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아직 나를 모른다 - 뇌과학과 임상심리학이 부서진 마음에게 전하는 말
허지원 지음 / 홍익 / 2018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서문에서 저자는 이 책으로 독자들을 설득하려 한다, 고 그 목적을 밝혔다. 우리 나름대로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하며 살지만, 그것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단순하게 정체성을 설정하고, 이를 프레임에 가두고 라벨링 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저자는 여러 번 강조했다. 생각보다 높은 자존감을 지니고 있을 수도 있고, 스스로를 너무 부정적인 감정으로 몰아세우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독자들이 스스로에 대해 그릇된 인식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는 점을 주지시키려는 책인 만큼 색다른 주장들이 여럿 눈에 띄었다. 예를 들어 저자는 높은 자존감이라는 건 유니콘과 같은 허상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대부분의 심리 에세이에서 우리는 높은 자존감을 강요받아왔다. 모두가 자존감이 없다면 인생을 살아가지 못할 것처럼 굴었다. 그래서 <나도 아직 나를 모른다>를 쓴 '허지원' 전문가의 이야기가 무척 생소했다. 하지만 삶을 돌이켜보니 대단한 사람들 사이에서 낮은 자존감을 유지하면서도, 나는 그럭저럭 잘 살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존감이 낮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지만, 썩 괜찮은 인간관계를 유지했고, 나름대로의 성적을 내면서 여태껏 살아왔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높은 자존감은 필수 요소가 아니었다. 저자는 높은 자존감이라는 단어 대신 '상태 자존감'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상황에 따라서 자존감이 유동적으로 변한다는 뜻이다. 항상 높은 자존감을 유지할 필요는 없고, 자존감이 낮을 때는 괜찮은 '척'하면 된다고 조언했다. 처한 상황에 따라 가면을 바꾸면서 사는 건 아주 당연한 일이라는 논리다. 처음에는 이런 이야기를 듣고, 굳이 그렇게까지 가면을 바꿔가며 인간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건가, 싶었다. 개인적으로 솔직함이 관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렇게 밑바닥까지 타인에게 내보이며 애정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고 단언했다. 돌이켜보니 내 자존감이 낮다고 여기저기 퍼뜨리고 다니는 것은 무책임하게 슬픔을 전가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타인에게도 최상의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고, 내 우울을 떠안고 싶지 않을 것이다. 또한 저자는 자존감이 낮았다가 어차피 다시 회복될 일인데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는 없다,라는 의도에서 그런 말을 꺼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상황에 따라 자존감이 낮을 수도 있는 일이지만, 가끔 그럴 땐 자존감에 아무 문제 없는 '척'하면 된다는 말이 꽤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나도 아직 나를 모른다>는 같은 상황을 뇌과학과 임상심리학의 측면에서 두 번 살펴본다. 내 경우에는 뇌과학 부분에서 새삼스럽게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우리가 하는 행동들이 뇌가 그렇게 프로그래밍 되어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무척 흥미로웠다. 예를 들어, 잘되지 않았을 때 남 탓을 한다던가, 그저 흘러가는 구름에서도 의미를 찾으려 하는 것도 뇌의 작용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뇌과학에서 내가 하는 적지 않은 행동들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희망을 발견했다. 당연히 뭐든 지나치면 문제가 된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남 탓을 하기 바쁘고, 상대의 행동 전부에 어떤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여긴다면, 인간관계를 지속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될 게 뻔하다. 하지만 뇌가 일으키는 작용들에 대해 공부하고 나니까, 잘못이라고 생각했던 일들이 진짜로 그렇다고 볼 수 있는지, 모호해졌다. 괜히 특정 행동이 주는 책임을 덜기 위해 그동안 과장되게 해석하고, 그로 인한 슬픔에 빠져왔던 게 아닐까, 자문하기도 했다. 내가 한 행동들이 별게 아니란 걸 마음속으로는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자책하면서 실수나 실패에 대해 변명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책을 읽는 동안 주 양육자인 부모가 아이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저자는 주 양육자가 제공한 원인으로 인해 부정적인 영향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그로부터 분리되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다. 우리는 이제 성장했으니 부모를 원망하는 건 그만두고, 자신을 재양육해줄 누군가를 찾으면 된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나도 개인적으로 특히 어머니에게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 내가 진짜 나인지 아니면 어머니의 축소판인 건지 분간할 수 없는 때가 적지 않았다. 높은 기대치를 갖고 있는 어머니로 인해 번번이 내 꿈을 저지당하거나 기회를 놓치는 때도 있었다. 그래서 원망하고 분노를 느끼는 일에 오랜 시간을 할애했던 적도 있었다. 나도 그런 시간을 통과해온 사람으로서 저자의 말에 동의한다. 놓쳐버린 과거를 안타까워하고, 원인 제공자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내비치면서 살아도 돌아오는 건 자기 파괴뿐이다. 그럴수록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낼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잃게 되고, 트라우마 안에 갇히게 된다. 이렇게 개인적인 경험을 털어놓는 건 저자의 주장을 지지하기 위해 서기도 하고, 내 글을 우연히 읽게 된 누군가가 하루빨리 우울감을 처분할 수 있게 되길 진심으로 바라기 때문이다.

에필로그에서 저자가 했던 말 중 인상 깊었던 구절을 언급하며 글을 마무리할까 한다. "당신을 절망하게 했고 당신이 저주했던 어떤 요인은 당신이 간과한 행운의 일부였습니다". 창의성이 높을수록 우울한 기질을 가진 사람들이 많고, 낮은 자존감을 가진 사람들일수록 세상 앞에 겸손하고, 다른 사람의 슬픔에 쉽게 공감한다. 즉 단점 안에도 분명히 장점이 존재한다.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부정적인 감정들을 한없이 이해하고, 귀 기울여줄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 사람들도 늘 즐겁길 바라고, 타인에게 관심을 갖는 것에도 한계가 반드시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주로 자신을 돌보는 일로 바쁘다. 그러니까 스스로를 긍정적이지 못한 감정들로 쌓은 탑 안에 가두는 건 결국 자기 자신만 아프게 할 뿐이다. 다른 사람들은 당신이 어떤 시기를 지나고 있는지 알 지 못할 수도 있고, 알더라도 깊은 우울을 견디지 못해 떠나가게 되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이제 그만 스스로를 몰아세우고, 저자가 내세운 "되면 좋고, 아니면 말고"식의 인생을 살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스스로를 가두면서 인생의 실수와 실패들에 관한 긴 변명을 늘어놓을 필요 없다. 몇 번이고 넘어져도, '그럭저럭 대충' 괜찮은 인생을 살 수 있다면 그걸로 된 거 아닐까.

글을 쓰다 보니까 타인에게 하는 말들인지, 스스로에게 건네고 싶던 말인지 구분할 수가 없어졌다.

책을 덮고 나니 인생은 참 외로움이나 우울과의 긴 싸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 단어가 주는 절망감과 무력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이렇게 길고 힘든 싸움을 해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태어난 것만으로도 사랑받고, 존중받을 이유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세상에 태어난 이유에 크게 집착하지 않고, 잘 흘려보내면서 하루하루의 전투를 버텨낼 수 있길, 모든 전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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