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르케
매들린 밀러 지음, 이은선 옮김 / 이봄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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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에게 외면받던 '헬리오스'의 딸 '키르케'

'마녀'로서의 자아와 함께 깨어나다!


맨 처음 태어났을 때 나에게는 걸맞은 이름이 없었다.(이 책의 첫 문장)

"그들은 우리를 무서워하듯 너를 무서워하지는 않을 거야.(122쪽)" 전령의 신 '헤르메스'는 '키르케'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태양의 신 '헬리오스'와 물의 정령 '페르세'의 장녀로 태어난 '키르케'는 티탄 신족의 핏줄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확실히 기존의 신들과는 다르다. 강력한 아버지로부터 아무것도 물려받지 못한 딸은 부모에게 실망을 안기고, 수많은 가족들로부터 철저히 외면받는다. 무시와 경멸을 복수의 자양분으로 삼을 수도 있었지만, 그러기에 어린 '키르케'는 너무 순진했다. 그렇게 '키르케'는 태초부터 신의 지위와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인간과 신 사이 "공포의 연쇄 관계"를 깨부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된다.


'키르케'는 욕망과 이를 얻고자 하는 과정에서 발현된 질투심에 의해 자신의 재능을 발견한다. 여성과 질투, 그건 신화 안에서 끝없이 반복되는 뻔한 클리셰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위에서 지적했다시피 '키르케'는 압도적인 기세를 자랑하는 신들과는 전혀 다른 무언가다. "모든 신이 똑같을 필요는 없어.(81쪽)" 먼 친척인 '프로메테우스'에게서 어릴 때 들었던 이 한 마디는 평생 동안 '키르케'의 내면 안에서 공명하며, 그녀 삶의 주축이 되어준다. 그렇기 때문에 '키르케'는 신들과는 다르게 부정적인 감정에서 비롯된 처참한 결과와 잘못된 행동이 불러온 수치심을 받아들이고 반성하는 방식을 택한다. 후회와 반성 등은 '키르케'가 신보다는 인간과 더 가깝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무너뜨려, 나는 생각했다. 무너뜨리고 다시 지어.(248쪽)

욕망과 질투가 '키르케'에게 아픔만 가져다준 것은 아니다. 그녀는 자신 안에 갇혀 있던 '마녀'로서의 자아를 획득하고 새롭게 태어난다. 그녀의 유일한 능력마저도 신의 능력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획득된다. 신적인 능력에 비하면 마법은 그야말로 고역이었다. 시도하고, 오류를 수정하고, 번번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키르케'는 끈질기게 마법에 매달린다. 마법은 그녀의 생애 동안 그녀에게 주어진 거의 유일한 기회이기 때문이다. 마법으로 그녀는 비로소 신에게 대적할 만한 무기를 손에 쥘 수 있었고, 돌아갈 만한 곳이 못 되었던 가족들을 대신해 자신의 평안을 지켜줄 힘을 얻을 수 있었다.


유배지 '아이아이에'에서 얻던 평안은 그러나, 한여름 밤의 꿈에 불과하기도 했다. 그녀는 자신의 동반자인 고독과 또다시 마주해야만 했다. 고독한 삶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어 보였던 '키르케'의 삶에 '오디세우스'와 '텔레고노스', 끝으로 '텔레마코스'가 나타나면서 전혀 다른 길로 빠져들기 시작한다. 그녀는 셀 수도 없이 많은 시간 동안 갇혀 있던 땅에서 벗어나 세상과 다시 한번 연결된다. 그렇게 되기까지 숱한 위협과 두려움을 견뎌내야 했지만, 결론적으로 봤을 때 그건 분명 견딜만한 가치가 있는 시간들이었다. '오디세우스'부터 '텔레마코스'를 거치면서 '키르케'는 신의 발아래 있던 시간들에 마침내 지긋지긋함을 느끼고,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 거듭난다. "하지만 그건 남들이 나를 억지로 끼워 맞춘 틀에 불과했다. 이제 그 안에 갇혀 있을 필요가 없었다.(485쪽)" 완벽한 신이 아닌 데서 오는 괴로움, 인간들로부터 대접받는 데 느끼던 불편함, 뒤틀린 과거가 만들어낸 수치심 등은 이제 그녀를 옭아맬 수 없다. 작가 '매들린 밀러'가 '키르케'의 마지막에 관해 암시만을 주었으므로, 우리는 '키르케'가 어떻게 될지에 대해서 수만 가지의 상상을 할 수 있다. 그녀가 인간과 신 둘 중에 어떤 존재로서의 미래를 택하게 될지는 중요하지 않다. 무엇보다 이제 그녀는 "죽은 존재"로서 살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이 『키르케』가 가진 유일하고 가장 강력한 위안이다.

하지만 고독한 삶을 살다보면 별들이 일 년에 하루 땅을 스치고 지나가듯 아주 간혹 누군가의 영혼이 내 옆으로 지는 때가 있다. 그가 내게 그런 별자리와 같은 존재였다. - P198

그래도 아무 소용 없었다. 나는 혼자 사는 여자였고 중요한 건 그뿐이었다. - P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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