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도는 땅
김숨 지음 / 은행나무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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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본래 땅 위를 떠도는 조상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러던 것이 선 하나로 분명하게 쪼개지고, 맹목적으로 땅을 지켜내기 위해 치고받기 시작했다. 인간은 자유로이 방황하던 시절이 없던 것처럼 선 밖의 온갖 것들을 배척하기 시작했다. '국가'와 '민족'을 시발점으로 삼아 자행된 폭력을 떠올려 보면 공통된 조상의 존재가 무색해진다. 한편으로는 다양한 방식으로 국가 간 이동이 증폭되었다. 유학이나 이민, 여행 등의 이유로 그리고 최근의 세계적 질병으로 국가 간의 경계는 희미해졌다. '지구촌'이 닳고 닳은 사회학적 용어가 아니라 체감 가능한 현실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또 한 번 좀처럼 정착하지 못하고, 늘 떠도는 인류가 되어간다.

하지만 '떠돎'이 '자유'로 치환될 수 있는 것은 아무래도 우리의 뿌리가 견고하게 박혀있는 땅의 존재 덕분이다. 타국에서 서럽고 외로워도 이는 하나의 잎에 불과하고, 뿌리가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는 저 너머로 귀환한 후에 모든 것이 치유될 수 있다는 믿음은 떠도는 이들을 지탱해 준다. 뿌리까지 통째로 뽑혀져 질질 끌려다니는 삶을 사는 이들은 경계의 구분과 정착을 더욱 반길 테다. 물론, 나의 뿌리가 심어진 땅이 있다는 사실이 내게 완전한 보호를 제공하지 못할 때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민등록증과 여권이 주는 강한 확신은 나의 무한한 떠돎과 귀환을 가능하게 만든다.

나는 '고려인'을 한 다큐멘터리를 통해 알게 되었다. 오래전의 일이라 정확한 내용은 기억이 나질 않지만, 그들은 한국의 책임을 요구하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어린 나는 그들의 상황에 몰입해서 저 사람들 빨리 도와줘,라고 외쳤던 것 같다. 그때 한 어른이 내게 고려인은 한국인이 아니니까 국가에서 나설 필요가 없다는 가르침을 주었다. 국가의 개념을 명확히 파악하지 못한 채로 나는 알 수 없는 무력함을 느꼈다. <떠도는 땅>에 등장한 인물들도 대부분이 스스로를 러시아인으로 인식한다. 살아남기 위해서 러시아인이 되어야 하고, '조선'이라는 땅과의 시간적·물리적 거리에서 비롯된 생각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와 한국 모두에 얇은 뿌리를 걸쳐 놓은 그들을 우리는 외면해야 옳을까. 2개 이상의 국가에 뿌리를 둔 이들에 관한 고민은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다. 외국에 거주하는 한인을 코로나 사태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본국에 데려온 정부의 행동을 비난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왜 모든 것을 한국이 부담을 지는지 의아해했다. 국제결혼과 외국인 유입 등의 이유로 국가의 경계가 허물어져가고 있는 지금, 우리는 중요한 길목 위에 서 있다.

내가 <떠도는 땅>을 읽으며 자주 억울한 마음이 들었던 건 '고려인'이 결국엔 같은 핏줄을 공유하기 때문인 점도 있다. 그러나 '국가'라는 딱지를 떼고 보아도, 분노는 그칠 줄을 모른다. 같은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그 위에 군림하면서 소수 민족의 권리를 앗아간 권력자들의 행태가 분명히 옳지 못하기 때문이다. 핏줄에 대한 본능적인 보호 욕구보다 '인권'에 관한 개인적인 관심이 소설을 읽는 나의 분노를 촉발시켰다. 그저 생존과 자유를 위해 자신의 출생지를 이탈한 사람들에게 존중과 보호가 주어지길 바란다. '국가'라는 모호하고 불확실한 개념을 변명으로 삼기보다 '인권'을 중요시하고, '지구촌'을 위해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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