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인생의 이야기
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 엘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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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테드 창의 작품 세계에 크게 매료된 것은 작년에 <숨>이라는 작품집을 읽은 후부터다. 그의 소설을 읽고서는 이전에 내가 알고 있던 SF 소설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한탄하게 되었다. 테드 창은 자신의 작품뿐 아니라, 독자로서 SF에 대해 느끼던 심리적 장벽을 허물어 뜨렸다. 작년에 출간된 <숨>이라는 작품집에서는 내가 맞닥뜨리게 될지도 모를 미래를 엿보는 느낌이었다. 인간으로서 내가 가지고 있는 미래지향적인 가능성에 들뜬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개인적인 상상력의 결핍으로 도달하지 못하면서도, 그토록 갈망하던 미래를 내다보는 일은 중독적인 종류의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온라인 서점의 장바구니에 가득 쌓인 책들 중에서 제일 먼저 테드 창의 소설을 골라냈다. 하지만 <당신 인생의 이야기>는 지난번에 내게 잊지 못할 희열을 건네주었던 <숨>과는 다른 결을 지녔다. 절대 이 기분을 실망감이라고 표현할 수는 없다. 테드 창은 과학적 사고에 철학적인 의문을 곁들이면서 그 누구보다도 독자의 지적인 충만에 대한 열망을 채워줄 줄 아는 작가다. 그런 그의 작품을 읽고 비탄에 빠지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대신에 <당신 인생의 이야기>는 가능성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한계에 주목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신에게 가닿기를 희망한 인간들이 건설한 '바빌론의 탑'이 헛된 희망이었던 것처럼 내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끝내 넘지 못하는 선이 있으리란 예감에 휩싸이고야 만다.

 

인간이 본래 속한 세상을 비약적으로 뛰어넘어 다른 차원에 도달하는 데 번번이 실패하고야 마는 것은 '선입견'으로부터 기인한 바가 크다. '선입견'은 지금 가진 것 이상의 것을 꿈꾸는 일을 가로막는다. 작가 테드 창은 <이해>에서 '리언'을 통해 지능의 한계에 관해 의문을 품고, 현재의 세계에서 탈피하려는 욕구를 내보인다. 하지만 <바빌론의 탑>에서 앞으로 나아간 듯하다가 다시 출발점으로 되돌아오는 서사를 통해 인간의 위치를 여실히 깨닫게 만들기도 한다. '메타 인류'의 기술을 '해석'하는 위치에 고정되거나(<인류 과학의 진화>), 신의 의지대로 삶의 향로가 정해지면서도 신을 사랑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인간(<지옥은 신의 부재>)은 수동적이고, 무기력하다. 이는 인간의 한계를 설정하는 일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이번 작품들을 읽는 내내 세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직감에 휩싸였다. 끝내는 도달하고야 말 결론을 알아내지 못한 채 피상적인 원인에 극도로 집착하며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나는 결국 선입견에 사로잡힌 채 스스로 믿고 있는 것이 전부라고 여기면서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있는 것이다. 인간으로서 내가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사실이 뼈저리게 느껴지는 작품집이었다.

 

<지옥은 신의 부재>에서 인간의 자율적인 의지를 강조하는 '휴머니스트'나 <외모 지상주의에 관한 소고>에서 '칼리아그노시아'를 거부하고, 교육을 통해 성장하여 외모에 관해 자발적으로 올바른 시각을 지니려는 사람들의 등장은 한편으로 희망차다. 이들은 일종의 "테크놀로지에 의한 지름길"을 추구하지 않고, 개인적 의지에 따라 삶을 개척하려는 시도를 한다. 이미 정해진 항로가 존재하는지도 모르지만, 이를 인정하되 지나치게 얽매이지 않고 세상을 명징하게 인식하며 의지대로 나아가기 위해 분투하는 인간의 지속적인 노력은 그 나름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자유 의지의 부재와 이미 정해진 목적지의 존재는 강한 열망을 지닌 인간들에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공상과학 소설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인간으로서의 하잘것없음에 대한 인식은 우선적으로 현실에 충실하자는 다짐에 의해 상쇄되고야 만다. 내가 여러 SF 소설을 읽으면서 마주한 다양한 가능성이 그저 공상에 불과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좌절하지 않고 선입견에 사로잡힌 채 묵묵히 현재에만 몰두해 살아나가는 것은 인간이기에 지닐 수 있는 고유한 장점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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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 상위 1퍼센트의 비밀 (리커버 에디션) - 신호를 차단하고 깊이 몰입하라
정주영 지음 / 한국경제신문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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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계발서를 지독히도 싫어하던 시기가 있었다. 서로 다른 듯 닮아 있는 내용이 지겨웠다. 더욱이 작품에서 내포하는 교훈은 이미 내가 다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몰라서 내 인생에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는 게 아니라, 인지가 실천으로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자기 계발서에 적힌 글은 환상을 심어주려는 동화에 가깝고, 나 자신이야말로 세상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고 믿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때의 나는 불평하고, 슬픔에 잠식되기를 즐기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삶이 나아지지 못하는 것은 뻔한 내용을 읊는 작가들의 탓이라고 여기던 때가 있었다. <하버드 상위 1퍼센트의 비밀>에서 정주영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도 대부분의 독자에게 이미 익숙한 내용이리라는 생각을 한다. 타인의 평가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에게 몰입하여 진실된 성장을 이루어내는 것. 이전에 읽었던 작가 조 볼러의 <언락>과도 결이 같은 책이다. 지금의 나는 이전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작품들에서 극적인 변화를 실감한다. 현재를 뒤바꾸고자 하는 의지로 생각은 복잡해지고, 몸은 분주해진다. 그들이 보내는 긍정적인 신호를 하나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책에 써진 말대로 살아가고 있는지 스스로를 점검한다.

<하버드 상위 1퍼센트의 비밀>을 통해 과거의 나 자신을 조우하고, 좀 더 이해하는 계기를 얻을 수 있었다. 내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순간들이 책을 읽다가 퍼뜩 떠오르기도 했다. 어린 나를 움츠러들게 만들었던 어른들을 원망하고, 헛된 후회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의 나인 채로 돌아갈 수 없는 거라면, 냉정하게 별 소용이 없으리란 생각을 한다. 또다시 과거를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더라도, 나는 여전히 소심하게 타인의 시선에 구애받으며 자라날 것이고, 그러다 때로는 인생을 망쳐 버리기도 할 것이다. 그러니 어른들의 잘못을 기억에 새기고, 나는 그들보다 더 나은 어른이자 부모가 될 다짐을 해본다. 이런 결심을 세울 때마다 나와 똑같이 훌륭한 육아에 대한 의지를 불태웠을 어머니를 떠올린다. 어머니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구매했던 책을 아직도 보관하고 있는데, 그 책장에는 아이의 교육에 관한 작품이 잔뜩 쌓여있다. 정신없이 흘러가는 나날 속에서 어머니의 간접적인 배움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육아뿐 아니라, 다른 여러 면에서도 참 책에서 배운 대로 살아지지 않는 게 인생인 듯하다. 나는 이번 책에서 배운 '간격 효과'라든지 '외부 신호 차단'의 이야기에 감격하고, 실제 삶에 적용할 계획을 세웠지만, 또 수없이 잊어버리고, 어긋나고야 말 것이다. 관성의 법칙에 따라 나는 내가 해낼 수 있는 일들에 또 두려움을 느끼고, 타인이 원하는 대로 저만치 물러나리란 생각을 한다.

내가 원하는 만큼의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하리란 불안함이 있긴 하지만, 이 책을 읽는 동안 삶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할 수 있었다. 지하철 안에서 나는 오랫동안 연구하고 싶은 주제를 깊게 고민했고, 내가 앞으로 살아나갈 날들에 대한 희망을 감지하곤 했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으나 그런 순간들이 존재했기에 오늘 하루를 버텨낼 수 있었고, 그런 경험이 지속적으로 쌓여 상상조차 못했던 미래가 만들어지리란 기대를 한다. 그러니 이 글을 읽는 당신도 내가 읽은 책을 읽어보면 좋겠다. 결국 사는 동안 '상위 1퍼센트'가 되진 못하더라도, 지금 이 순간 어느 정도의 확신과 함께 행복해질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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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란 - 박연준 산문집
박연준 지음 / 난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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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대는 감정 과잉과 열망이 엉킨 소란한 시기다. 많은 젊은이에게 슬픔은 죽음과 맞닿은 듯한 슬픔이며, 걱정과 불안이 고약하게 활개를 치는 시기이다. 고래떼 같은 격정이 몰려오거나 침대를 휘감고 사라지는 파도 앞에서 젊은이들은 슬픔의 먹이가 되는 일이 많을 것이다(p180)"

박연준 시인의 <소란>은 내가 지나고 있는 청춘의 시기와 꼭 닮아있다. 온갖 감정들에 격하게 반응하느라 소란스러우면서도, 또 가장 나다운 시기로 '밑알'과도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소란>을 읽으면서 집 옥상에 올라가 앉아 선선한 바람을 느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가수 아이유의 '꽃갈피' 앨범에 수록된 곡들을 흥얼거리면서). 6년 정도 살면서 한 번도 올라갈 엄두를 내지 못하던 옥상을 작년에 이르러서야 올라가 보았다. 그곳에서 내려다보던 풍경과 적당한 햇살을 나는 늘 잊지 못한다. 새로운 용기를 불어 넣어주던 그 순간을 <소란>은 다시금 느끼게 해주었다. 이 책은 봄바람처럼 가벼워서 좋았다. 또, 너무 가볍지만은 않아서 여러 생각에 침잠하게 만들었다. 마음 한구석에 일어나는 조그마한 소란이 어쩐지 싫지만은 않다. 읽으면서 아주 여러 번 누구에게 이 책을 건네 기분 좋은 소란을 일으키면 좋을까, 하는 고민을 했다. 나의 소란을 닮아 있으면서도, 타인의 그것마저 품으려는 작품을 어느 누구도 마다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나도 당신도 서로의 밤에 침입해 어느 페이지부터랄 것도 없이, 손에 잡히는 대로 열렬히 서로를 읽어나간 거겠죠. 내게는 사랑에 대한 첫 독서가 당신이란 책이었고, 행복했고 열렬했어요. 어느 페이지는 다 외워버렸고, 어느 페이지는 찢어 없앴고, 어느 페이지는 슬퍼서 두 번 다시 들여다보고 싶지 않지만 어쨌든 즐거웠습니다(p33)"

나름대로의 소란스러운 시기를 지나 지금은 어느 정도 침착하게 삶을 살아내고 있다. 미리 두려워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닌데, 나는 여전히 미리 걱정하며 무척 시끌벅적하게 하루하루를 쌓아간다. '슬픔은 슬픔대로 즐겁다'라는 꼭지에 실린 시인의 말처럼 시간을 조용히 흘려보내지 못해 스스로를 미워하던 때도 있었다. 왜 감정적인 소란스러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지지 못하는지, 나 자신을 억누르면 모든 게 해결되리라 믿었다. 하지만 이젠 지나치게 애를 쓰던 단계를 넘어섰다. 또다시 일어난 소란을 웃으며 넘길 줄 알게 되었다. 게다가 삶 속의 기쁨이나 즐거움을 소란스럽게 감각할 필요성도 발견해 냈다. 타인의 시선에서 여전히 어리고, 부족하기만 한 시절을 지나고 있지만, 나는 내가 가진 소란을 긍정한다. 언젠가는 잃어버릴지도 모르는, 내가 다시 한번 되돌아오고 싶을 '이십 대'라는 '소란'을 열렬히 사랑하고 싶다.

서쪽은 기울어가는 것들이 마지막을 기대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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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람쥐의 위로
톤 텔레헨 지음, 김소라 그림, 정유정 옮김 / arte(아르테)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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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출판사 아르테의 책 한 권을 친구에게 소개했을 때, 아르테가 어떤 출판사인지를 묻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서포터즈로 활동하면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어른이'를 위한 책을 만들어내는 곳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냉정하고 무감각한 어른과 순수하고 모든 것에 열정적으로 반응하는 어린이 혹은 청소년 그 사이 어디쯤에 존재하는 독자를 위한 출판사,라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다. 이번에 받은 <다람쥐의 위로> 또한 이전과 결이 같다. 책 표지에는 소설로 분류되었으나 어른이를 위한 동화에 가까운 내용을 담고 있다. 한국에서도 꽤 큰 사랑을 받고 있는 네덜란드 작가 '톤 텔레헨'의 신작이다. 그는 동물이나 곤충들에게 인간과 같은 철학적 고민을 부여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고유한 특징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보통의 작품에서 동물이 등장하면 대개 인간처럼 기능하기 마련인데, 여기에서는 동물로서 고유의 특징을 최대한 유지하되 생각만큼은 단순하지 않게 쓰였다. 뭐랄까, 동물과 곤충도 읽고 쓰는 존재였다면 그들과 인간, 양쪽의 입장을 모두 고려한 작품이라고 평했을 듯하다.

이번 작품에서 위로의 주체는 당연히 다람쥐다. <브라운의 완벽한 고백>에서 '브라운'이 상대의 의중을 정확하게 짐작하여 위로를 건넬 줄 아는 프로였던 것과 달리, '다람쥐'는 상대가 원하는 바를 드러내면 그 방식을 따라 위로의 말을 속삭인다. 좋아하는 차 한 잔과 함께 누구의 말도 가로막지 않고 들어주는 인내심을 겸비한 청자이기도 하다. 옳고 그름을 따져 섣불리 조언하기보다 상대의 흐름에 맞춰 주는 것이 진정한 위로임을 다람쥐에게서 배울 수 있었다.

"난 서 있기만 해, 그냥 계속 서 있기만. 슬픈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백합 옆에서 쉴 새 없이 뛰어내렸다 올라앉았다 하며, 아무 어려움 없이 미끄러지고 넘어지는 개구리를 향해 이따금씩 부러운 눈빛을 보냈다(p12)"

"나는 항상 생각만 해, 항상. 한 번쯤은 생각만 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외쳐 본다면 어떻게 될까. 다들 대답해 주겠지.

'여기야! 우리 여기 있어!'

그러고는 모두 아래로 내려올 거야. 어쩌면 같이 춤을 출 수 있을지도 몰라. 진지하고 처량한 춤을(p51)"

<다람쥐의 위로>에는 포유류, 조류, 파충류의 다양한 고민이 등장하는데, 그중에서는 내가 겪었던 것과 같은 종류의 힘듦을 지나가는 아이들도 있었다. 넘어지는 법을 알지 못하는 '왜가리'에게서 정체되어 있던 시기를 떠올렸다. 졸업 후에 부지런히 무언가를 배우고, 앞으로 나아가는 친구들과 달리 나는 머뭇거리고, 멀뚱거리며 서 있었다. 그때의 나는 넘어지는 법을 알지 못하는 '왜가리' 같았고, 신나게 부딪치며 뛰어다니는 친구들은 '개구리' 같았다. 넘어지는 일에는 고통이 수반되지만, 그래도 '개구리'처럼 뛰어오르고 떨어지기를 반복하며 살고 싶었다. 글을 읽으면서, 태생적으로 넘어지는 일이 불가능한 '왜가리'와 인간으로서의 나는 다르면서도, 또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오징어'는 약한 면을 드러낼 줄 모르던 나를 닮아 있었다. 나약함을 드러내고, 도움을 청하면 모두 기꺼이 바닥으로 내려와 나를 도와주었을 테지만, 나는 평소처럼 견디고 별일 없이 사는 척 굴었다. 소설 속 한 대사처럼 내가 설명을 해야만 상대가 이해할 수 있다면, 그건 설명을 해줘도 상대의 납득을 이끌어내기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오징어'의 생각처럼 일단 털어놓고, 상대의 나를 향한 진지함과 처량함을 받아들여야 할 때도 있다. 그게 모든 것을 해결하진 못하더라도, 사소한 애정이 모여 당신의 극복을 도울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당신에게도 이 책에 담긴 고민과 그에 대한 위로가 마음에 와닿을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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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사라지지 않는 여름 1~2 - 전2권
에밀리 M. 댄포스 지음, 송섬별 옮김 / 다산책방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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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의 사랑에 관해 다룬 작품이라면, 이전에도 수없이 보았다. 한국에서 큰 사랑을 받았던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라지지 않는 여름>이 특별한 건 그들의 과거를 다루었기 때문이다. '캐머런 포스트'의 인생을 다루면서 애초에 모든 것이 어떻게 시작되는지를 보여준다. 이런 시도를 통해 동성애가 이성애와 마찬가지로 자연스러운 끌림이며, 타인의 억압에 의해 변경될 수 있는 종류의 감정이 아님을 드러낸다.

사실 <사라지지 않는 여름>에서 '동성애'는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저자는 아이의 성장 과정 속에서 어른들이 맡은 역할에 주목한다. 어른들은 아이들의 교육자이자 조력자로 여겨지지만, 아이들에게 두려움을 심어주고,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로 작용하기도 한다. 아이가 가진 성질 중 스스로의 신념에 반하는 종류의 것이 존재하면, 이를 억압하고 자신이 믿는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종용할 때도 있다. 이번 작품에서는 그것이 동성애였으나, 이외의 어느 특질이든 보호자의 불만족으로 짓눌리고, 강압적인 변화의 길목에 놓일 수 있다. '캐머런 포스트'의 주변 어른들처럼 자신의 의견만 무조건적으로 옳다고 여기며 어른으로서의 권력을 남용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다. 이들은 하나님과 종교를 핑계 삼아 자신의 논리를 공고히 했다. 일련의 과정 속에서 성찰과 개선은 엿보이지 않는다. 자신이 가진 세계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오류를 찾아내려는 노력이 배제되어 있다. 이들은 자신의 무리에 속하지 않는 타인만이 교육의 대상이라고 여긴다.

아무리 노력해도 완전무결한 어른이 될 수는 없을 테다. 그러니 단호하게 위에서 아래로 가르치려 들기보다 창피함을 무릅쓰고 나약함을 드러내며 위로를 받고, 솔직하게 아이와 상의할 수 있는 태도가 교육자에게 필요한지도 모른다.

"세상에 동성애자라는 정체성은 없어. 그런 건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부정한 욕망과 행동으로 인한 고통뿐이고,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그 고통에 맞서 싸워야만 한다(p55)"

캐머런을 교육하던 '릭'과 '리디아'는 "동성 매력 장애"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캐머런은 이들을 비롯한 여러 어른들에게서 '정상'적인 상태와 '원래대로' 되돌아오기를 강요받았다. 그녀를 "정상으로 만든다"라는 문장도 심심찮게 발견된다. 더욱 충격적인 발언은 동성애의 반대말이 이성애가 아닌 거룩함이라는 것이었다. 세상을 정상과 비정상의 흑백 논리로 구분 짓는 어른들의 태도가 정신을 아찔하게 만든다. 더군다나 정상과 원래의 기준은 태초에 누가 설정했을까. 만약 퀴어가 대다수인 공동체에서 태어났다면, 정상과 비정상의 대상은 뒤바뀐다. 모든 것은 전적으로 옳을 수 없고, 상황과 때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지금 내가 존재하는 공간에서 만들어진 신념만이 전부라는 편협한 시각으로 우물 안 개구리로 남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대다수가 지정한 정상성이 진짜로 올바른지 끊임없이 점검하고, 수없이 개선하여 나아가는 것이 우리가 지향할 지점이다. 좀 더 열린 마음으로 온갖 것을 수용할 자세를 지니지 않고, 내가 믿는 정상성만을 지켜내기에는 세상이 이미 너무도 복잡다단해졌다. '동성애'를 비롯한 수많은 변화가 눈앞에 쌓여있고, 나와 다르고 경험해본 적 없는 세계라는 이유로 전부 내칠 수는 없다. 또한, 동성애는 인종 차별만큼이나 내가 받아들이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처음부터 문제에 포함되지 말았어야 했고, 그로 인해 사람들이 박해받고, 죽어나갈 필요도 없었다.

"그 사건은 바로 저였어요. 그냥 저요. 언제나 그렇죠. 제가 이 모습 그대로 방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모습을 본 것만으로도 충분했어요(p158)"

소설 속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교육기관에서 캐머런과 함께 지내던 '마크'가 했던 말이다. 자신의 존재 자체가 타인이 품은 혐오의 근원이라는 인식은 아이가 감당하기엔 버거워 보였다. 물론, 죽음 만으로 상대의 미움을 극복할 수 있다는 깨달음은 나이대와 상관없이 모두를 아프게 할 것이다. 마크를 비롯한 '하나님의 약속'에 격리된 아이들 전부 어른의 오만이 아니었다면, 자유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적지 않은 삶의 경험을 통해 자신이 세상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다는 얄팍한 믿음으로 어른들은 거만해졌고, 아이들을 자기혐오의 세상으로 내몰았다. 이번 생이 처음인 어른들도 항상 무언가를 배우고, 차츰 성장해간다. 아이들을 가르칠 완전한 자격을 가진 이는 없고, 우리는 그저 더 나은 미래를 함께 도모해 나가는 협력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소설 <사라지지 않는 여름>이 일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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