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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불호텔의 유령
강화길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8월
평점 :
원한과 악의로 가득 찬 세상을 둘러싼
강화길식 고딕 호러!

악의 그 자체로 존재하는 '대불호텔'
원한에 잠식될 것인가, 벗어날 것인가
그런 건 선택하는 게 아니야.
어차피 원한은 나를 찾아와.
그것들이 나를 선택하는 거야.(234쪽)
지금까지의 책 읽기는 고딕 소설이라는 장르와 한참 먼 위치에 서있었다. 나와 고딕 소설 사이의 공백을 뚫고 작가 강화길이 들어온다. 이전에는 고딕의 세계에 대한 암시에 불과했다면, 『대불호텔의 유령』은 본격적인 시작에 가깝다. '강화길식 고딕 호러'의 핵심이 된 악의와 원한은 소설 안에서 기세등등하게 인간들 위에 군림한다. 인간들은 처음엔 악마의 목소리를 거부하지만, 그러다가도 어느새 한 몸이 되어 버린다. 한국에서 소위 '한'으로 불리는 악의와 원한은 기괴하고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면서도 동시에 우리를 어렵지 않게 매혹시킨다. 극한의 부정적인 감정들을 우리가 수용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때로 환호하며 반기기까지 하는 것은 우리가 그리고 그들이 "이 세상에서. 이런 세상에서.(263쪽)" 태어났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보편의 질서로부터 분리되어 철저히 고립된 소설 속 인물들은 뿌리 깊은 원한과 세상을 향한 증오를 느끼고, 이를 기반으로 무시무시한 악의를 품는다. 악의, 의심, 증오, 원한… 이 모든 것은 인천에 있는 대불호텔에서 시작되었다. 악의 그 자체로 존재하며 사람들을 갉아먹는 대불호텔의 목소리로부터 우리는 잠식될 것인가, 이와 반대로 거기로부터 벗어나 우리만의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인가. 벗어난다고 해도 지난한 과정이 될 것이다. 악의와 원한에게는 마음을 내어주기가 언제나 더 쉽기 때문이다.
"대체 나는 무엇을 기대했던가. 무엇에 매혹되었던가.(173쪽)" 악의와 원한에 잠식되는 동안 우리를 사로잡는 것은 이런 질문들이다. 물론 삶이 더 나아지는 데 희망을 걸었던 날들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태어난 '이런 세상'은 감당하기 어려운 상실의 경험을 통해 모든 것이 언제든 무너질 수 있고, 영원한 건 없다는 사실을 번번이 일깨워 준다. 그러니까 우리는 추락 후에 느껴지는 고통의 크기를 줄이기 위해 무언가에 애착을 갖기보다 증오하고 의심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하지만 누군가는 사랑이라는 덧없는 기억을 붙잡기 위해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믿으면 삶에게 배신당하게 될 것임을 알면서도 외롭고 고독한 자신을 받아들이고 기꺼이 삶의 주체로 나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악의 꽃 위에서도 꿋꿋이 살길을 도모한다. 다양한 모습과 목소리로 나타나 끈질기게 생명의 흔적을 지워버리는 '악'에 대항하려는 그들의 얼굴은 결연한 표정을 짓고 있지 않다. 5년, 10년 후의 미래를 그리는 비장함이 아니라 코앞의 하루하루를 견디고 자신이 발 디딘 곳을 사랑하며 지켜나가려는 묵묵한 의지만이 있을 뿐이다. 악의나 원한 따위에 내줄 시간은 없다는 듯 바쁘게 살아가며 사소한 행복을 추구하는 이들의 매일매일은 익숙한 구석이 있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영영 좌절된 열망과 회복되지 못할 내면의 아픔에 짓눌리는 기분이 든다. 그건 어떤 악의나 원한보다도 더 깊게 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고, 지금도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이 책은 결국 모든 악의와 원한이 극복될 것이라는 어떤 암시다. 감정의 해소는 어쩌면 실망스럽게도 '사랑'으로부터 온다. 사랑이라는 감정의 존재를 깨닫고, 이를 행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작가 강화길은 한발 더 나아가 자신의, 우리의 이야기를 적어 내려가기 시작한다.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성실과 집요함의 DNA로 그저 하루하루의 이야기를 채워나간다. '사랑'에 대한 인식보다도 지금 여기에 집중하는 삶의 태도가 우리를 악의와 원한으로부터 떼어 놓는다. 악의와 원한으로 가득 찬 대불호텔이라는 함정에 깊이 빠져들어 있다가 마침내 출구를 되찾아 걸어 나온 우리는 이전보다 여유로운 활기를 띤다. 이제 어떤 사사로운 감정도 우리를 망쳐놓을 수 없고, 우리 자신의 삶을 우리의 뜻대로 밀고 나아갈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의 항해 끝에는 웃음이 있을 것이다. "나는 내 배의 선장이다. 웃을 수 있다.(I am the captain of my fate. Laughter is possible.)(305쪽)" 이 말 하나를 마음에 새기기 위해 대불호텔의 시간을 지나왔다.
그리고 어디선가 또다른 목소리가 들린다. 지나간 시간, 역사, 그곳을 거쳐간 사람들의 기억으로 남아 건물 자체가 된 모든 이들의 목소리. 그리고 그 이야기를 상상하는 사람의 목소리. 그들이 행복하기를 바라고, 원하는 것을 이루기를 바라고, 그리하여 원한을 사랑으로 바꾸는 삶으로 걸어들어가기를 바라는 사람의 목소리. - P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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