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소년이 온다 : 한강 장편소설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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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하철에서 이 책을 읽는 내내 울지 않으려고 갖은 애를 써야 했다. 책을 손에 쥐고 있는 동안은 1980년대에 머물렀다. 탑처럼 쌓아 올려진 억울한 시체들을 보고 울지 않기 위해 입을 앙 다물었다. 중요한 순간에 싸움을 외면하지 않으려고, 해야 할 말을 끝맺지 못한 채 주저 않지 않으려고, 이 작품에 살아 숨 쉬는 사람들을 마주하려 애썼다. 울부 짖으며 감성에 호소하기보다 강인하고 단호한 태도로 '나라'와 맞서고 싶었다. 피해를 입는 것이 두려워 되도록 현장으로부터 멀리 달아나려던 어른들처럼 되고 싶지 않아서 그 거대하고도 모호한 관념과 대립각을 세우려고 했다. '동호'는 '나라'가 무엇이느냐고 물었다. 글쎄, 무어라고 대답을 해야 좋을까. 스무 해를 넘게 그 공간 속에서 존재했는데, 나는 '국가'라는 상대를 완전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한 이곳은 나의 존재를 입증해 줄 부모와도 같은 역할을 맡고 있었지만, 윗세대에게는 하나의 트라우마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소년 '동호'에게 이것이 무어라고 가르쳐주면 좋을까. 상대를 이기기 위해 어떤 부분을 공략하라고 귀띔을 해주어야 할까. '동호'보다도 한참을 어른인데도 내가 그를 구해낼 수 없어서, '나라'에 대한 생각을 곱씹을수록 두려움이 밀려와서 몹시 슬퍼졌다.

"학살이 온다, 고문이 온다, 강제진압이 온다, 밀어붙인다, 짓이긴다, 쓸어버린다. 하지만 지금, 눈을 뜨고 있는 한, 응시하고 있는 한 끝끝내 우리는……."

명확히 규정지을 수 없는 막강한 상대와의 대적이 쉽지 않으리란 사실을 알면서도 어떤 이들은 '도청'에 남았다. '희생자'로 불리지 않기 위해 쏘지도 못할 총을 들고, 누군가를 지켜내려던 젊은 사람들이 그곳에 있었다. 정의, 인권, 민주주의... 그런 추상적인 개념들에 자기 나름의 소신을 덧붙이고 있었을 어린 생명들이 국가에 의해 짓밟혔다. 이게 정녕 내가 지금 살아가는 우리나라의 진상이던가, 믿을 수 없어 책을 읽는 내내 벌벌 떨었다. 인간이 또 다른 인간 위에 군림하는 일이 어떻게 거리낌 없이 행해질 수 있었는가. 광주에 새겨진 슬픔은 "제주도에서, 관동과 난징에서, 보스니아에서, 모든 신대륙에서" 같은 방식으로 자행되었다. 우리는 광주, 제주도, 관동과 난징, 보스니아, 모든 신대륙의 눈물 자국을 지우고 앞으로 나아간다. 살 사람은 살아야지, 그날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요. 작가 한강의 표현대로 인류의 유전자에 새겨진 잔인성은 극복될 수 없는 종류의 것일까. 그것이 내 피 속에 들끓고 있다면, 나는 그곳으로 나아가지 않기 위해 어떤 인간이 되어야만 할까. 생명에, 내가 사는 세상에 잔혹하게 굴지 않기 위해 나는 어떤 행동으로 세상의 온갖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해줄 수 있을까.

"당신들을 잃은 뒤, 우리들의 시간은 저녁이 되었습니다.

우리들의 집과 거리가 저녁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어두워지지도, 다시 밝아지지도 않는 저녁 속에서 우리들은 밥을 먹고, 걸음을 걷고 잠을 잡니다."

겨우내 쌓였던 눈이 봄의 따스함으로 녹아내린다. 우리는 겨울이라는 계절이 평생을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또 다른 봄, 여름, 가을을 살아간다. 하지만 저기에 그날 모든 걸 잃어버린 사람들이 있고, 보이지 않는 눈 더미에 파묻힌 내 발이 있다. 그들이 물어온 인권과 자유 덕분으로 내가 온전하게 여기 서있을 수 있다. 세상은 전처럼 어두워지진 않을 것이고, 나는 또 밥을 먹고, 앞으로 걸어 나가며, 온전한 잠자리에서 잠이 들 것이다. 수건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를, 모나미 볼펜에 대한 그들의 두려움을 절반만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인권과 민주주의 등의 추상적인 관념을 위해 떵떵거리며 소리치고, 피를 흘리지 않은 채로 그것들을 쟁취하게 될 것이다. 내가 순진한 표정으로 당당하게 내 권리를 위해 싸울 수 있는 것은 딸만큼은 자신이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대학에 가보기를 바라던 어머니가 있었기 때문이고, 노동자의 인권을 부르짖으며 자신을 불태운 어른이 있었기 때문이며, 대통령의 독단적 행위를 눈 감아 주지 않던 어른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총이나 칼 이외에 각자만의 도구들로 세상의 부당함과 맞서 싸우는 모든 이에게 존경을 표하고 싶다. 나 또한 나의 죽음을 대신한 그들의 죽음을 잊지 않은 채로 나름의 무기를 갈고닦으며 나아가고 싶다. 허망하게 죽으리란 사실을 예감하면서도, 더 약자인 사람들을 지켜내고자 하는 그들과 같은 순수한 열의를 가진 어른으로 영영 남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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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호수 아르테 한국 소설선 작은책 시리즈
정용준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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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나 강이라면 몰라도 '호수'는 듣기만 해도 알 수 없는 쓸쓸함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모든 이의 그림자를 그러안을 만한 포용력이 느껴지는 단어이기도 하다. 특히 그 앞에 '세계의'라는 수식어구가 붙으니 직접 보지 않아도 그것의 넓이와 깊이가 생생하다. 이만치 거대한 '세계의 호수'는 '세 개의 호수'-무주, 유나, 윤기-가 모여 조성된다. 그들은 자유롭게 뻗어 나가는 개체임에 틀림없지만, '외로움'이라는 공통된 세계를 공유한다. 그들의 외로움은 서로 다른 이유에서 비롯되었다. 누군가는 모국에 대한 그리움에서, 또 누구는 아시아인이라는 이유로 차별과 멸시를 받으면서, 또 다른 누군가는 삶의 정상적인 궤도에 올라있지 않다는 박탈감으로 인해서 외로움을 안고 살아간다. 쓸쓸하게 흐르던 '세 개의 호수'가 우연한 만남으로 이뤄낸 '세계의 호수'는 오랫동안 한데 섞이지는 못하리라는 예감을 주면서도, 질긴 인연으로 엉겨 붙는다. 이 호수가 어디로 흘러 갈지는 소설 어디에도 드러나 있지 않다. 또 거리를 두면서도 끝끝내 함께 흘러 제 나름의 목적지에 도착하게 될는지도 우리는 알 수 없다. 그것은 '세 개'와 '세계'가 가진 발음상의 유사함처럼 얼마간 '세 개'였다가 하나의 '세계'가 되기를 반복하지 않을까. 관계의 책임을 상대에게 두면서도 그리움과 불쑥 차오르는 고마움으로 '이별'과 '작별'을 거듭하게 되지 않을까. 소설에서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세 개'와 '세계'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다 보면, 작가의 말처럼 "감출 기억도 없고 쓸 감정도 없고 입에 담을 이름도 없는 그야말로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하지만 인간이란 예정된 세상과의 작별을 앞둔 채로 살아가므로, 이별이든 작별이든 좀체 끝나지 않을 것이다. 또한 결국 나와 한 세계를 이루었던 그 사람과의 '기억'과 '감정', 그리고 그의 '이름'에 끝도 없이 얽매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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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체제와 아프리카 - 인종주의 민족주의 종족성의 정치학
이매뉴얼 월러스틴 지음, 성백용 옮김 / 창비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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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지 창작과비평에서 이 책에 관한 촌평이 실린 것을 보고 책을 구입하긴 했지만, 사실 작년부터 눈여겨보던 작품이었다. 책을 구매하는 데에는 갖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나는 제목을 보고 어떤 의무감에서 이 책을 사게 되었다. 제목 중에서도 '아프리카'라는 단어에 초점을 두지 않을 수 없었다. 아프리카 대륙에 대한 나의 관심은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작가의 작품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녀는 아프리카 대륙이 하나의 국가처럼 여겨지는 것에 불만을 토로했고, 세계질서에서 지속적으로 차별받고 배제되는 일을 비판했다. 나 또한 아프리카 대륙의 국가들이 가진 개별적인 특수성을 거의 무시한 채로 살아왔으므로 아디치에의 발언을 듣고 몹시 부끄러워졌다. 그래서 이제껏 관심을 두지 않았던 아프리카를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을 게을리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세계체제와 아프리카>를 읽기 시작한 동기는 무지에 대한 수치심과 그것에 대한 미안함이다.

<세계체제와 아프리카>에서 아프리카 대륙에 속한 각각의 국가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가 진행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아프리카의 정치·경제체제에 관한 연구결과가 집약되어 있고, 아프리카의 현주소와 앞으로의 지향점을 짚어내고 있다. 게다가 '인종'과 '민족'을 근원부터 파헤쳐 보는 것으로 독자의 지적 욕구를 충분히 채워준다. 인종주의·민족주의 정치는 지치지 않고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으므로 이에 관해 깊이 있게 살펴보고 논의를 시작하는 일은 매우 시의적절하고, 유의미하다고 생각한다. 인종과 민족에 의한 차별을 거부해야 한다고 교육을 받으면서도, 그것의 시발점에 관한 배움의 기회는 드물었던 것이 사실이다. 인종과 민족으로 세상이 구분 지어진다면, 억울함을 겪어야 하는 것은 황인종이자 아시아인인 우리도 별반 다를 게 없다. 그러므로 이매뉴얼 월러스틴의 저작은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

책에서 거의 매 장마다 세계체제가 과도기에 놓여 있고, 다음 단계의 성공 여부는 우리의 능력에 달려있다,라는 말이 반복된다. 확실히 자본주의에 대한 회의가 양극화로 인해 증폭되었고, 다음 단계로의 이행이 불가피하게 여겨지는 것은 사실이다. 자본주의 세계체제에서는 상위 20%가 있다면, 필연적으로 하위 80%가 존재하는데, 해당 구조가 거의 고정불변의 것이며, 계층적 사다리는 극복 불가능한 종류의 것임이 판명되면서 사람들은 현 체제에 회의를 느끼고,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음 단계로의 체제적 이행은 마치 다른 행성으로의 이주처럼 손에 잡힐 듯하면서도, 이내 곧 멀어지고야 만다. 우리는 이전과 달리 민족적으로 해방된 더 평등한 세계체제로 수월하게 나아갈 수 있을까. 그것은 또 내가 속한 세대 내에서 이뤄질 수 있는 일일까.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대립이 고작 반세기 정도 이전의 일이고, 평생 공고한 위치를 섭렵하리라 믿었던 두 체제가 다른 사상에 의해 대체되리라는 예측은 새삼 놀랍고, 믿어지지가 않는다. 한국이 핵심부에 자리를 잡지는 못하더라도, 제 나름의 발전 과정에서 자신만의 체제를 구축하며 오래도록 존속하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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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폭풍의 언덕
에밀리 브론테 지음, 김종길 옮김 / 민음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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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클리프가 잘생겼기 때문이 아니라, 넬리, 그가 나보다도 더 나 자신이기 때문이야. 우리의 영혼이 무엇으로 되어 있든 그의 영혼과 내 영혼은 같은 거고, 린튼의 영혼은 달빛과 번개, 서리와 불같이 전혀 다른 거야."

뜬금없이 <폭풍의 언덕>을 다시 읽게 된 건 한 드라마 때문이었다. 채널을 돌리던 중에 한 배우가 해당 책의 한 구절을 읊는 소리를 들었다. 지나치면서 '윽, 분명 어디서 들었는데. 도무지 생각이 나질 않아.'라고 답답함에 울부짖던 나를 위해 가족들은 채널을 다시 돌려주었다. 그리고 이내 그녀의 손에 들려있던 작품이 <폭풍의 언덕>, 그래, 영문학도로 지내면서 수도 없이 읽었던 바로 그 소설임을 알아차렸다. 옆에 앉아있던 동생은 문학도의 자존심을 긁어댔고, 나는 바로 <폭풍의 언덕>을 구매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위에 내가 인용해 놓은 구절만 듣는다면 이게 고전적인 연애소설로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건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사랑보다 음침하고 침울하기 이를 데 없는 '워더링 하이츠'를 묘사하는 일에 중점을 두고 있다. 나처럼 텍스트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데 큰 기쁨을 얻는 사람에게 뚜렷한 교훈을 남기지 않는 이런 유형의 소설은 사실 좀 아쉽다. 또한, 캐릭터들이 가진 좀 비현실적으로 과장된 성격은 읽는 내내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 에밀리 브론테는 흡인력 있는 서술 방식으로 독자를 끌어당기는 구석이 있다. 끝까지 붙들고 있게 만드는 힘을 가진 작가 중에 한 명이라고 생각한다.

이번에 다시금 <폭풍의 언덕>을 읽으면서 새삼 '히스클리프'의 아동학대와 그것이 아이들에게 끼치는 영향을 주목하게 되었다. 이번뿐 아니라 나는 책을 읽으며 종종 어떤 아이에 대해 어른의 언행이 가진 영향력을 눈여겨 봐왔다. 부모가 될 나이가 되고서야 비로소 그런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름대로 확고해진 소신을 지니고 사는 어른으로 지내다 보니 누군가의 사고방식에 의해 지배를 받으면서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하던 시절이 너무도 요원하게 느껴진다.

'린튼'과 '헤어튼'은 '히스클리프'에게 온갖 악담을 들으며 자랐고, 스스로의 뛰어난 면을 억누르기 위해 애를 쓰며 살았다. 헤어튼은 자신의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며 비참할 정도로 무지했으니 히스클리프에게 맞설 수 없었다 치자. 그렇더라도 '린튼'이 자신의 아버지에게 느끼던 극도의 두려움과 쉽게 굴복해버리는 무력함은 놀라웠다. 그는 어머니 덕분에 전혀 다른 삶의 존재를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체적인 열악함보다도 린튼이 히스클리프에 대해 가진 정신적인 공포가 그를 옭아매었다. 분명히 하나의 개체로 살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쉽게 그들의 정신이 뭉개져버리는지를 떠올리면 경악스럽다.

만약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문득 또 <폭풍의 언덕>을 읽게 된다면, 나는 어떤 결의 이야기를 여기에 적어내려가고 싶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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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도는 땅
김숨 지음 / 은행나무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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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본래 땅 위를 떠도는 조상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러던 것이 선 하나로 분명하게 쪼개지고, 맹목적으로 땅을 지켜내기 위해 치고받기 시작했다. 인간은 자유로이 방황하던 시절이 없던 것처럼 선 밖의 온갖 것들을 배척하기 시작했다. '국가'와 '민족'을 시발점으로 삼아 자행된 폭력을 떠올려 보면 공통된 조상의 존재가 무색해진다. 한편으로는 다양한 방식으로 국가 간 이동이 증폭되었다. 유학이나 이민, 여행 등의 이유로 그리고 최근의 세계적 질병으로 국가 간의 경계는 희미해졌다. '지구촌'이 닳고 닳은 사회학적 용어가 아니라 체감 가능한 현실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또 한 번 좀처럼 정착하지 못하고, 늘 떠도는 인류가 되어간다.

하지만 '떠돎'이 '자유'로 치환될 수 있는 것은 아무래도 우리의 뿌리가 견고하게 박혀있는 땅의 존재 덕분이다. 타국에서 서럽고 외로워도 이는 하나의 잎에 불과하고, 뿌리가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는 저 너머로 귀환한 후에 모든 것이 치유될 수 있다는 믿음은 떠도는 이들을 지탱해 준다. 뿌리까지 통째로 뽑혀져 질질 끌려다니는 삶을 사는 이들은 경계의 구분과 정착을 더욱 반길 테다. 물론, 나의 뿌리가 심어진 땅이 있다는 사실이 내게 완전한 보호를 제공하지 못할 때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민등록증과 여권이 주는 강한 확신은 나의 무한한 떠돎과 귀환을 가능하게 만든다.

나는 '고려인'을 한 다큐멘터리를 통해 알게 되었다. 오래전의 일이라 정확한 내용은 기억이 나질 않지만, 그들은 한국의 책임을 요구하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어린 나는 그들의 상황에 몰입해서 저 사람들 빨리 도와줘,라고 외쳤던 것 같다. 그때 한 어른이 내게 고려인은 한국인이 아니니까 국가에서 나설 필요가 없다는 가르침을 주었다. 국가의 개념을 명확히 파악하지 못한 채로 나는 알 수 없는 무력함을 느꼈다. <떠도는 땅>에 등장한 인물들도 대부분이 스스로를 러시아인으로 인식한다. 살아남기 위해서 러시아인이 되어야 하고, '조선'이라는 땅과의 시간적·물리적 거리에서 비롯된 생각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와 한국 모두에 얇은 뿌리를 걸쳐 놓은 그들을 우리는 외면해야 옳을까. 2개 이상의 국가에 뿌리를 둔 이들에 관한 고민은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다. 외국에 거주하는 한인을 코로나 사태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본국에 데려온 정부의 행동을 비난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왜 모든 것을 한국이 부담을 지는지 의아해했다. 국제결혼과 외국인 유입 등의 이유로 국가의 경계가 허물어져가고 있는 지금, 우리는 중요한 길목 위에 서 있다.

내가 <떠도는 땅>을 읽으며 자주 억울한 마음이 들었던 건 '고려인'이 결국엔 같은 핏줄을 공유하기 때문인 점도 있다. 그러나 '국가'라는 딱지를 떼고 보아도, 분노는 그칠 줄을 모른다. 같은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그 위에 군림하면서 소수 민족의 권리를 앗아간 권력자들의 행태가 분명히 옳지 못하기 때문이다. 핏줄에 대한 본능적인 보호 욕구보다 '인권'에 관한 개인적인 관심이 소설을 읽는 나의 분노를 촉발시켰다. 그저 생존과 자유를 위해 자신의 출생지를 이탈한 사람들에게 존중과 보호가 주어지길 바란다. '국가'라는 모호하고 불확실한 개념을 변명으로 삼기보다 '인권'을 중요시하고, '지구촌'을 위해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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