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의 시작 오늘의 젊은 작가 6
서유미 지음 / 민음사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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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에 나란히 꽂혀 있던 '오늘의 젊은 작가' 시리즈 중에 『끝의 시작』이 눈에 들어왔던 건 왜였을까. 아마 '호크니'의 그림이 활용된 책의 표지가 여름과 가장 닮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끝의 시작'이라는 책의 제목도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려는 이 시기와 잘 맞아떨어진다는 생각도 든다. 더위를 핑계로 바닥에 널브러져 지내던 시기가 끝나고, 가을이 오면 날씨도 좋은데 슬슬 무언가를 시작해 볼까, 싶어지기도 하니까.






『끝의 시작』은 '영무',' 여진', '소정'의 이별, 상실, 그리고 공허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소설이다. '영무'와 '여진', 그리고 '소정'이 삶 속에서 느끼는 불행은 결코 단순한 모습을 하고 있지 않다. 그건 그들 자체이고, 따라서 이를 제거하려고 시도하면 도대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린다. 망망대해 같은 불행을 짊어진 채로 살아가는 그들의 삶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색을 띠고 있다. 견디는 것에 불과한 삶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제대로 살아있기 위해 부득불 노력을 기울인다. 삶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누군가를 제대로 사랑할 수 없게 된 적적한 삶과 그의 옆에서 삶에 대한 열망이나 기대를 빼앗긴 삶, 또 평범한 또래처럼 살아갈 수 없는 가난한 삶을 감안한다면, '영무'와 '여진', '소정'의 삶에 대한 노력은 사치스럽게 여겨질 정도다. 하지만 그들은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제대로 살고 싶다는 열망(127쪽)"을 멈추지 않는다. 몇 번의 이별을 반복하는 동안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빼앗겨 버렸고, 자신의 절망과는 관계없이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에 황망함을 느끼면서도 그들은 4월을 끝내고 5월을 향해 나아간다.






어떤 사랑은 쉽게 변질되고 어떤 사랑은 쉽게 바닥을 드러내고 어떤 사랑은 흐지부지 막을 내린다. 그래도 그 모든 걸 사랑이라고 불러야겠지. 그것이 사랑이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겠지.(137쪽)

'사랑'을 '삶'으로 바꾸어 읽을 수도 있겠다. 그러니까 어떤 삶은 쉽게 바닥을 드러내고, 어떤 삶은 흐지부지 막을 내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모든 걸 인생이라고 부를 것이다. 어떤 형태의 삶을 살든 간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살아있었다는 사실이다. 그게 '영무', '여진', '소정'이 이별 혹은 죽음과 가까워지면서 깨닫게 된 바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이 삶에 어떤 감정을 갖고 행동을 취하는지와 상관없이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가고, 어느 순간에 모든 시간은 끝이 난다. 단순히 4월이 끝나고 5월로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언젠가 영영 그다음 달을 꿈꿀 수 없는 순간에 도착하게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8월이 끝나고 이제 곧 맞이할 9월에 재빨리 또 다른 희망을 걸 수 있어서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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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담 보바리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00
귀스타브 플로베르 지음, 김남주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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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인 비난을 받는 것으로 모자라 프랑스 문단에 길이 남을 문학 소송의 원인이 된 작품인만큼 기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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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랑한 내일들 - 자기 삶의 단독자로 선 90년대생 10명과의 대화
유선애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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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기를, 존엄하기를 선택한 사람들"

그 누구도 완벽하게 규정할 수 없는 다양한 내일들

10명의 90년대생 여성들과의 특별한 대담

운동장 구석에서 적당히 피구나 하게 했던 체육시간이, 소녀를 청순가련하고 새하얗게만 표현해온 대중문화가, 덩치 좋은 여자, 힘센 여자, 기운찬 여자에 대한 유난스러운 반응들이 몸을 작게 쓰게 했다는 걸, 꿈도 왜소하게 꾸게 했다는 걸 왜 서른이 다 돼서야 알게 된 것일까.(215쪽)

『우리가 사랑한 내일들』은 <마리끌레르 코리아>의 피처 에디터 유선애가 10명의 90년대생 여성들과 여성으로서의 삶, 직업적 가치관 등에 관해 나눈 밀도 높은 대화를 기록한 인터뷰집이다. '예지', '김초엽', '황소윤', '재재',' 정다운', '이주영', '김원경', '박서희', '이길보라', '이슬아'…이름만 들어도 탄성을 자아내는 인터뷰이들을 소위 말하는 '밀레니얼 세대'의 틀 안에 가둘 수는 없어 보인다. 그들은 '90년대생', 혹은 '여성'이라는 딱지를 떼어둔 채 저마다의 색으로 빛난다. 각자의 자리에서 확고한 신념과 함께 삶을 밀고 나가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우리가 맞게될 변화된 내일의 모습을 가늠한다. 자신의 이름을 달고 분명하게 살아있는 이들이 만들어낸 내일은 도대체 어떤 형태와 질감으로 우리에게 다가올까. 앞으로의 일들을 가늠하기 어려운 시대이지만, 그들과 함께하는 내일들을 사랑하고 지지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만큼은 확신한다.


여성 인터뷰어와 여성 인터뷰이들의 인터뷰집인만큼 『우리가 사랑한 내일들』 안에는 여성으로서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이야기가 가득하다. 정상성과 비정상성의 구분에 회의를 느끼고, 이분법적인 사고를 지우도록 의식적으로 노력해 온 그들은 한국사회에서 소수자성을 띠고 있는 여성들에게로 시선을 옮긴다.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면서 90년대생 여성들은 젠더 감수성을 재빠르게 습득하고 자신의 삶에 적용하는 일을 넘어서서 그 변화의 주체자로까지 나아가게 되었다. 가부장적인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이 페미니즘 리부트와 함께 세대 전체가 리부트되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N포세대'로서 무기력함과 체념을 체득해 온 그들은 전복을 위한 투쟁에서만큼은 물러서지 않는다. 과거를 기억함으로써 미래를 지키도록 서로를 끊임없이 채찍질하며, 전쟁이 아닌 연대를 통해 세상을 변화시킬 힘을 얻는다.


그런 투쟁과 전복, 변화의 선두에 『우리가 사랑한 내일들』의 인터뷰이들이 있다. 그들은 말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자리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존재 자체가 패러다임이 되는 사람(113쪽)"이 되려고 노력한다. 다양한 사례와 이미지를 보여주려는 그들 덕분에 90년대생 여자들에게 씌워졌던 프레임은 번번이 무너지고, 종잡을 수 없게 된다. 결국엔 그들로 인해 우리는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차원이 다른 가능성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개개인의 가능성으로 만들어진 내일의 유토피아는 결코 혼자 이룩되는 것이 아님을 이 책은 또렷하게 인지한다. 5년, 10년 후의 미래를 그리기보다 자기 중심을 잡고 매일매일을 또박또박 살아가려 하고, 그 과정 속에서 타인과의 경쟁 의식보다는 연대와 공존을 향한 강렬한 열망을 품는다. 우리의 내일들을 향해 나아가는 길 위에서 끊임없이 자신이 즐겁고 행복할 방법을 찾아내려고 애쓸 그들을 잘 알기에 나는 아직 오지도 않은 내일들을 벌써부터 두 팔 벌려 반기고 있다.

유토피아가 완성형 공간으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유토피아로 바꿔가려는 개인들이 유토피아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 P83

소명이나 사명이 아닌 천진한 즐거움이 그를 계속 싸우게 한다. 경험에 의미를 두고 한 걸음씩 전진한 것이 그의 삶의 반경을 넓혔듯, 이길보라의 쾌활한 싸움은 우리가 사는 세계와 인식의 폭을 한 발자국씩 확장시키고 있다. - P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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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불호텔의 유령
강화길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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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한과 악의로 가득 찬 세상을 둘러싼

강화길식 고딕 호러!






악의 그 자체로 존재하는 '대불호텔'

원한에 잠식될 것인가, 벗어날 것인가

그런 건 선택하는 게 아니야.

어차피 원한은 나를 찾아와.

그것들이 나를 선택하는 거야.(234쪽)

지금까지의 책 읽기는 고딕 소설이라는 장르와 한참 먼 위치에 서있었다. 나와 고딕 소설 사이의 공백을 뚫고 작가 강화길이 들어온다. 이전에는 고딕의 세계에 대한 암시에 불과했다면, 『대불호텔의 유령』은 본격적인 시작에 가깝다. '강화길식 고딕 호러'의 핵심이 된 악의와 원한은 소설 안에서 기세등등하게 인간들 위에 군림한다. 인간들은 처음엔 악마의 목소리를 거부하지만, 그러다가도 어느새 한 몸이 되어 버린다. 한국에서 소위 '한'으로 불리는 악의와 원한은 기괴하고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면서도 동시에 우리를 어렵지 않게 매혹시킨다. 극한의 부정적인 감정들을 우리가 수용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때로 환호하며 반기기까지 하는 것은 우리가 그리고 그들이 "이 세상에서. 이런 세상에서.(263쪽)" 태어났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보편의 질서로부터 분리되어 철저히 고립된 소설 속 인물들은 뿌리 깊은 원한과 세상을 향한 증오를 느끼고, 이를 기반으로 무시무시한 악의를 품는다. 악의, 의심, 증오, 원한… 이 모든 것은 인천에 있는 대불호텔에서 시작되었다. 악의 그 자체로 존재하며 사람들을 갉아먹는 대불호텔의 목소리로부터 우리는 잠식될 것인가, 이와 반대로 거기로부터 벗어나 우리만의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인가. 벗어난다고 해도 지난한 과정이 될 것이다. 악의와 원한에게는 마음을 내어주기가 언제나 더 쉽기 때문이다.


"대체 나는 무엇을 기대했던가. 무엇에 매혹되었던가.(173쪽)" 악의와 원한에 잠식되는 동안 우리를 사로잡는 것은 이런 질문들이다. 물론 삶이 더 나아지는 데 희망을 걸었던 날들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태어난 '이런 세상'은 감당하기 어려운 상실의 경험을 통해 모든 것이 언제든 무너질 수 있고, 영원한 건 없다는 사실을 번번이 일깨워 준다. 그러니까 우리는 추락 후에 느껴지는 고통의 크기를 줄이기 위해 무언가에 애착을 갖기보다 증오하고 의심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하지만 누군가는 사랑이라는 덧없는 기억을 붙잡기 위해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믿으면 삶에게 배신당하게 될 것임을 알면서도 외롭고 고독한 자신을 받아들이고 기꺼이 삶의 주체로 나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악의 꽃 위에서도 꿋꿋이 살길을 도모한다. 다양한 모습과 목소리로 나타나 끈질기게 생명의 흔적을 지워버리는 '악'에 대항하려는 그들의 얼굴은 결연한 표정을 짓고 있지 않다. 5년, 10년 후의 미래를 그리는 비장함이 아니라 코앞의 하루하루를 견디고 자신이 발 디딘 곳을 사랑하며 지켜나가려는 묵묵한 의지만이 있을 뿐이다. 악의나 원한 따위에 내줄 시간은 없다는 듯 바쁘게 살아가며 사소한 행복을 추구하는 이들의 매일매일은 익숙한 구석이 있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영영 좌절된 열망과 회복되지 못할 내면의 아픔에 짓눌리는 기분이 든다. 그건 어떤 악의나 원한보다도 더 깊게 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고, 지금도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이 책은 결국 모든 악의와 원한이 극복될 것이라는 어떤 암시다. 감정의 해소는 어쩌면 실망스럽게도 '사랑'으로부터 온다. 사랑이라는 감정의 존재를 깨닫고, 이를 행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작가 강화길은 한발 더 나아가 자신의, 우리의 이야기를 적어 내려가기 시작한다.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성실과 집요함의 DNA로 그저 하루하루의 이야기를 채워나간다. '사랑'에 대한 인식보다도 지금 여기에 집중하는 삶의 태도가 우리를 악의와 원한으로부터 떼어 놓는다. 악의와 원한으로 가득 찬 대불호텔이라는 함정에 깊이 빠져들어 있다가 마침내 출구를 되찾아 걸어 나온 우리는 이전보다 여유로운 활기를 띤다. 이제 어떤 사사로운 감정도 우리를 망쳐놓을 수 없고, 우리 자신의 삶을 우리의 뜻대로 밀고 나아갈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의 항해 끝에는 웃음이 있을 것이다. "나는 내 배의 선장이다. 웃을 수 있다.(I am the captain of my fate. Laughter is possible.)(305쪽)" 이 말 하나를 마음에 새기기 위해 대불호텔의 시간을 지나왔다. 


그리고 어디선가 또다른 목소리가 들린다. 지나간 시간, 역사, 그곳을 거쳐간 사람들의 기억으로 남아 건물 자체가 된 모든 이들의 목소리. 그리고 그 이야기를 상상하는 사람의 목소리. 그들이 행복하기를 바라고, 원하는 것을 이루기를 바라고, 그리하여 원한을 사랑으로 바꾸는 삶으로 걸어들어가기를 바라는 사람의 목소리. - P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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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케
매들린 밀러 지음, 이은선 옮김 / 이봄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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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에게 외면받던 '헬리오스'의 딸 '키르케'

'마녀'로서의 자아와 함께 깨어나다!


맨 처음 태어났을 때 나에게는 걸맞은 이름이 없었다.(이 책의 첫 문장)

"그들은 우리를 무서워하듯 너를 무서워하지는 않을 거야.(122쪽)" 전령의 신 '헤르메스'는 '키르케'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태양의 신 '헬리오스'와 물의 정령 '페르세'의 장녀로 태어난 '키르케'는 티탄 신족의 핏줄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확실히 기존의 신들과는 다르다. 강력한 아버지로부터 아무것도 물려받지 못한 딸은 부모에게 실망을 안기고, 수많은 가족들로부터 철저히 외면받는다. 무시와 경멸을 복수의 자양분으로 삼을 수도 있었지만, 그러기에 어린 '키르케'는 너무 순진했다. 그렇게 '키르케'는 태초부터 신의 지위와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인간과 신 사이 "공포의 연쇄 관계"를 깨부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된다.


'키르케'는 욕망과 이를 얻고자 하는 과정에서 발현된 질투심에 의해 자신의 재능을 발견한다. 여성과 질투, 그건 신화 안에서 끝없이 반복되는 뻔한 클리셰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위에서 지적했다시피 '키르케'는 압도적인 기세를 자랑하는 신들과는 전혀 다른 무언가다. "모든 신이 똑같을 필요는 없어.(81쪽)" 먼 친척인 '프로메테우스'에게서 어릴 때 들었던 이 한 마디는 평생 동안 '키르케'의 내면 안에서 공명하며, 그녀 삶의 주축이 되어준다. 그렇기 때문에 '키르케'는 신들과는 다르게 부정적인 감정에서 비롯된 처참한 결과와 잘못된 행동이 불러온 수치심을 받아들이고 반성하는 방식을 택한다. 후회와 반성 등은 '키르케'가 신보다는 인간과 더 가깝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무너뜨려, 나는 생각했다. 무너뜨리고 다시 지어.(248쪽)

욕망과 질투가 '키르케'에게 아픔만 가져다준 것은 아니다. 그녀는 자신 안에 갇혀 있던 '마녀'로서의 자아를 획득하고 새롭게 태어난다. 그녀의 유일한 능력마저도 신의 능력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획득된다. 신적인 능력에 비하면 마법은 그야말로 고역이었다. 시도하고, 오류를 수정하고, 번번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키르케'는 끈질기게 마법에 매달린다. 마법은 그녀의 생애 동안 그녀에게 주어진 거의 유일한 기회이기 때문이다. 마법으로 그녀는 비로소 신에게 대적할 만한 무기를 손에 쥘 수 있었고, 돌아갈 만한 곳이 못 되었던 가족들을 대신해 자신의 평안을 지켜줄 힘을 얻을 수 있었다.


유배지 '아이아이에'에서 얻던 평안은 그러나, 한여름 밤의 꿈에 불과하기도 했다. 그녀는 자신의 동반자인 고독과 또다시 마주해야만 했다. 고독한 삶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어 보였던 '키르케'의 삶에 '오디세우스'와 '텔레고노스', 끝으로 '텔레마코스'가 나타나면서 전혀 다른 길로 빠져들기 시작한다. 그녀는 셀 수도 없이 많은 시간 동안 갇혀 있던 땅에서 벗어나 세상과 다시 한번 연결된다. 그렇게 되기까지 숱한 위협과 두려움을 견뎌내야 했지만, 결론적으로 봤을 때 그건 분명 견딜만한 가치가 있는 시간들이었다. '오디세우스'부터 '텔레마코스'를 거치면서 '키르케'는 신의 발아래 있던 시간들에 마침내 지긋지긋함을 느끼고,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 거듭난다. "하지만 그건 남들이 나를 억지로 끼워 맞춘 틀에 불과했다. 이제 그 안에 갇혀 있을 필요가 없었다.(485쪽)" 완벽한 신이 아닌 데서 오는 괴로움, 인간들로부터 대접받는 데 느끼던 불편함, 뒤틀린 과거가 만들어낸 수치심 등은 이제 그녀를 옭아맬 수 없다. 작가 '매들린 밀러'가 '키르케'의 마지막에 관해 암시만을 주었으므로, 우리는 '키르케'가 어떻게 될지에 대해서 수만 가지의 상상을 할 수 있다. 그녀가 인간과 신 둘 중에 어떤 존재로서의 미래를 택하게 될지는 중요하지 않다. 무엇보다 이제 그녀는 "죽은 존재"로서 살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이 『키르케』가 가진 유일하고 가장 강력한 위안이다.

하지만 고독한 삶을 살다보면 별들이 일 년에 하루 땅을 스치고 지나가듯 아주 간혹 누군가의 영혼이 내 옆으로 지는 때가 있다. 그가 내게 그런 별자리와 같은 존재였다. - P198

그래도 아무 소용 없었다. 나는 혼자 사는 여자였고 중요한 건 그뿐이었다. - P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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