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신
사샤 스타니시치 지음, 권상희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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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출신>을 처음 접했을 때 내가 떠올린 건 '계급 투쟁'의 이미지였다. 천한 출신이기 때문에 겪어야만 했던 비극을 담았으리란 추측을 했다. 그러나 이 책은 작가 사샤 스타니시치의 자전적 소설로, 자신의 지역적 출신, 즉 고향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유고슬라비아의 붕괴로 독일로 도망쳐 와 이민자 신분으로 살아가는 일에 관해 묘사한 작품이다. 현 시국에서 지역적 출신을 논하는 것이 나는 옳은 일로 느껴진다. 유럽과 미국 등지에서 아시아인은 '출신'을 이유로 코로나19 감염자로 여겨져 차별받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인종차별 문제가 두각을 드러내고 있는 시기에 '출신'을 근거로 한 차별과 아픔을 담은 소설 <출신>을 읽는다는 건 자연스럽고, 당연한 수순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출신으로 인해 차별받아 본 경험이 없어서 그것이 문제가 될 수도 있음을 간파하지 못했다. 유럽이나 미주 지역을 여행한 적도 없고, 국내에서도 나는 서울에서 태어나 줄곧 자라왔으므로 출신이 민감한 이슈로 떠오를 이유가 없었다. 타인의 경험이나 의견이라면 여러 매체를 통해 전달받았으나, 역시 나와 직접적 연관이 없는 일에 지속적인 관심을 두기란 어려웠다. 그러니까 사샤 스타니시치의 자전적인 경험을 읽어내는 건 개인적으로도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겉으로만 난민과 이민자의 인권을 옹호하지 않고, 그들과 깊이 공명할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외국인의 신분으로 타국에서 지낸다는 게 어떤 일인지는 나로서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내게는 일이 틀어졌을 때 도망칠 만한 안정적인 기반이 존재했다. 전쟁으로 떠밀려와 어떻게든 타국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저자의 삶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는 상황을 판단할 겨를도 없이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고, 언어와 문화에 관한 무지를 극복하기 위해 갖은 애를 써야 했다. 이전 국가에서의 노력은 존중받지 못하고, 철저히 외국인이라는 낮은 신분에서 배제되고, 차별받는 삶을 살았다. 수많은 방법을 동원해 잠시 동안 생존을 보장받더라도, 언제 쫓겨날지 알 수 없는 생활은 끔찍하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고향은 보스니아 전쟁으로 피폐해졌고, 돌아간다면 정신적으로 불안한 나날을 보내야 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소설 속에서 저자는 자신이 탈출했던 고향으로 돌아가서 과거를 되짚는다. 그렇게 황망히 자신의 출신지를 떠나오면서 그는 자신의 유년 시절이 깃든 공간과 그곳에 남겨진 이들에 대한 죄책감을 느껴왔다고 털어놓는다. 따라서 떨쳐내려고만 했던 과거와 제대로 마주하고, 더 이상 얽매이지 않기 위해서 고향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일은 필연적이고, 언젠가는 반드시 행해져야만 하는 일이었다. 그는 소설 쓰기라는 명분을 통해 그럴 기회를 획득한다.

출신을 탐구한다는 것은 자신의 삶뿐 아니라, 부모와 조상들의 인생을 들여다보는 시도로 완전해진다. 그곳에 머물렀던 이들의 삶을 기록하는 것으로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나라의 역사가 존속될 것이다. 저자는 공간을 되살릴 수는 없지만, 사람들의 이야기를 종이 위에 꺼내 놓는 것으로 고향을 내팽개쳤다는 죄책감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지 않았을까. 비록 불가피한 선택이었고, 스스로도 독일에서 난민으로 살면서 갖은 고통을 겪었다 할지라도, 자신만 행운을 누렸다는 생각은 사샤 스타니시치를 꽤 괴롭혔던 듯하다. 같은 '민족'이라는 거대하고 추상적인 단어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그에게 고향 사람들은 자신의 가족이자 오래된 친구였기 때문이다.

글로벌 시대, 지구촌이라는 관념이 등장한지 무척 오래되었음에도, 지역적 경계가 허물어지지 않고 있는 현실은 안타깝기 그지없다. 아무런 해를 가하지 않은 사람들이 '출신'을 근거로 일방적으로 공격을 당하고, 멸시받는 이유가 개인적으로는 여전히 불가해하다. 그들은 출신적 차이에서 어떤 실존적 위협을 느끼고 있을까. 한국에도 출신이라는 경계가 아직도 남아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계기이기도 하다. 지금의 인종차별에서 아시아인이 피해자의 입장에 서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문제와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처럼 보도화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지역적 출신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들을 공평하게 포용해 왔던가,라는 질문에 자신감 있게 그렇다고 대답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지역적 경계를 허물고, 진정한 지구촌을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지금 사샤 스타니시치의 <출신>을 읽어야 한다.

어디 출신이든 잘못된 출신은 없었다. 그러나 출신을 둘러싸고 마침내 민족 간 불꽃이 튀기 시작했다 - P133

유고 사람들 대부분은 출신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이 일이 별거 아니라는 사람은 문제가 있다. 차별은 결코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 P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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