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폭풍의 언덕
에밀리 브론테 지음, 김종길 옮김 / 민음사 / 2012년 11월
평점 :
판매중지


"히스클리프가 잘생겼기 때문이 아니라, 넬리, 그가 나보다도 더 나 자신이기 때문이야. 우리의 영혼이 무엇으로 되어 있든 그의 영혼과 내 영혼은 같은 거고, 린튼의 영혼은 달빛과 번개, 서리와 불같이 전혀 다른 거야."

뜬금없이 <폭풍의 언덕>을 다시 읽게 된 건 한 드라마 때문이었다. 채널을 돌리던 중에 한 배우가 해당 책의 한 구절을 읊는 소리를 들었다. 지나치면서 '윽, 분명 어디서 들었는데. 도무지 생각이 나질 않아.'라고 답답함에 울부짖던 나를 위해 가족들은 채널을 다시 돌려주었다. 그리고 이내 그녀의 손에 들려있던 작품이 <폭풍의 언덕>, 그래, 영문학도로 지내면서 수도 없이 읽었던 바로 그 소설임을 알아차렸다. 옆에 앉아있던 동생은 문학도의 자존심을 긁어댔고, 나는 바로 <폭풍의 언덕>을 구매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위에 내가 인용해 놓은 구절만 듣는다면 이게 고전적인 연애소설로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건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사랑보다 음침하고 침울하기 이를 데 없는 '워더링 하이츠'를 묘사하는 일에 중점을 두고 있다. 나처럼 텍스트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데 큰 기쁨을 얻는 사람에게 뚜렷한 교훈을 남기지 않는 이런 유형의 소설은 사실 좀 아쉽다. 또한, 캐릭터들이 가진 좀 비현실적으로 과장된 성격은 읽는 내내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 에밀리 브론테는 흡인력 있는 서술 방식으로 독자를 끌어당기는 구석이 있다. 끝까지 붙들고 있게 만드는 힘을 가진 작가 중에 한 명이라고 생각한다.

이번에 다시금 <폭풍의 언덕>을 읽으면서 새삼 '히스클리프'의 아동학대와 그것이 아이들에게 끼치는 영향을 주목하게 되었다. 이번뿐 아니라 나는 책을 읽으며 종종 어떤 아이에 대해 어른의 언행이 가진 영향력을 눈여겨 봐왔다. 부모가 될 나이가 되고서야 비로소 그런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름대로 확고해진 소신을 지니고 사는 어른으로 지내다 보니 누군가의 사고방식에 의해 지배를 받으면서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하던 시절이 너무도 요원하게 느껴진다.

'린튼'과 '헤어튼'은 '히스클리프'에게 온갖 악담을 들으며 자랐고, 스스로의 뛰어난 면을 억누르기 위해 애를 쓰며 살았다. 헤어튼은 자신의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며 비참할 정도로 무지했으니 히스클리프에게 맞설 수 없었다 치자. 그렇더라도 '린튼'이 자신의 아버지에게 느끼던 극도의 두려움과 쉽게 굴복해버리는 무력함은 놀라웠다. 그는 어머니 덕분에 전혀 다른 삶의 존재를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체적인 열악함보다도 린튼이 히스클리프에 대해 가진 정신적인 공포가 그를 옭아매었다. 분명히 하나의 개체로 살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쉽게 그들의 정신이 뭉개져버리는지를 떠올리면 경악스럽다.

만약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문득 또 <폭풍의 언덕>을 읽게 된다면, 나는 어떤 결의 이야기를 여기에 적어내려가고 싶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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