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황정은의 소설 중 『디디의 우산』이 큰 주목을 받던 때였다. 그것을 언젠가는 읽어야지, 하고 다짐한 지 오래였는데 나는 끝끝내 그 작품을 읽지 못했다. 그래서 같은 작가의 신작 『연년세세』가 출간되었을 때 이번에야말로, 하고는 책을 사다가 두었다. 재작년 봄 『연년세세』에 수록된 작품 중 「파묘」를 《창작과비평》을 통해 읽은 기억이 난다. 그때는 다만 ‘한세진‘의 시각에서 ‘이순일‘을 바라볼 뿐이었는데, ‘모녀 관계‘를 드러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파묘」는 아주 오래도록 기억되었다. 엄마와 딸 사이의 관계는 애정과 증오, 그 어느 쪽으로도 뚜렷하게 규정하기 어렵다. 누구보다도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이면서도, 자신이 원하는 상 안에 상대를 옭아매어 서로를 지치게 만드는 관계에 놓여 있다. 「파묘」에서 『연년세세』로, ‘한세진‘에서 ‘한영진‘을 거쳐 ‘이순일‘, 또 ‘한세진‘과 ‘제이미‘로 이야기가 확장되고 증폭되면서 우리가 얻는 것은 명확한 귀결이 아니다. 모녀 관계를 정의 내리기가 쉽지 않듯이 우리는 이번 작품을 통해 우리가 딛고 선 땅이 얼마나 불안정하게 흔들리고 있는지를, 그 위에 서있는 모든 것들을 잃어버리는 일이 또 얼마나 쉬운지를 깨달을 뿐이다.
그리고 나는 결국 『연년세세』가 ‘엄마‘, 다만 ‘엄마‘의 이야기였다고 생각했다.
효? 그것은 아니라고 한세진은 답했다. 그것은 아니라고 한세진은 생각했다. 할아버지한테 이제 인사하라고, 마지막으로 인사하라고 권하는 엄마의 웃는 얼굴을 보았다면 누구라도 마음이 아팠을 거라고, 언제나 다만 그거였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44쪽, 「파묘」
‘엄마‘, 그녀들의 이름은 ‘순자‘였다. 그건 어디에나 있는 이름이었고, 누구라도 될 수 있는 이름이었다. 개인으로서의 정체성은 온데간데없고, 누구도 자신의 존재를 알아차릴 수 없는 곳에서 줄곧 누구도 인정하지 않는 노동을 하는 것이 그녀들에게 주어진 의무였다. 그녀들에게도 꿈이란 것이 있다면, 그건 잘 사는 것이었다. 반복되는 가사노동 속에서 하루하루를 잃어버리며 살아온 탓에 잘 산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알 지도 못하면서 그녀들은 그런 꿈을 꾸었다. 자신이 겪은 징글징글한 삶을 아이들이 소설 속 이야기로도 접하는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었다. 찰나에 불과할지라도 우리가 느끼는 안락함과 그로부터 솟아 나오는 세상을 향한 인내심은 ˝이순일의 노동˝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렇게 자식들을 지키고 싶어 하면서도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살 수는 없다˝라고 가르치려는 엄마를 딸은 용서할 수 없었다. 그건 어김없이 같은 성별을 지닌 딸에게만 적용되는 논리였기 때문이다. ‘한세진‘과 ‘한영진‘, 그리고 지금 여기의 딸들은 ‘이순일‘이 건넨 ˝파편˝을 건네받지 않으려고 부단히도 애를 쓴다. ‘엄마‘와 같은 길을 걷지 않겠다고 몇 번을 다짐하면서도 끝내 그 파편을 손에 쥐고야 마는 때도 있다. ‘엄마‘라는 사람을 부분적으로라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딸‘ 밖에 없으니까, 자신의 모어를 경멸 속에 방치하는 일은 참을 수가 없으니까. 다시 말해 ˝울고 실망하고 환멸하고 분노하면서˝ 또 ˝사랑하면서˝ 우리는 그녀들의 딸이자 또 한 명의 엄마로서 살아간다. 내 엄마의 삶을 목격하고, 때로는 살기 위해 그에 대한 분노를 망각하면서 다가오는 파도를 맞는다. 도저히 엄마를, 그녀가 준 세상을 용서할 수 없는 때도 있지만 그런 순간들에도 시간은 흘러간다. 그래서 누군가가 말했던 비결을 ˝잊어.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면, 잊어.˝ 아프면서도 적확하게 내 삶을 꿰뚫는 이 말을 순순히 인정한 채로 나아간다.
그녀가 어느 이름을 가지고 있든 ‘엄마‘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버겁다. 바쁘게 지나가는 시간의 틈에서 그런 목격들은 지치지도 않고 살아나 기억에 남는다.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엄마와의 관계가 너무 밀착되어 있기 때문에 그녀의 한숨, 푸념, 사소한 이야기 등 온갖 것들에서 나는 피로를 느낀다. 더 늦기 전에 내 삶을 살아야겠다고 엄마로부터 분리되려는 노력을 하던 때도 있었다. 그건 내 이야기가 될 수 없고, 엄마가 짊어지고 가야 할 엄마 자신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내게 들러붙어 내 삶을 이루고 있는 나 자신의 모어를 내버려 두고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모어로 우리 엄마의 이야기를 세상에 들려주어야 한다. 노동으로 우리의 삶을 지탱해 오면서 정작 자기 이야기를 할 기회를 놓쳐 버린 그들을 대신해 발언해야 한다는 어떤 의무감에 휩싸인다. 그 과정 속에서 적절하게 기대하고 실망하면서 다가오는 삶을 묵묵히 걸어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