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의 속도
엘리자베스 문 지음, 정소연 옮김 / 푸른숲 / 2021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모든 아기들은 자폐로 태어난다. 우리 모임 사람이 예전에 말한 적이 있다. 우리는 신경질적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동의했지만, 동의한다고 말하는 것은 위험했다.(64쪽)


『어둠의 속도』는 근미래에 태어난 자폐인의 일인칭 시점에서 쓰였다. 실제로 자폐인인 아이를 둔 작가 '엘리자베스 문'은 큰 이질감 없이 '루'의 시선을 표현해 냈다. 처음엔 '루'가 이해하지 못하는 '정상인'들 특유의 행동을 설명하고 싶은 충동에 휩싸인다. 이전의 작품들과 다를 바 없이 밖에서 안으로 자폐인을 관찰하는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다. 하지만 소설을 읽을수록 우리 안에서 '루'를 점점 더 많이 발견할 수 있다. 내재되어 있던 자폐적인 특성은 정상인과 비정상인의 경계를 쉽게 지워버린다. 특히 패턴을 분석하는 등의 문제에서 보통의 사람보다 천재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루'를 보면서 그가 '정상인'보다 모자라다는 사실을 납득하기 어려웠다. 특수한 능력이나 '정상인'처럼 보이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루'를 비롯한 자폐인들은 충분히 인정받지 못했다. 소설 속에서 '루'와 동료들이 제안받은 '정상화 수술'이 그 증거이다. 그들은 언제나 변화하기를, '정상인'과 같아지기를 강요받았다.


'정상인'처럼 말하고 행동하고 섞여 들어야 한다는 가르침에 따르면서도, '루'는 끊임없이 정상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정상인'의 범주에 속해 있으면서도, '루'의 질문에 답하기란 꽤 어렵다. '루'를 지켜보고 있으면 혼란은 점차 가중된다. 소설 속에서 '루'는 자폐인이고, '비정상인'이지만, 내가 본 '루'는 가끔은 이해할 수 없는 독특한 '정상인' 친구 정도다. '루' 또한 자기 자신에 대해 잘못된 점이 없다고 믿는다. 가끔 어떤 특별한 상황에 있어서 '정상인'들의 체계를 이해할 수 없을 때의 불편함만 제외한다면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회사가 제안한 '정상화 수술'을 '루'는 선뜻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는 자폐증이 자신의 일부에 불과하며, 자신 또한 남들과 마찬가지로 자신만의 패턴을 형성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루'처럼 자신이 이제까지 만들어 온 패턴이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제거될 필요는 없다고 느끼느냐, 혹은 자신의 패턴이 다른 사람과 동일해지고, 무리 안에 잘 섞일 수 있기를 바라느냐가 '정상화 수술' 논란의 핵심이다.




'루'는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나아가기를, 위험을 감수하기를, 새로운 친구를 찾기를, 지금의 내가 되기를 선택했다.(501쪽)" 결과의 성패와 관계없이 '루'가 어떤 상황에서든 자기 자신이기를 바라고, 이를 지켜내려 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루'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 목숨처럼 중요하게 생각하던 고정된 패턴을 버리고, 불확실한 자유낙하를 시작하는 용기를 보여 주었다. 그는 자신의 의지에 따라 적극적으로 빛을 쫓았고, 세상으로부터 자신의 본질을 지키면서도 자신이 원하던 위치에 도달했다. 『어둠의 속도』는 '정상인'이 우월하기 때문에 '비정상인'이 '정상인'으로서의 삶을 획득하려는 이야기가 아니다.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타인이 아닌 자신의 기준에서 더 나은 자기 자신이 되기를 바라던 한 사람의 질문과 그에 대한 대답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킹덤
요 네스뵈 지음, 김승욱 옮김 / 비채 / 2021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킹덤. 오프가르 농장은 우리 왕국이다, 아빠는 항상 이렇게 말했어요. 칼과 내가 이 땅의 주인이 되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봐 걱정하는 사람처럼.(674~5쪽)


『킹덤』을 읽는 동안 무엇 하나도 제대로 예측할 수가 없었다. 사건의 진상을 어느 정도 파고들었다 싶으면 작가 '요 네스뵈'는 다음 장에 이르러서 손쉽게 독자의 예상을 뒤엎었다. 독자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다. 우리는 그저 초조하게 책장을 넘기며 결말에 하루빨리 도달할 수 있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 『킹덤』의 예비 독자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모든 문장이 복선이 되므로 어떤 문장도 허투루 보지 말라는 말뿐이다. 작가가 '요 네스뵈'인 이상 700여 페이지는 결코 많지 않다. 마지막 페이지에 도달하는 순간 앞 장에 있었던 복선들에 관한 명확한 깨달음이 찾아온다.


죽어가는 한 마리의 개와 자신의 일에 죄책감을 느끼는 동생 '칼', 그리고 마음이 여린 동생을 대신해 행동을 실행에 옮기는 형 '로위'. 그날 '오프가르 왕국'의 서막이 열렸다. 이후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마다 형제는 아버지의 격언을 떠올린다 :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을 하라. 모든 것은 여러분의 손에 달렸다. 미루지 말고 지금.(685쪽)" 그리고 일은 지겹도록 똑같이 반복된다. 숲에서 개를 죽이던 때로부터 '오프가르' 형제는 한 발짝도 멀어지지 않았다. 그들이 일을 벌이는 데 있어서 '가족'은 가장 강력한 동기가 된다. 아버지는 세상과 맞설 때 '가족'이라는 집단만이 실제로 손에 쥘 수 있는 유일한 무기임을 강조했다. '로위'와 '칼' 사이의 단단한 결속은 아버지의 말이 사실이었음을 입증한다. 하지만 아버지는 중요한 한 가지를 언급하지 않았다. '가족'이라는 무기는 '오프가르' 형제를 방해하는 세상을 벨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 자신을 갉아먹기도 한다는 점이다.



부엌에서 당신이 바베이도스 이야기를 할 때, 사람들이 원칙보다는 가족과 감정에 더 충실하다고 믿는다는 말을 한 것 같은데요. 정치적 견해나 옳고 그름에 대한 인식도 나중이라고. 내가 제대로 알아들은 겁니까?(208쪽)

겉으로는 작고 한심한 농장에 불과하지만, 아버지는 '오프가르' 가의 농장을 '킹덤'으로 명명했다. 왕국의 발아래에 묻혀 있는 비밀의 깊이를 떠올린다면, '킹덤'은 농장에 꽤 걸맞은 이름이다. '킹덤'의 하부에 비밀을 하나씩 파묻을 때마다 '오프가르' 형제는 누가, 언제, 어떻게 일을 저질렀든 간에 '우리'로서 문제를 해결한다. '가족'과 '우리'라는 위험한 울타리는 『킹덤』을 이루는 강력한 울타리다. 후반부에 이르면 울타리의 범위는 마을 사람들 전체로까지 확대된다. 그들은 같은 부모, 같은 고향이라는 뿌리 위에 집단을 형성하고 자신의 무리에 기꺼이 충성하며, 필요하다면 그 집단만을 위한 도덕을 재형성한다. 사람들이 지금 여기에서 얼마나 많은 분열을 조장하고, 개인의 이익을 우선시하는지 생각한다면 그들의 방식은 선뜻 받아들이기 어렵다. 한편으로는 조직과 동료를 향한 맹목적인 충성이 무리를 형성하고 그 안에서 안정과 애정을 얻기를 원하는 또 다른 우리와 닮아있다고 느끼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가 흔히 알던 상식이 '킹덤' 안에서는 통용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소설은 적당한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그렇기 때문에 '오프가르 왕국'이 마침내 완벽하게 무너지기를 바라기도 했다.





배반과 분열의 조짐에도 불구하고 '킹덤'의 수명은 끈질기게 연장된다. 이제 이야기가 끝났나 싶어 한숨을 돌리면 또 다른 이야기가 밝혀지고 같은 일이 반복된다. 영원히 지치지 않는 원 안에 '킹덤'은 갇혀있는 것만 같다. '킹덤'의 구성원 또한 불가변적이다. 거기엔 '로위 오프가르'와 '칼 오프가르' 단둘만이 존재한다. 가족 간의 유대와 의리가 이토록 몇 번씩이나 고비를 넘길 수 있다는 데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보편적인 도덕적 기준을 벗어난 '오프가르' 가의 왕국에 언젠가는 정의가 실현될 수 있을까. 소설의 결말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도덕이 지금처럼 굳건하게 제자리를 지킬 수 있으리란 확신을 얻을 수 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킹덤
요 네스뵈 지음, 김승욱 옮김 / 비채 / 2021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스의 산에서 우리는 쓰러져도 함께 쓰러지고, 일어서도 함께 일어설 겁니다.(665쪽)


인적이 드문 오스에서 주민들은 좋든 싫든 가족 같은 관계로 한데 묶여 있다. '칼'이 벌인 호텔사업에 투자한 순간 그들은 더욱 밀접하게 결속되었다. 한편으로, 마을에서 벌어진 온갖 사건과 죽음들의 미스터리를 파헤치려는 움직임이 계속된다. '오프가르' 왕국 안과 밖의 가족 관계는 이렇듯 줄타기를 하는 것처럼 불안한 모양새다. 같은 고향, 같은 부모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이유로 그들은 어떻게든 함께 나아간다. 가족 간의 강한 유대와 의리가 도덕을 넘어버릴 수 있다는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그리고 그들 간의 거리가 너무 가깝기 때문에 생겨나는 파괴적이고 부도덕적인 장면들이 두렵다. 너무 많은 비밀을 안고 있는 '오프가르'의 '킹덤'은 이제 무너져야 할지도 모르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킹덤
요 네스뵈 지음, 김승욱 옮김 / 비채 / 2021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가 말하려는 건, 행동의 동인으로서 도덕이 인간 사회에서 과대평가되어 있다는 것뿐이에요. 반면 같은 무리에 대한 우리의 충성심은 과소평가되었고요. 우리는 자신이 속한 집단이 위협을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 우리의 목적에 맞는 도덕을 형성해요.(342~3쪽)


사건은 예상보다 복잡한 양상을 띠며 진행된다. 이전 단계에서 확신을 가지고 남겼던 리뷰를 오늘에 이르면 지워버리고 싶은 충동에 시달린다. 작가 '요 네스뵈'는 독자가 확신하던 사건의 흐름을 다음 장에 손쉽게 뒤집어 놓음으로써 어떤 것도 우리에게 완벽한 진실이 되어줄 수 없음을 시사한다. 그 가운데서 어린 '로위'와 '칼'에게 심어졌던 가족에 대한 굳건한 믿음은 여전히 유지된다. '로위'와 '칼'에게 '가족'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근거이자 따라야 할 유일한 진리이다. 세상에 맞설 유일한 무기인 '가족'이라는 울타리도 결국은 무너져 내리게 될까. 끝에 다다를수록 사건의 전말이 드러나는데, 앞선 의심에서 확신을 가졌던 지점들이 결국엔 잘못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으므로, 『킹덤』의 세계에서는 무엇도 단언할 수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A Killer's Wife 킬러스 와이프 라스베이거스 연쇄 살인의 비밀 1
빅터 메토스 지음, 최호정 옮김 / 키멜리움 / 2021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킬러스 와이프』는 말 그대로 한 번 읽기 시작하면 단숨에 끝을 봐야 하는 소설이다. 법조인으로 활약했던 작가답게 소설은 높은 단계의 현장감과 긴박감을 조성하여 독자들을 삽시간에 몰입시킨다. 또한, 사건의 진실이 전부 드러났다고 생각하는 순간 소설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우리를 놀라게 한다. 미스터리 스릴러 전문 출판사 '키멜리움'의 첫 출판물이자 2020 하퍼 리 상 수상 작가인 '빅터 메토스'의 첫 한국어 번역본인 『킬러스 와이프』의 등장은 '법정 스릴러'를 향한 독자들의 니즈를 완벽하게 충족시킨다.


연방검사 '제시카 야들리'는 『킬러스 와이프』의 주축을 담당하는 인물이다. '제시카 야들리'가 법질서를 수호하는 인물이라면, 그녀의 전 남편인 '에디 칼'은 전혀 다른 행보를 보인다. '에디 칼'은 사형선고를 받을 만큼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른 연쇄살인범이다. "현대 심리학은 이제 악을 이야기하는 대신 비정상적인 행동을 유발하는 어린 시절의 기억과 뇌의 손상을 말(6쪽)"하지만, '에디 칼'은 불운한 어린시절과는 거리가 멀다. "죽음을 향한 파괴적 충동(7쪽)"을 제어하는 데 실패한 악의 현현. 그 말 이외에 '에디 칼'을 묘사할 수 있는 단어는 없다.

인간은 본래 자신과 반대되는 인물에게 끌린다고 하지만, '에디 칼'과 '제시카 야들리'와 같은 극적인 조합은 여전히 생소하고, 그 때문에 소설에 대한 독자들의 흥미는 배가된다. '에디 칼'의 모방범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FBI 요원 '볼드윈'을 비롯한 사람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제시카 야들리'에게 달려온다. 그런 종류의 사람을 알아볼 수 있는 능력이 그녀에게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타라, 사람들의 장점을 찾아내서 그걸 악용하는 남자들이 있어. 연민의 감정, 용서하는 마음, 배려심, 측은지심, 사랑, 그들은 이런 것들을 갈구하고 그걸 너한테 악용하는 거지. 하지만 그런 성정은 약점이 아니야. 그런 성정은 네가 가진 힘이고 어떤 누구도 네가 거기에 반하는 일을 하도록 만들지는 못해.(223쪽)


싸이코패스 '에디 칼'이 떠나간 자리에 '제시카 야들리'와 그들의 딸 '타라'가 남았다. '제시카 야들리'와 '타라'는 살인범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자신들을 향해 쏟아지는 무자비한 추측이나 맥락 속에 숨겨진 비난을 견뎌내야만 한다. 하지만 '제시카 야들리'와 '타라'는 질 나쁜 인간을 알아보지 못한 피해자의 위치에 자신들을 고정하지 않는다. 과거를 마주할 때마다 끊임없이 아찔함을 느끼면서도, '에디 칼'이라는 세상을 직면하고 맞서 싸운다. 그들은 이번엔 멍청하게 당하지 않기 위해, 더 나아가 자신과 같은 사람들이 생겨나는 일을 막기 위해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싸움에 끼어든다. 그들은 자신들의 선함을 악용한 남자들에게 순순히 굴복하지 않고, 생각지도 못한 때에 지적인 일격을 가한다.

'제시카 야들리'와 '타라'는 살인범의 가족이라는 포지션 이외에 여성으로서의 소수자성 또한 가지고 있다. 소설 속에서 '제시카 야들리' 검사와 '애그비' 판사는 자신들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배제되고 차별받는 상황들에 대해 고충을 토로하기도 했다("만약 제가 남자라면 저에게 지금 배석 검사가 되어 그에게 물건들을 건네주라고 하시겠어요?(332쪽)", "법원에 부임하고서 첫 재판에서 판사가 바지를 입었다고 내게 고함을 지르더군. 그는 여자들은 이미 충분한 권리를 부여받았다고. 자기 법정에서 여자들이 남자처럼 보인다면 기분이 엿 같을 거라고 말이야.(382쪽)"). 이렇듯 '살인범의 가족', 그리고 '여성 검사'로서의 이중적인 위치 때문에 '제시카 야들리'의 성과는 독자에게 더 큰 스릴을 선사한다.


『킬러스 와이프: 라스베이거스 연쇄살인의 비밀』은 법정 스릴러 장르 특유의 교묘한 머리 싸움 때문에 영화화가 기대되는 작품이기도 하다. 또한, 작품을 끝까지 읽은 독자라면 '타라'를 중심으로 한 또 하나의 작품이 집필되기를 나처럼 바라 마지 않을 것이다. '에디 칼'과 '제시카 야들리'는 살인범과 연방검사로서 기묘합 조합처럼 여겨졌지만,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타라'는 부모 세대의 간극이나 그들에게 부여된 평가를 뛰어넘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타라'가 중심이 된 또 하나의 세계는 독자의 예측을 번번이 벗어나면서 차원이 다른 흥미로운 전개를 선보이지 않을까 기대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