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먹듯이 드나들던 민음사 홈페이지에서 올해 ‘김수영 문학상 수상작‘을 발견했을 때 나는 아직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지지도 않은 작품을 애정 하기 시작했다. 그건 알 수 없는 직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는데, 결정적으로 시집을 구매하게 된 건 박연준 시인의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 시인은 세상에 져 오기만 한 사람을 왠지 모르게 변호하고 싶었다고 썼다. 그 문장을 오래도록 바라보다가 『그 웃음을 나도 좋아해』를 주문했다. 왜일까, 스스로도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내 앞가림도 제대로 못하면서. 어째서 나도 ‘변호‘라는 일에 동참해야겠다고 느꼈던 걸까. 우울에 잠식될수록 내 앞에 선 사람의 행복을 바라게 된다. 어디에서부터 그런 마음들이 오는지 나는 시집을 다 읽고도 알아내지 못했다. 알 수 없는 것들 투성이인 가운데 ‘이기리‘ 시인의 첫 시집은 무척 좋았다. 생각보다 더 비참했으므로 ‘좋았다‘라는 말은 여기에 어울리지 않는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리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없다. 시집을 읽은 오늘은, 누군가를 꽉 껴안아 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 웃음을 나도 좋아해』는 어린아이의 모습으로부터 시작된다. 아이는 하찮은 돌이 가진 반짝거림도 알아볼 줄 안다. 하지만 순수하고 연약한 마음은 너무 쉽게 도드라지고, 세상에는 그걸 참아내지 못하는 사람이 곳곳에 있다. 자신의 잘못도 아닌 일들로 처참하게 짓밟힌 아이는 ˝어쩌면 아예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명당을 찾아라」)˝ 자신을 숨기는 방법을 택한다. 나는 아이에게서, 또 ‘장난‘이라는 이유를 대며 아이를 괴롭히는 얼굴들에서 때로는 나를, 아니 내 친구들의 얼굴을 본다. 과거에 내가 살던 곳으로부터 거리도, 시간도 멀어졌지만 몇몇의 기억들은 사라질 줄을 모른다. 그로 인해 나는 더 이상 독자로서 살아남지 못하고, 어느새 일인칭 단수의 시점에서 아이의 모습을 훑는다. ˝목이 돌아간 줄도 모르고(「어린이날」)˝, 그러니까 자신이 아픈 줄도 모르는 채로 아이는 자라난다. ˝타인을 사랑하고 믿으려는 맹목적 태도를 바꾸지 못(「더 좋은 모습으로 만나겠습니다」)˝한 아이는 이제 ˝원반을 돌려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충분한 안녕」)˝ 되었다. 그가 이만큼이나 삶을 버텨낼 수 있던 건 아들, 하고 부르면서 손을 내밀었던 ‘누나‘가 있었기 때문이고, ‘나의 외투‘를 껴안아 주던 ‘너의 외투‘가 있었기 때문이다. 일그러진 웃음은 ˝네가 듣고 싶은 말을˝ 여전히 어렵사리 골라내는 중이고, 영영 찾아내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네가 듣고 싶은 말을 내가 할 수 있을 때까지(「정물화를 그리는 동안」)˝ 살아가는 것이 아이가 삶을 이어갈 수 있는 이유가 되어줄 것이다.

˝울음이 늘어나면서
사방에서 수많은 새들이 울고 있었지만
고개를 돌릴 때마다 새는 없었다˝

「긴긴」

아이는 과거에만 머무르지 않고, 지금 여기에서 당장 옆 사람의 얼굴에서도 보이는 것 같다. 울고 있는 아이는 여기저기에서 봇물처럼 쏟아져 나온다. 아이를 보듬으려고 손을 내밀면 어느새 아이는 또 해사하게 웃는다. 이렇게 울고 불며 내달리다 보면 어느새 우리의 이름이 지워지는 순간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그때에는 ˝멀어지는 기억과 흔적 나도 나를 잊기 위해 노력해야겠지 남은 뼈는 곱게 갈릴 것이고 저 강물은 언제나 잔잔히 흐르겠지만(「강물에 남은 발자국마저 떠내려가고」)˝. 함께 죽음을 나아가는 우리는 언젠가 또 한 번 마주치게 될 것이다. 그 과정 속에서 어른이 된 아이는 우울하면서도 불쌍하지 않다. 자신의 이야기를 쓰는 것으로 누군가를 행복하게 만들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배반당하면서도 그들에 대한 믿음을 져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이가 가진 뿌리 깊은 외로움은 또 나의 것이기도 하므로 나는 ‘누나‘의 마음이 된다. 아무것도 무섭지 않다고 말하는 아들 같은 아이의 손을 멀거니 바라보고 서 있다. ˝그래도 놓아주어야 하는 것은, 그냥 놓아주자/ 그곳에선 안전하기를/ 뒤에서 바라봐 주자(「일시 정지」)˝. 이건 누구 한 명의 이야기가 아니다. 과거에 붙들려 있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그래, 이제는 그게 무엇이 되었든 ˝그냥 놓아주자/ 그곳에선 안전하기를/ 뒤에서 바라봐 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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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적이고 강인한 분위기를 풍기는 배우 ‘키이라 나이틀리‘, 나는 그녀의 연기를 퍽 좋아한다. 영화 <콜레트>도 순전히 그런 이유에서 관람을 한 것이다. 영화를 본 이후로 나는 ‘콜레트‘의 작품을 잘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그녀를 존경하고 애정 한다고 말하고 다녔다. 내가 영화 속에서 마주한 건 ‘콜레트‘가 아니라 결국 ‘키이라 나이틀리‘였는지도, 혹은 그 둘 다였는지도 모른다. 그녀의 가려지지 않은 욕망과 단단한 냉철함은 매력적이었다. 작가를 좋아하면서 그 작가의 작품은 알지 못한다는 것이 어딘가 아이러니하게 느껴졌기 때문에 그녀의 책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은 늘 나를 괴롭혔다. 그러면서도 집에 꽂혀 있는 『파리의 클로딘』에는 손이 가지 않아서 알 수 없는 압박을 느끼던 시점에 『여명』을 읽게 되었다. 『여명』을 읽는 동안 나는 종종 도로 위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를 만큼 더운 한여름을 떠올렸다. 어느 계절보다도 활발하고 열정적인 그때에 나는 조금은 몽롱한 기분으로 여름을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서 있다.

창에서 뛰어내린, 아직 정체불명의 이 새벽이라는 친구는 여전히 방황하고 있다. 변화하는 형태를 완성할 시간이 부족해는 지, 그것은 땅에 닿은 후에도 그 모습 그대로이다. 하지만 내가 그 과정에 참여하자 모든 것이 변했다.

176쪽

소설 『여명』에는 작가 ‘콜레트‘의 실제 삶이 혼재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건 어쩌면 ‘자전적 소설‘로 분류될 수 있겠다. 이 작품의 중심축을 이루는 것은 작가 ‘콜레트‘의 어머니 ‘시도‘이다. 모든 것은 어머니 ‘시도‘에게서 시작되어 끝이 난다. ‘시도‘는 소설의 처음에서 자신의 딸인 ‘콜레트‘를 보러 갈 수 없다고 선언한다. 4년에 한 번만 꽃을 피우는 붉은 선인장 꽃이 곧 피어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문학과 현실에서 어머니들에게 강요되어 온 희생과 그로 인한 억울함을 떠올려 본다면, ‘시도‘의 행보는 독보적이다. 사랑이란 감정이 명예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인지하면서도 결국 그것으로부터 끝끝내 분리되지 못한 ‘시도‘는 사랑에 헌신적이되 의존적이지 않다. ‘시도‘와 ‘콜레트‘의 관계 또한 상대와의 유사성으로 얽혀있으면서도 서로에게 너무 들러붙어 있지 않다. ‘콜레트‘는 어머니에게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어머니의 시각으로 세상을 이해하며 글을 쓴다. 자신과 그토록 닮은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어둠에서 깨어나 여명을 맞이하면서 소설은 끝난다. 새롭게 맞이한 새벽에서 우리는 더욱더 주체적으로 삶을 살아가는 ‘콜레트‘의 모습을 발견한다. 어머니의 삶과 죽음 그 이후의 모든 것은 이전과 다를 바 없이 그 모습 그대로이겠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뚜렷하게 세상 속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면서 살아가려는 ‘콜레트‘의 삶은 생생하고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오랜 세월 동안 나에 대해 아는 것들, 감추고자 애썼던 것들, 생각해낸 것들, 짐작했던 것들을 정리해온 이 종이 위로 달리는 내 손을 새삼 왜 멈춘단 말인가? 사랑이라는 재앙, 그 과정들, 그 이후의 일들, 이런 것들이 한 여자의 진정한 속마음을 다 말해주지는 않는다.

78쪽

『여명』은 우리에게 사랑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고자 한다. 어머니 ‘시도‘에게서 딸 ‘콜레트‘로 이어진 사랑의 서사로부터 작가는 이제 거리를 두려고 한다. 여기에서 ‘콜레트‘가 떨쳐내려고 하는 사랑의 대상이 나는 어쩐지 ‘콜레트‘의 연인 전부에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자신의 어머니를 지칭하기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콜레트‘는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집요한 감정을 내려놓고,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려는 다짐을 한 것이 아니었을까. 무수한 감정들과의 지긋지긋한 전쟁으로부터 한 발짝 벗어나 ‘콜레트‘는 새로운 새벽을 맞이하려고 한다. 그 새벽으로부터 시작된 삶 속에서 ‘콜레트‘는 어머니와 자신의 연인들이 주었던 사랑을 기반 삼아 나아갈 것이다.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행을 마다하지 않고, 모든 일을 중단한 채로 평생 다시 보지 못할 선인장 꽃의 개화를 기다리던 자신의 어머니 ‘시도‘처럼 자신의 삶과 또 결코 포기하지 못할 사랑이라는 감정을 열정적으로 감각하면서, 그녀는 나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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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 작가가 진행하는 온라인 북클럽-북클럽 활동은 인별 라이브 방송으로 진행된다-의 1월 도서로 ‘페터 비에리‘의 『자기 결정』이 선정되었다. 은행나무 출판사에서 발행되었던 『자기 결정』은 절판된 상태였다가 독자들의 갑작스러운 성원에 힘입어 최근에 급하게 재출간되었다. 본 도서는 작가 ‘페터 비에리‘가 그라츠 아카데미의 초청으로 2011년 초에 진행한 강연을 기록한 것이다. 총 3번의 강의를 ‘자기 결정‘과 ‘자기 인식‘, 그리고 ‘문화적 정체성‘에 나누어 수록했다. ‘페터 비에리‘라는 이름을 생소하게 느낄지도 모르겠는데, 그는 ‘파스칼 메르시어‘ 라는 필명으로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출간했다. 결국엔 작가 ‘페터 비에리‘의 소설과 인문 교양 도서 모두 하나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즉 진정한 자기 자신을 찾아 스스로만의 방식으로 세상에 존재하고자 하는 것이다. 세상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받아들이고, 또 그 세상을 향해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라는 조언은 사실 새로울 것이 없다. 그건 개인이 존중받는 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제일 많이 듣는 명언들 중 하나다. ˝막강한 권위에 의해 제정된 요란한 공식˝에 대항하며 ˝이 방식이 정말로 옳은 방식인가?˝라고 묻는 삶의 방식을 제시하는 책은 흔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사랑받고 있다. 가야 할 길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음에도 그렇게 되기까지가 무척 어렵기 때문이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을 서술하고 세상에 대항하고 있다고 느끼지만 찰나의 순간에 홀연히 우리는 스스로를 잃는다. 행복하고 존엄한 삶을 위해 가시밭길도 마다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열망이 이 책을 세상에 다시 불러왔다는 생각도 든다.

읽기와 쓰기를 향한 찬양

‘페터 비에리‘는 자기 결정을 위한 자기 인식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또한 자기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인식하려면 읽기와 쓰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꾸준히 읽는다면 다양한 가능성을 상상하는 능력을 배양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자기만의 스타일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했다. 이어서 예술적인 글쓰기를 하면서 여러 각도로 생각을 거듭하는 것으로 자기 자신을 새롭게 인식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처럼 읽기와 쓰기를 통해 우리는 세상을 자신만의 언어로 받아들이고, 더 나아가 하나의 세상을 창조해 내면서 그 안에 있는 또 다른 자신과 마주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의 핵심은 두 번째 강의의 읽기와 쓰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개인적인 경험을 반추해 보건대 ‘페터 비에리‘의 말은 어느 정도 사실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나는 독서를 통해 비로소 스스로에 관해 뚜렷하게 설명하는 일이 가능했다. 나와 닮은 인물을 마주하면서 실제의 나 자신을 발견하기도 했고, 책 속 문장들에서 그런 내 모습을 세상에 어떻게 표현할지를 알아가기도 했다. 살면서 느꼈던 모호한 감정들이 독서를 함으로써 비로소 제 모습을 드러냈다.

1월 말에 진행되는 라이브 방송에서 사람들이 각자 자기만의 언어로 쏟아내는 감상은 어떤 내용일지 기대하고 있다.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요. 그들과 정면으로 마주 보고 내적 입장을 표명한다는 심정으로 자신만의 목소리를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 P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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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무스 2021-01-13 2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자기결정 리뷰 두번째로 봅니다!ㅎ 저도 김영하 북클럽 추천으로 전자책 다운 받았는데 손이 잘 가지 않네요!ㅠ 댓글보고 힘내고 갑니다! 즐독하시구요!ㅎ

릴리 2021-01-13 23:00   좋아요 1 | URL
막시무스님도 즐독하세요! 손이 잘 가지 않는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하네요 ㅎㅎ...
 

작가 황정은의 소설 중 『디디의 우산』이 큰 주목을 받던 때였다. 그것을 언젠가는 읽어야지, 하고 다짐한 지 오래였는데 나는 끝끝내 그 작품을 읽지 못했다. 그래서 같은 작가의 신작 『연년세세』가 출간되었을 때 이번에야말로, 하고는 책을 사다가 두었다. 재작년 봄 『연년세세』에 수록된 작품 중 「파묘」를 《창작과비평》을 통해 읽은 기억이 난다. 그때는 다만 ‘한세진‘의 시각에서 ‘이순일‘을 바라볼 뿐이었는데, ‘모녀 관계‘를 드러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파묘」는 아주 오래도록 기억되었다. 엄마와 딸 사이의 관계는 애정과 증오, 그 어느 쪽으로도 뚜렷하게 규정하기 어렵다. 누구보다도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이면서도, 자신이 원하는 상 안에 상대를 옭아매어 서로를 지치게 만드는 관계에 놓여 있다. 「파묘」에서 『연년세세』로, ‘한세진‘에서 ‘한영진‘을 거쳐 ‘이순일‘, 또 ‘한세진‘과 ‘제이미‘로 이야기가 확장되고 증폭되면서 우리가 얻는 것은 명확한 귀결이 아니다. 모녀 관계를 정의 내리기가 쉽지 않듯이 우리는 이번 작품을 통해 우리가 딛고 선 땅이 얼마나 불안정하게 흔들리고 있는지를, 그 위에 서있는 모든 것들을 잃어버리는 일이 또 얼마나 쉬운지를 깨달을 뿐이다.

그리고 나는 결국 『연년세세』가 ‘엄마‘, 다만 ‘엄마‘의 이야기였다고 생각했다.


효? 그것은 아니라고 한세진은 답했다. 그것은 아니라고 한세진은 생각했다. 할아버지한테 이제 인사하라고, 마지막으로 인사하라고 권하는 엄마의 웃는 얼굴을 보았다면 누구라도 마음이 아팠을 거라고, 언제나 다만 그거였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44쪽, 「파묘」

‘엄마‘, 그녀들의 이름은 ‘순자‘였다. 그건 어디에나 있는 이름이었고, 누구라도 될 수 있는 이름이었다. 개인으로서의 정체성은 온데간데없고, 누구도 자신의 존재를 알아차릴 수 없는 곳에서 줄곧 누구도 인정하지 않는 노동을 하는 것이 그녀들에게 주어진 의무였다. 그녀들에게도 꿈이란 것이 있다면, 그건 잘 사는 것이었다. 반복되는 가사노동 속에서 하루하루를 잃어버리며 살아온 탓에 잘 산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알 지도 못하면서 그녀들은 그런 꿈을 꾸었다. 자신이 겪은 징글징글한 삶을 아이들이 소설 속 이야기로도 접하는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었다. 찰나에 불과할지라도 우리가 느끼는 안락함과 그로부터 솟아 나오는 세상을 향한 인내심은 ˝이순일의 노동˝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렇게 자식들을 지키고 싶어 하면서도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살 수는 없다˝라고 가르치려는 엄마를 딸은 용서할 수 없었다. 그건 어김없이 같은 성별을 지닌 딸에게만 적용되는 논리였기 때문이다. ‘한세진‘과 ‘한영진‘, 그리고 지금 여기의 딸들은 ‘이순일‘이 건넨 ˝파편˝을 건네받지 않으려고 부단히도 애를 쓴다. ‘엄마‘와 같은 길을 걷지 않겠다고 몇 번을 다짐하면서도 끝내 그 파편을 손에 쥐고야 마는 때도 있다. ‘엄마‘라는 사람을 부분적으로라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딸‘ 밖에 없으니까, 자신의 모어를 경멸 속에 방치하는 일은 참을 수가 없으니까. 다시 말해 ˝울고 실망하고 환멸하고 분노하면서˝ 또 ˝사랑하면서˝ 우리는 그녀들의 딸이자 또 한 명의 엄마로서 살아간다. 내 엄마의 삶을 목격하고, 때로는 살기 위해 그에 대한 분노를 망각하면서 다가오는 파도를 맞는다. 도저히 엄마를, 그녀가 준 세상을 용서할 수 없는 때도 있지만 그런 순간들에도 시간은 흘러간다. 그래서 누군가가 말했던 비결을 ˝잊어.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면, 잊어.˝ 아프면서도 적확하게 내 삶을 꿰뚫는 이 말을 순순히 인정한 채로 나아간다.

그녀가 어느 이름을 가지고 있든 ‘엄마‘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버겁다. 바쁘게 지나가는 시간의 틈에서 그런 목격들은 지치지도 않고 살아나 기억에 남는다.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엄마와의 관계가 너무 밀착되어 있기 때문에 그녀의 한숨, 푸념, 사소한 이야기 등 온갖 것들에서 나는 피로를 느낀다. 더 늦기 전에 내 삶을 살아야겠다고 엄마로부터 분리되려는 노력을 하던 때도 있었다. 그건 내 이야기가 될 수 없고, 엄마가 짊어지고 가야 할 엄마 자신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내게 들러붙어 내 삶을 이루고 있는 나 자신의 모어를 내버려 두고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모어로 우리 엄마의 이야기를 세상에 들려주어야 한다. 노동으로 우리의 삶을 지탱해 오면서 정작 자기 이야기를 할 기회를 놓쳐 버린 그들을 대신해 발언해야 한다는 어떤 의무감에 휩싸인다. 그 과정 속에서 적절하게 기대하고 실망하면서 다가오는 삶을 묵묵히 걸어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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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스토너‘라는 한 개인의 삶과 죽음을 서술하고 있는 소설 『스토너』는 출간 이후 많은 독자에게서 ‘인생 책‘으로 꼽혀 왔다. 혹자는 솔직히 좀 지루한 작품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이런 극명한 차이는 삶을 보는 시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삶은 언제나 동어 반복의 연속이다. 주어로서의 나 자신은 물론이고, 주요 성분인 동사와 목적어까지 전부 어떤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나는 밥을 먹고, 나는 일을 한다. 이토록 권태로운 삶이지만 누군가는 그 속에서 어떤 번뜩이는 순간들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스토너』가 ‘인생 책‘이 된다. 다른 사람의 의견은 제쳐놓고, 그렇다면 나는 어땠는가. 무한히 반복되고 침묵하는 일상 속에서 갑작스레 열정이 솟아나는 그의 인생을 사랑했다. 물론 그의 마지막까지 동행했기 때문에 더욱 애착이 생겨났겠지만, 나는 죽음 이전에도 그의 삶을 애정 했다. ‘스토너‘에게 그랬듯이 대학은 나에게도 더없이 소중한 곳이었고, 문학은 언제나 내가 세상을 더 깊고 생생하게 감각하도록 돕는 도구였다. 무감각하게 반복되는 삶을 인내하며 나아가는 ‘윌리엄 스토너‘의 일대기는 시시하지만 그래서 더 두렵기도 하다. 책을 읽어 나갈수록 그의 권태로운 삶 속에서 나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것이 소멸하는 순간 나는 코앞에 죽음을 마주한 사람처럼 마음이 저릿해진다. 기계처럼 일을 하는 자신에게 회의를 느끼고, 또 이를 해소할 시간마저 잃어버린 코로나 시대의 독자에게 『스토너』는 ‘인생 책‘이 자 우리의 인생을 대변하는 ‘인생의 책‘이다.

넌 무엇을 기대했나? 그는 자신에게 물었다.

385쪽

몇몇 순간들을 제외하면 ‘스토너‘는 삶을 살았다기보다는 참을성 있게 견뎌내는 편에 가까웠다. 어떤 것에서도 제대로 된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고 분열된 마음과 함께 살았던 건 두 번의 세계대전을 통과해야 했던 시대적인 배경도 있었다. 전쟁으로 인해 무고한 생명들이 스러져 갔고, 불안정한 일상 속에서 사람들의 정신 또한 서서히 힘을 잃었다. ‘이디스‘와의 불행한 결혼생활과 동료 교수 ‘로맥스‘의 끈질긴 괴롭힘, 그리고 수많은 파괴와 죽음을 양산해 낸 두 번의 전쟁 속에서도 ‘스토너‘가 삶을 끝내 긍정할 수 있었던 건 ‘문학‘과 ‘케서린 드리스콜‘ 덕분이었다. 그는 ‘문학‘과 ‘케서린‘이라는 돌파구를 통해 삶을 비로소 온몸으로 감각할 수 있었고,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무신경한 결계를 깨부수며 나아갈 수 있었다. 그 두 번의 기회가 없었다면 죽음에 이르렀을 때 ‘스토너‘는 자신의 삶에 어떠한 열정도 느낄 수 없었을 것이다. 별 볼 일 없어 보이던 그럭저럭 보통의 삶이 죽음 앞에서 또렷해지고, 그제서야 간절해진다. ‘스토너‘는 죽어가는 찰나의 순간에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 ˝넌 무엇을 기대했나?˝ 우리는 ‘스토너‘에게 ‘문학‘이자 ‘케서린‘이었던 무엇을 평생에 걸쳐 기다린다. 그것들은 이미 우리의 삶을 통과해 지나갔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결국 생의 끝에서야 재조명되고 애틋해진다. 기대수명이 칠십몇 세 정도라고 한다면 나는 아직 삶의 절반도 살지 않았다. 하지만 ‘스토너‘가 내게 ‘기대‘라는 단어를 언급하는 순간 나는 울컥하고야 만다. 이미 모든 ‘기대‘를 품을 기회를 박탈당한 사람처럼 어쩐지 삶에 조금은 절박한 마음을 품게 되는 것이다.


결국은 모든 것이, 심지어 그에게 이런 지식을 알려준 배움까지도 무익하고 공허하며, 궁극적으로는 배움으로도 변하지 않는 무(無)로 졸아드는 것 같다는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

250쪽

‘신형철‘ 평론가의 말처럼 책의 말미에서 ˝우리는 모두 속절없는 0을 향해 나아갈 것˝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닫게 된다. 죽으면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는 말은 삶이라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던 때부터 수없이 들어왔다. 그러나 일상에서 이를 알아채는 일은 드물다. 오로지 나만 가지고 있는 듯한 삶에 대한 권태로움은 영영 끝을 모르고 이어질 것만 같다. 오늘 『스토너』를 읽고서야 이런 지겨움도 언젠가는 툭, 소리도 없이 끊어지게 되리라는 사실을 절감했다. 나는 그런 삶에 무엇을 기대했나. 그에 대한 대답으로 이것저것을 쓰다가 결국에는 지우개 자국으로 더러워진 종이만을 남겼다. ‘0‘으로 졸아든 언젠가의 나를 생각하니 무엇을 적어도 부족한 느낌이다. ‘신형철‘ 평론가의 말을 빌리자면 이 ‘삶‘에 대해선 할 말이 너무 많아 제대로 시작할 수조차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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