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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66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19년 9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르테 출판사에서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를 출간하고 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클림트, 셰익스피어, 모차르트 등의 작품과 인생을 되돌아보는 계기를 제공하는 책을 만드는 작업이다. 나는 작년 11월부터 올해 1월까지 클래식 클라우드 인생 여행단이라는 서포터즈 활동에 참가했고, 1월에 제공받은 도서 <에리히 프롬> 우수 리뷰어로 뽑혔다. 그리고 덕분에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 중 새로 출간된 <카뮈>를 선물 받았다. 작가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다시 읽게 된 건 이런 연유에서다. '이방인'이라는 제목을 들었을 때, 타국에서 제대로 정착된 생활을 영위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떠올렸다. 그러나 카뮈의 작품을 전부 읽고 나면,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모두 이방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가 아무리 발버둥을 치더라도, 끝내는 죽음이라는 판결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결국 짧은 찰나의 생을 스쳐 지나가는 이방인들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작가 카뮈는 <이방인>에서 '뫼르소'라는 캐릭터가 죽음을 마주하는 과정을 통해 내게 저런 생각을 품게 만들었다.
휘청거리며 나아가는 인생
뫼르소는 작품 속에서 흔하게 '아무래도 상관없다'라는 문장을 사용한다. 이는 뫼르소의 평소 성격을 잘 드러내고 있다. 그는 삶을 주체적으로 살기보다 수동적인 자세로 외부의 자극을 받아들인다. 귀찮은 일에 휘말리더라도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무언가에 적극적으로 나서려는 태도를 보이지도 않는다. 또한 타인의 행동에 불편함을 느끼면서도, 딱히 거절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내버려 둔다. 세상 자체에 별 관심이 없는 듯 보였고, 어떠한 야심도 엿보이지 않았다. 나는 뫼르소가 이토록 무감하게 살아나가는 방식이 의지와는 다르게 포기해야만 했던 경험들이 축적된 데서 비롯되었다고 보았다. 비교적 똑똑하고, 세상을 개혁하려는 의지가 가득한 사람이 가정 형편을 이유로 학업을 그만두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들에게는 상식적이고, 일상적인 일보다도 어떠한 방식으로든 내일 생존하는 것이 중요한 법이다. 뫼르소도 이와 다르지 않으리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원체 말하기를 즐기지 않는 그에게서 지금의 성격과 태도가 어디에서 유래했는지를 듣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다음에 읽어볼 <카뮈>(최수철 지음, arte 출판)가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세상을 무력하게, 비틀거리며 살아나가는 것이 늘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누군가는 뫼르소가 양보할 줄 알고, 사람들의 매몰차게 내칠 줄 모르는 순진하고, 착한 성격이라고 긍정적인 면만을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별다른 의견을 내세우지 않고, 타인에게 끌려다니며 사는 삶이 위기 상황에서는 오해의 소지가 되었다. 뫼르소가 받은 재판에서 근본적으로 문제는 검사와 배심원 등에게 있지만, 그가 좀 더 분명하게 행동하고, 자신을 내세울 줄 아는 사람이었더라면, 판결의 방향을 전환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리라는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다. 인간에게는 각자만의 특성이 있고, 무엇이 옳은지에 대해서는 확언할 수 없다. 상황에 따라서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성격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방인>의 작품 세계에서는 뫼르소가 인생에 무감하고, 주도적인 사람이 아니었더라면, 하는 가정을 포기하기가 쉽지 않았다.
진실은 저 너머에
<이방인>은 총 2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뫼르소의 어머니가 죽는 것으로 시작해 그가 살인을 저지르게 되는 것으로 끝난다. 2부에서는 해당 사건에 관한 재판과 판결이 담겨있다. 1부에서 뫼르소라는 캐릭터가 구축되고, 긴장이 고조되다가, 2부에서야 재판 과정을 통해 독자는 어떤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뫼르소에 관한 재판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고 있고, 사건의 진상을 알고 있는 독자로서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별것 아닌 사소한 일들이 부풀려지고, 왜곡되어 확실한 증거처럼 여겨졌다. "마치 여름 하늘 속에 그려진 낯익은 길들이 죄 없는 수면으로 인도해 갈 수도 있고 감옥으로 인도해 갈 수도 있다는 듯이" 범죄를 저지를 만한 인간으로 사람들에게 평가되기 시작한다. 이렇듯 검사의 논점을 벗어난 서술 방식도 문제였으나, 재판 과정 자체에도 결점이 있었다. 재판장에서 변호사와 검사의 대립을 지켜보며 뫼르소는 자신이 배제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한다. 자신의 운명이 결정지어지는 상황에서 스스로 어떠한 의견도 쉬이 내세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또한 "결정의 진지성"이 의심되는 배심원에 의해 '죄인'이라고 낙인이 찍히는 데에 불만을 터뜨린다. 흔들리는 삶을 살아도, 확신과 신념을 지니고 있던 뫼르소의 반항기가 여기에서 비로소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그는 마지막으로 종교적 회개를 강요하는 사제에게 분노를 표출하는 것으로 정점을 찍는다. 스스로가 소유한 모든 것에 대한 확신을 내비치는 것이다. 비록 내적인 폭발이었고, 판결의 결과를 뒤집을 수는 없었으나 뫼르소가 보여준 태도의 변화는 놀라웠다.
검사와 배심원들의 그릇된 판단은 짚고 넘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 검사는 주요 논점(뫼르소의 살인)과 명백한 관련이 없는 증거(뫼르소가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보인 반응)를 들어가며, 죄의 성립을 주장했다. 검사가 내세운 논리가 어긋난 것임을 배심원들도 인지하고 있었다. 어이없어하며 폭소를 내뱉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끝끝내 배심원들은 검사의 화려한 언변에 넘어갔고, 뫼르소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아무래도 살면서 검사보다 배심원의 위치에 설 일이 많을 것이므로, 배심원들이 우매한 결정을 내리는 것에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나 또한 권력자의 말솜씨에 물 흐르듯 넘어가 누군가의 인생을 망치는 데 일조하면서 살아온 것은 아닐까. 법정에서뿐만 아니라, 나는 중요한 순간들에 권위적인 의견에 휘둘리지 않고, 옳은 판단을 내리는 배심원이었을까.
죽음에 이르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
뫼르소는 사형을 언도받고서야 인간은 모두 죄인이며, 벗어날 수 없는 숙명을 가지고 있고, 종국에는 사형을 선고받으리라는 진리를 깨닫는다. 죽음을 직시하고서야 그는 중요한 사실을 깨닫고, 해방감을 획득한다. 여기에서 '이방인'이라는 작품 제목의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우리는 각자의 사명을 다하다가 때가 되면 세상을 떠나가는 이방인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인류가 주인 의식을 가지고, 제멋대로 삶을 영위하며 살아가지만, 우리는 아주 잠시의 시간 동안 삶을 빌려 받아 살다가는 것뿐이다. 누구로부터 대출받은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로써 현 세상을 망치지 않아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뫼르소의 방식대로 생각하다 보면, 삶이 어쩐지 가볍게 여겨지기도 한다. 제대로 설명하기는 불가능하지만, 속박과 오래된 부담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듯한 느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