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덤
요 네스뵈 지음, 김승욱 옮김 / 비채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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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덤. 오프가르 농장은 우리 왕국이다, 아빠는 항상 이렇게 말했어요. 칼과 내가 이 땅의 주인이 되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봐 걱정하는 사람처럼.(674~5쪽)


『킹덤』을 읽는 동안 무엇 하나도 제대로 예측할 수가 없었다. 사건의 진상을 어느 정도 파고들었다 싶으면 작가 '요 네스뵈'는 다음 장에 이르러서 손쉽게 독자의 예상을 뒤엎었다. 독자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다. 우리는 그저 초조하게 책장을 넘기며 결말에 하루빨리 도달할 수 있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 『킹덤』의 예비 독자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모든 문장이 복선이 되므로 어떤 문장도 허투루 보지 말라는 말뿐이다. 작가가 '요 네스뵈'인 이상 700여 페이지는 결코 많지 않다. 마지막 페이지에 도달하는 순간 앞 장에 있었던 복선들에 관한 명확한 깨달음이 찾아온다.


죽어가는 한 마리의 개와 자신의 일에 죄책감을 느끼는 동생 '칼', 그리고 마음이 여린 동생을 대신해 행동을 실행에 옮기는 형 '로위'. 그날 '오프가르 왕국'의 서막이 열렸다. 이후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마다 형제는 아버지의 격언을 떠올린다 :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을 하라. 모든 것은 여러분의 손에 달렸다. 미루지 말고 지금.(685쪽)" 그리고 일은 지겹도록 똑같이 반복된다. 숲에서 개를 죽이던 때로부터 '오프가르' 형제는 한 발짝도 멀어지지 않았다. 그들이 일을 벌이는 데 있어서 '가족'은 가장 강력한 동기가 된다. 아버지는 세상과 맞설 때 '가족'이라는 집단만이 실제로 손에 쥘 수 있는 유일한 무기임을 강조했다. '로위'와 '칼' 사이의 단단한 결속은 아버지의 말이 사실이었음을 입증한다. 하지만 아버지는 중요한 한 가지를 언급하지 않았다. '가족'이라는 무기는 '오프가르' 형제를 방해하는 세상을 벨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 자신을 갉아먹기도 한다는 점이다.



부엌에서 당신이 바베이도스 이야기를 할 때, 사람들이 원칙보다는 가족과 감정에 더 충실하다고 믿는다는 말을 한 것 같은데요. 정치적 견해나 옳고 그름에 대한 인식도 나중이라고. 내가 제대로 알아들은 겁니까?(208쪽)

겉으로는 작고 한심한 농장에 불과하지만, 아버지는 '오프가르' 가의 농장을 '킹덤'으로 명명했다. 왕국의 발아래에 묻혀 있는 비밀의 깊이를 떠올린다면, '킹덤'은 농장에 꽤 걸맞은 이름이다. '킹덤'의 하부에 비밀을 하나씩 파묻을 때마다 '오프가르' 형제는 누가, 언제, 어떻게 일을 저질렀든 간에 '우리'로서 문제를 해결한다. '가족'과 '우리'라는 위험한 울타리는 『킹덤』을 이루는 강력한 울타리다. 후반부에 이르면 울타리의 범위는 마을 사람들 전체로까지 확대된다. 그들은 같은 부모, 같은 고향이라는 뿌리 위에 집단을 형성하고 자신의 무리에 기꺼이 충성하며, 필요하다면 그 집단만을 위한 도덕을 재형성한다. 사람들이 지금 여기에서 얼마나 많은 분열을 조장하고, 개인의 이익을 우선시하는지 생각한다면 그들의 방식은 선뜻 받아들이기 어렵다. 한편으로는 조직과 동료를 향한 맹목적인 충성이 무리를 형성하고 그 안에서 안정과 애정을 얻기를 원하는 또 다른 우리와 닮아있다고 느끼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가 흔히 알던 상식이 '킹덤' 안에서는 통용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소설은 적당한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그렇기 때문에 '오프가르 왕국'이 마침내 완벽하게 무너지기를 바라기도 했다.





배반과 분열의 조짐에도 불구하고 '킹덤'의 수명은 끈질기게 연장된다. 이제 이야기가 끝났나 싶어 한숨을 돌리면 또 다른 이야기가 밝혀지고 같은 일이 반복된다. 영원히 지치지 않는 원 안에 '킹덤'은 갇혀있는 것만 같다. '킹덤'의 구성원 또한 불가변적이다. 거기엔 '로위 오프가르'와 '칼 오프가르' 단둘만이 존재한다. 가족 간의 유대와 의리가 이토록 몇 번씩이나 고비를 넘길 수 있다는 데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보편적인 도덕적 기준을 벗어난 '오프가르' 가의 왕국에 언젠가는 정의가 실현될 수 있을까. 소설의 결말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도덕이 지금처럼 굳건하게 제자리를 지킬 수 있으리란 확신을 얻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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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Killer's Wife 킬러스 와이프 라스베이거스 연쇄 살인의 비밀 1
빅터 메토스 지음, 최호정 옮김 / 키멜리움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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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러스 와이프』는 말 그대로 한 번 읽기 시작하면 단숨에 끝을 봐야 하는 소설이다. 법조인으로 활약했던 작가답게 소설은 높은 단계의 현장감과 긴박감을 조성하여 독자들을 삽시간에 몰입시킨다. 또한, 사건의 진실이 전부 드러났다고 생각하는 순간 소설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우리를 놀라게 한다. 미스터리 스릴러 전문 출판사 '키멜리움'의 첫 출판물이자 2020 하퍼 리 상 수상 작가인 '빅터 메토스'의 첫 한국어 번역본인 『킬러스 와이프』의 등장은 '법정 스릴러'를 향한 독자들의 니즈를 완벽하게 충족시킨다.


연방검사 '제시카 야들리'는 『킬러스 와이프』의 주축을 담당하는 인물이다. '제시카 야들리'가 법질서를 수호하는 인물이라면, 그녀의 전 남편인 '에디 칼'은 전혀 다른 행보를 보인다. '에디 칼'은 사형선고를 받을 만큼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른 연쇄살인범이다. "현대 심리학은 이제 악을 이야기하는 대신 비정상적인 행동을 유발하는 어린 시절의 기억과 뇌의 손상을 말(6쪽)"하지만, '에디 칼'은 불운한 어린시절과는 거리가 멀다. "죽음을 향한 파괴적 충동(7쪽)"을 제어하는 데 실패한 악의 현현. 그 말 이외에 '에디 칼'을 묘사할 수 있는 단어는 없다.

인간은 본래 자신과 반대되는 인물에게 끌린다고 하지만, '에디 칼'과 '제시카 야들리'와 같은 극적인 조합은 여전히 생소하고, 그 때문에 소설에 대한 독자들의 흥미는 배가된다. '에디 칼'의 모방범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FBI 요원 '볼드윈'을 비롯한 사람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제시카 야들리'에게 달려온다. 그런 종류의 사람을 알아볼 수 있는 능력이 그녀에게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타라, 사람들의 장점을 찾아내서 그걸 악용하는 남자들이 있어. 연민의 감정, 용서하는 마음, 배려심, 측은지심, 사랑, 그들은 이런 것들을 갈구하고 그걸 너한테 악용하는 거지. 하지만 그런 성정은 약점이 아니야. 그런 성정은 네가 가진 힘이고 어떤 누구도 네가 거기에 반하는 일을 하도록 만들지는 못해.(223쪽)


싸이코패스 '에디 칼'이 떠나간 자리에 '제시카 야들리'와 그들의 딸 '타라'가 남았다. '제시카 야들리'와 '타라'는 살인범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자신들을 향해 쏟아지는 무자비한 추측이나 맥락 속에 숨겨진 비난을 견뎌내야만 한다. 하지만 '제시카 야들리'와 '타라'는 질 나쁜 인간을 알아보지 못한 피해자의 위치에 자신들을 고정하지 않는다. 과거를 마주할 때마다 끊임없이 아찔함을 느끼면서도, '에디 칼'이라는 세상을 직면하고 맞서 싸운다. 그들은 이번엔 멍청하게 당하지 않기 위해, 더 나아가 자신과 같은 사람들이 생겨나는 일을 막기 위해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싸움에 끼어든다. 그들은 자신들의 선함을 악용한 남자들에게 순순히 굴복하지 않고, 생각지도 못한 때에 지적인 일격을 가한다.

'제시카 야들리'와 '타라'는 살인범의 가족이라는 포지션 이외에 여성으로서의 소수자성 또한 가지고 있다. 소설 속에서 '제시카 야들리' 검사와 '애그비' 판사는 자신들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배제되고 차별받는 상황들에 대해 고충을 토로하기도 했다("만약 제가 남자라면 저에게 지금 배석 검사가 되어 그에게 물건들을 건네주라고 하시겠어요?(332쪽)", "법원에 부임하고서 첫 재판에서 판사가 바지를 입었다고 내게 고함을 지르더군. 그는 여자들은 이미 충분한 권리를 부여받았다고. 자기 법정에서 여자들이 남자처럼 보인다면 기분이 엿 같을 거라고 말이야.(382쪽)"). 이렇듯 '살인범의 가족', 그리고 '여성 검사'로서의 이중적인 위치 때문에 '제시카 야들리'의 성과는 독자에게 더 큰 스릴을 선사한다.


『킬러스 와이프: 라스베이거스 연쇄살인의 비밀』은 법정 스릴러 장르 특유의 교묘한 머리 싸움 때문에 영화화가 기대되는 작품이기도 하다. 또한, 작품을 끝까지 읽은 독자라면 '타라'를 중심으로 한 또 하나의 작품이 집필되기를 나처럼 바라 마지 않을 것이다. '에디 칼'과 '제시카 야들리'는 살인범과 연방검사로서 기묘합 조합처럼 여겨졌지만,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타라'는 부모 세대의 간극이나 그들에게 부여된 평가를 뛰어넘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타라'가 중심이 된 또 하나의 세계는 독자의 예측을 번번이 벗어나면서 차원이 다른 흥미로운 전개를 선보이지 않을까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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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ADHD의 슬픔
정지음 지음 / 민음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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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HD가 질환명이라기보다 우리를 우리이도록 하는 암호 같아요. 열일곱 번째 MBTI 같기도 하고요. 사람들은 ADHD 아닌 이를 반기겠지만, 저는 우리들이 더 좋거든요. 서글프고 독특한 삶이잖아요. 어떤 사람이 매일매일 실수한다는 건 매일매일 세상을 배워 간다는 말과도 같죠.(185쪽)

『젊은 ADHD의 슬픔』은 성인 ADHD 환자인 작가가 어떻게 마침내 자신의 정신질환과 함께 살아갈 수 있게 되었는지를 기록한 에세이다. 이 글을 읽어야지, 하는 확신이 들게 된 것은 '월요일의 여름방학'이라는 이름으로 기획되었던 민음사의 sns 라이브 방송 덕분이었다. 방송 내내 유쾌한 에너지가 가득했고, "너나 나나 토마토다"라고 말하는 작가 정지음만의 재치에 매료되어 책을 읽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어릴 적에 주로 정신이 산만한 친구들을 놀릴 때 ADHD라는 단어가 유행처럼 사용되었던 기억이 난다. 조금만 주의력이 결핍된 모습을 보여도 어김없이 ADHD가 등장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ADHD와는 별로 유쾌한 추억을 쌓지 못했다. 내게는 불안과 긴장의 감정으로 기억되는 ADHD에 관해 이토록 자세히 접하게 된 것은 인생 내내 거의 처음이 아니었을까 추측한다. 작가 또한 프롤로그에서 "한국의 미혼 여성 ADHD(10쪽)"에 관한 글을 읽고 싶었다고 썼다. 그러므로 내가 굳이 피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그런 글을 발견하는 일이 이제까지 얼마나 수월하지 않았는지를 새삼스레 발견할 수 있다. 자신보다 먼저 같은 일을 겪은 사람을 마주하고 싶었던 작가의 열망은 글쓰기로 이어졌다. 작가는 ADHD 진단을 받은 후 병원에 다니고, ADHD 환자로서 살아가는 삶에 관해 세밀하게 기록했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누구나 ADHD 환자로 의심받던 시절의 오해를 지우고, 그에 대한 이해를 바로잡을 수 있다.


주변에 ADHD 아동이나 청소년이 있다는 사람을 만나면 그 아이들이 병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부탁하게 된다. 자신을 깨닫고 나면, 그 애들은 스스로를 인생의 반환점으로 삼을 수 있다. 어린 시절의 마음으로 몸만 자란 내가 결국은 혼돈을 극복하고 삶으로 나아갔듯이.(54쪽)

자기 자신과 세상에 대한 미움과 분노로 자기 파괴적인 삶을 살았던 작가는 과거를 넘어서서 ADHD와 비로소 화해하게 된 작가는 너무도 다정한 목소리로 자신의 삶과 감정들을 털어놓는다. ADHD 때문에 그렇게 오랫동안 부적절한 느낌을 스스로에게 느꼈다는 사실에 후회하면서도, 자신과 같은 시간을 겪는 아이들이 생기지 않도록 해달라고 간절하게 부탁한다. 자신의 민감함 때문에 지속적으로 스트레스에 시달리면서도 모두가 각자의 문제로 시끄럽고 고독하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 책 속에서 만난 작가는 자신이 제일 많이 가지지 않아도 좋다고 말하는 자발적인 둘째이고, 부모의 품 안에서만큼은 "영원한 특권층이자 일등 시민이었(150쪽)"던 감사한 기억을 대갚음하고자 노력하는 멋진 어른이다. 또한, ADHD라는 강박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준 이들에게 웃음과 행복을 돌려주고 싶어 하는 다정한 친구이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ADHD는 더 이상 부정적인 이미지와 이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당신이 무엇이든 어떻냐고, "하릴없이 삐걱대는 나날도 전부 춤이었다고(243쪽)" 위로받는다. 한 사람의 투쟁기를 읽으면서 이토록 마음이 덥혀지는 걸 보면, 『젊은 ADHD의 슬픔』은 결국 "한국의 미혼 여성 ADHD(10쪽)" 환자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절실하게 필요했던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작가 정지음의 기록은 지극히 자기중심적이면서도, 완전히 이타적인 위로이다.


『젊은 ADHD의 슬픔』을 읽는 동안 다른 사람이 자신의 현실을 어떻게 헤쳐나가는지에 굉장히 무심했음을 깨달았다. 나 자신을 이해하고, 살아가는 데 급급해서 다른 삶에 시간을 할애할 심적인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이만치 마음이 훈훈해지는 글쓰기라니. 독자로서 작가 정지음의 목소리를 더 많이, 오랫동안 들을 수 있기를 소망한다.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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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렘 셔플
콜슨 화이트헤드 지음, 김지원 옮김 / 은행나무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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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렘 셔플』을 읽게 된 건 순전히 작가 콜슨 화이트헤드의 전작 『니클의 소년들』 때문이었다. 플로리다 주 소년원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니클의 소년들』은 사회적 고발을 시도함과 동시에 뛰어난 몰입감으로 독자들을 사로잡았다. 소년원의 아이들에게서 1960년대의 할렘 가로 작가의 시선은 옮겨간다. 콜슨 화이트헤드의 두 작품은 흑인의 사회적 위치를 상기시킨다는 점에서 닮았지만, 할렘의 흑인들은 고립된 공간 안에서 자신들만의 질서를 구축하고, 또 이제까지의 보편적인 질서를 전복시키려고 분투한다는 점에서 다르기도 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콜슨 화이트헤드가 끊임없이 시도하는 이야기들이 과거로부터 왔지만, 현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게다가 차별과 배제, 억압의 역사는 흑인에게서 그치지 않고, 점점 더 많은 인류 사이를 갈라놓는 핵심적인 언어로 변화하고 있다. 그러니까 『할렘 셔플』은 할렘의 가구상 '카니'의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다른 모든 책들처럼 마찬가지로 말이다.


그가 매일 보는 장소들, 그의 문 앞에 있는 가게들, 그가 어릴 때부터 지나쳤던 곳들이 가면이었음을 알려주었다. 입구는 다른 도시들로 들어가는 문이었다. 아니, 하나의 커다란 비밀 도시로 들어가는 여러 개의 문들이었다. 늘 가까이, 그가 아는 모든 것들에 인접해서, 바로 아래에 있는 도시. 어디를 봐야 할 지만 안다면 금방 찾을 수 있는 곳.(370쪽)


할렘에서 사람들은 "세상이 무심하고 잔인한 곳이라는 걸 믿는" 단계에서 더 나아가 "위험한 산비탈, 굶주린 골짜기와 협곡, 수많은 정글의 위험 속에서 매일 그 증거를 마주(114쪽)"한다. 최악의 우범지대로 손꼽히는 할렘의 질서는 강도, 폭력, 마약 등의 행위로 구축 혹은 유지된다. 모두가 범죄를 일삼는 지역 안에서 자신만 순결하다고 주장하기엔 무리가 있는 법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새에 범죄 세계의 일부가 되어 있다. 이 책의 주인공인 가구상 '카니' 또한 마찬가지의 경우다. 폭력적인 범죄자 아버지 밑에서 자란 '카니'는 자신이 어디로부터 왔는지 보다 어디로 갈지를 결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으며 살아왔다. 그 결과물이 바로 '카니'의 가구 판매점이고, 평범한 행복을 일깨워 주는 그의 가족들이다. 하지만 스트라이버(노력가)와 범죄자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은 할렘에서 '카니'는 아주 손쉽게 할렘의 법칙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부패할 대로 부패한 공간 안에서 자신의 태생을 이겨내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카니'의 순진한 믿음과는 다르게. 


다 함께 협력하면 우린 그들의 사악한 체제를 전복시킬 수 있어요. 이것은 백인 세계 안의 흑인 국가 지도이자 더 큰 것의 일부이지만, 그 자체로 독립적이고 나름의 구조를 갖고 있어요. 우리가 서로를 돕지 않으면 우리는 저 바깥에서 패배하게 될 거예요.(414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렘 셔플』은 계속해서 할렘의 흐름을 바꾸기 위한 시도를 한다. '카니'의 개인적인 원한에서 비롯된 복수들은 결국 할렘을 더 좋은 곳으로 바꿔놓고 싶은 할렘 가 모든 이들의 열망이자 시위로 해석된다. 세상으로부터 버려진 범죄자들이 '카니'의 새로운 앙상블의 일원이 된다는 점은 자못 의미심장하다. 그들은 언제든 자신들을 찌부러뜨릴 수도 있는 존재들의 밑바닥을 뒤집어 세상에 드러낸다. 자신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확실하게 각인시키고, 그들의 평범한 일상이 언제든 무너질 수 있음을 경고한다. 개별적인 '조그만 존재'들은 결집을 통해 세상을 바꿀 목소리를 낸다. 그들의 저항은 애초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페퍼'의 말처럼 "소박하게 시작해서 점점 위로 올라가는 것도 괜찮(453쪽)"을 것이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할렘은 분노한 시민들의 시위로 완전히 전복되었다. 할렘 시민들의 참아왔던 분노와 희망은 길거리 위에 처참한 방식으로 표출되었다. 그리고 새롭게 무언가가 피어오를 수도 있었을 땅 위에 2020년 또 다른 불행이 탄생했고, 미국 전역에서 벌어진 시위는 몇몇 지역에서 굉장히 폭력적인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더 나아가 2021년 코로나19 사태로 인종 간의 배척 상태는 더욱 심화되었다. 1964년으로부터 별다른 진전도 없이 2021년에 도달했다는 사실은 역시 개탄스럽다. 전 세계적 위기를 함께 겪은 뉴노멀 시대에 우리는 또 다른 할렘을, 미국을, 아니 세계적인 양상을 목격할 수 있을까. 『할렘 셔플』이 언젠가 누군가에게는 과거만의 공포처럼 여겨질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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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덤
요 네스뵈 지음, 김승욱 옮김 / 비채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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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돌책이라는 수식어를 무색하게 만드는 요 네스뵈의 필력, 이번 신간도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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