, 또 누군가는 그저 친구를 따라서 집을 떠났다. 머물 곳이 없어 아파트 계단이나 장애인 화장실을 이용하곤 했다. 아이들이 바라는 건 "무인 정산기"와 같은 어른이었다고 생각한다. 자신들을 반가워하고, 꼬박꼬박 존댓말을 쓰고, 질문을 하지 않는 어른들. 평소의 아이들은 상대의 질문에 대답을 하면, 그에 따른 보상이나 벌을 받는 위치에 있었다. 그래서 자신들을 동등하게 대해줄 어른이 필요했던 것이다. 부모의 입장에서는 아이를 아낀다고 하는 일이 본인에게는 큰 부담이 되기도 했다. 특히 강이라는 캐릭터가 그랬다. 강이의 엄마는 강이로 인해 "죽음에 내몰린 약자"가 된 것처럼 행동해서, 아이를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려고 시도했다. 명목상으로는 자식을 위하는 일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는 강이를 집 밖으로 내몬다. 강이는 너무도 안정적인 집을 두고, 자꾸만 멀리, 모르는 곳으로 나아가고 싶어 했다. 그러니까 결국에 아이들이 바라던 건 자아를 성립하고 유지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었다. 부모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서 자신만의 삶을 꾸려나가고 싶었던 것이다. 어른은 아이를 지도한다는 이유로 그들의 삶에 관여하기를 멈추지 않았지만, 아이들은 스스로와의 싸움을 거듭해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어른들이 도울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강이가 내뱉었던 말들 중 "병신 같지 않은 누구나가 되고 싶을 뿐이었다. 무인 모텔의 누구나 같은, 그런 누구나가 되고 싶을 뿐이었다(43p)"라는 대목에서 아이들은 그저 하나의 평범한 인간이 되고자 하며, 아이의 세상에 간섭하는 일은 어른의 지나친 욕심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자꾸 밖으로 나돌기만 하느냐고 아이들을 다그치기 이전에, 아이를 옥죄고 있으면서 모르고 지나쳤던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할 성싶다.


책의 제목만 보았을 때는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삶을 살아내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책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작품에서 주요 화자인 강이의 인생을 보니까 내가 이토록 최악까지 밀려나 본 적이 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강이처럼 세상의 끝에서 좀 더 나빠지는 것으로 더 나아지려는 사람들이 있다. 처음엔 이게 무슨 말이지, 싶은데, 이해하고 나면 씻어낼 수 없는 슬픔이 밀려온다. 어차피 상황은 나아지지 못할 것이므로, 일을 악화시켜서 위안을 얻어내는 것이다. 그들에겐 "최악의 상황이 유일한 출구"이다. 때로는 자신을 괴롭혔던 사람들에게 그들도 대항을 한다. 발버둥을 치지 않으면, 트라우마로부터 영영 벗어날 수 없을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들이 처한 환경에 무감하게 반응할 뿐이다. 또 벼랑 끝에 매달린 사람들에게 좋지 않은 상황을 완전히 타개할 수 있을만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저 "또 다른 악몽과 그 악몽을 벗어나려는 또 다른 기도만이 시작될 것이다". 더 나쁜 상황을 기꺼이 만들어내서 자신들의 메워지지 않을 슬픔을 메꾸면서 살아가는 것. 아아, 그것만이 그들의 최선이었다. 세상의 아주 끝까지 밀려나본 적도 없으면서 슬픔과 절망, 외로움 등의 단어를 서슴없이 꺼내놓는 스스로가 위선적으로까지 느껴진다. 내가 최선을 다해서 삶을 살아왔다고 말할 자신이 없어졌다. 살면서 세상이 그어놓은 선 밖으로 한 번도 벗어나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실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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