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의 삶 (어나더커버 특별판) - 제4회 문학동네 대학소설상 수상작
임솔아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7월
평점 :
품절


<최선의 삶>에서 등장한 강이, 소영, 아람을 보면서 내 삶 속에도 존재했을 그들을 떠올렸다. 어른들에게 소위 날라리라고 불렸던 그들은 학교에서 철저히 외부인 취급을 받았고, 함께 놀아서는 안 되는 아이들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어린 나의 눈엔 그들이야말로 세상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난 세상에 삐딱한 시선을 유지하면서도, 절대로 어른들이 그어놓은 선 밖으로 벗어나는 일은 없었지만, 그들은 자유로워 보였으므로 항상 선망의 대상이었다. 당시에 그들과 무척 어울리고 싶어 하던 기억이 있는데, 나는 받아들여진 적이 없었다. 그 아이들도 세상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나의 태도를 알아차렸던 것이다. 임솔아 작가의 작품을 읽고 나서야 비로소 내 삶을 스쳐간 강이, 소영, 아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외부인 취급을 받는 서로를 향한 유대와 지워지지 않는 외로움을 실감했다. 게다가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꿈을 좇겠다는 의지를 강력히 표시하는 소영이나, 부모의 지나친 다정함에 중압감을 느끼는 강이, 길가에 버려진 것들 모두에게서 자신을 발견하는 아람, 세 아이는 나와 닮은 구석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소설 속 아이들의 삶을 객관적으로 보기가 어려웠다. 때로는 언니로, 또 엄마 같은 마음으로 아이들의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내가 도울 수 있는 게 없어 자주 안타까웠고, 벼랑 끝에 서 있는 아이들을 보호하지 못하는 사회에 분노가 일었다.

강이, 소영, 아람은 이른바 가출 청소년들이다. 누군가는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꿈에 대한 지원을 얻기 위해서, 또 누군가는 그저 친구를 따라서 집을 떠났다. 머물 곳이 없어 아파트 계단이나 장애인 화장실을 이용하곤 했다. 아이들이 바라는 건 "무인 정산기"와 같은 어른이었다고 생각한다. 자신들을 반가워하고, 꼬박꼬박 존댓말을 쓰고, 질문을 하지 않는 어른들. 평소의 아이들은 상대의 질문에 대답을 하면, 그에 따른 보상이나 벌을 받는 위치에 있었다. 그래서 자신들을 동등하게 대해줄 어른이 필요했던 것이다. 부모의 입장에서는 아이를 아낀다고 하는 일이 본인에게는 큰 부담이 되기도 했다. 특히 강이라는 캐릭터가 그랬다. 강이의 엄마는 강이로 인해 "죽음에 내몰린 약자"가 된 것처럼 행동해서, 아이를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려고 시도했다. 명목상으로는 자식을 위하는 일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는 강이를 집 밖으로 내몬다. 강이는 너무도 안정적인 집을 두고, 자꾸만 멀리, 모르는 곳으로 나아가고 싶어 했다. 그러니까 결국에 아이들이 바라던 건 자아를 성립하고 유지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었다. 부모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서 자신만의 삶을 꾸려나가고 싶었던 것이다. 어른은 아이를 지도한다는 이유로 그들의 삶에 관여하기를 멈추지 않았지만, 아이들은 스스로와의 싸움을 거듭해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어른들이 도울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강이가 내뱉었던 말들 중 "병신 같지 않은 누구나가 되고 싶을 뿐이었다. 무인 모텔의 누구나 같은, 그런 누구나가 되고 싶을 뿐이었다(43p)"라는 대목에서 아이들은 그저 하나의 평범한 인간이 되고자 하며, 아이의 세상에 간섭하는 일은 어른의 지나친 욕심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자꾸 밖으로 나돌기만 하느냐고 아이들을 다그치기 이전에, 아이를 옥죄고 있으면서 모르고 지나쳤던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할 성싶다.


책의 제목만 보았을 때는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삶을 살아내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책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작품에서 주요 화자인 강이의 인생을 보니까 내가 이토록 최악까지 밀려나 본 적이 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강이처럼 세상의 끝에서 좀 더 나빠지는 것으로 더 나아지려는 사람들이 있다. 처음엔 이게 무슨 말이지, 싶은데, 이해하고 나면 씻어낼 수 없는 슬픔이 밀려온다. 어차피 상황은 나아지지 못할 것이므로, 일을 악화시켜서 위안을 얻어내는 것이다. 그들에겐 "최악의 상황이 유일한 출구"이다. 때로는 자신을 괴롭혔던 사람들에게 그들도 대항을 한다. 발버둥을 치지 않으면, 트라우마로부터 영영 벗어날 수 없을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들이 처한 환경에 무감하게 반응할 뿐이다. 또 벼랑 끝에 매달린 사람들에게 좋지 않은 상황을 완전히 타개할 수 있을만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저 "또 다른 악몽과 그 악몽을 벗어나려는 또 다른 기도만이 시작될 것이다". 더 나쁜 상황을 기꺼이 만들어내서 자신들의 메워지지 않을 슬픔을 메꾸면서 살아가는 것. 아아, 그것만이 그들의 최선이었다. 세상의 아주 끝까지 밀려나본 적도 없으면서 슬픔과 절망, 외로움 등의 단어를 서슴없이 꺼내놓는 스스로가 위선적으로까지 느껴진다. 내가 최선을 다해서 삶을 살아왔다고 말할 자신이 없어졌다. 살면서 세상이 그어놓은 선 밖으로 한 번도 벗어나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실감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