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먹듯이 드나들던 민음사 홈페이지에서 올해 ‘김수영 문학상 수상작‘을 발견했을 때 나는 아직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지지도 않은 작품을 애정 하기 시작했다. 그건 알 수 없는 직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는데, 결정적으로 시집을 구매하게 된 건 박연준 시인의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 시인은 세상에 져 오기만 한 사람을 왠지 모르게 변호하고 싶었다고 썼다. 그 문장을 오래도록 바라보다가 『그 웃음을 나도 좋아해』를 주문했다. 왜일까, 스스로도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내 앞가림도 제대로 못하면서. 어째서 나도 ‘변호‘라는 일에 동참해야겠다고 느꼈던 걸까. 우울에 잠식될수록 내 앞에 선 사람의 행복을 바라게 된다. 어디에서부터 그런 마음들이 오는지 나는 시집을 다 읽고도 알아내지 못했다. 알 수 없는 것들 투성이인 가운데 ‘이기리‘ 시인의 첫 시집은 무척 좋았다. 생각보다 더 비참했으므로 ‘좋았다‘라는 말은 여기에 어울리지 않는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리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없다. 시집을 읽은 오늘은, 누군가를 꽉 껴안아 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 웃음을 나도 좋아해』는 어린아이의 모습으로부터 시작된다. 아이는 하찮은 돌이 가진 반짝거림도 알아볼 줄 안다. 하지만 순수하고 연약한 마음은 너무 쉽게 도드라지고, 세상에는 그걸 참아내지 못하는 사람이 곳곳에 있다. 자신의 잘못도 아닌 일들로 처참하게 짓밟힌 아이는 ˝어쩌면 아예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명당을 찾아라」)˝ 자신을 숨기는 방법을 택한다. 나는 아이에게서, 또 ‘장난‘이라는 이유를 대며 아이를 괴롭히는 얼굴들에서 때로는 나를, 아니 내 친구들의 얼굴을 본다. 과거에 내가 살던 곳으로부터 거리도, 시간도 멀어졌지만 몇몇의 기억들은 사라질 줄을 모른다. 그로 인해 나는 더 이상 독자로서 살아남지 못하고, 어느새 일인칭 단수의 시점에서 아이의 모습을 훑는다. ˝목이 돌아간 줄도 모르고(「어린이날」)˝, 그러니까 자신이 아픈 줄도 모르는 채로 아이는 자라난다. ˝타인을 사랑하고 믿으려는 맹목적 태도를 바꾸지 못(「더 좋은 모습으로 만나겠습니다」)˝한 아이는 이제 ˝원반을 돌려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충분한 안녕」)˝ 되었다. 그가 이만큼이나 삶을 버텨낼 수 있던 건 아들, 하고 부르면서 손을 내밀었던 ‘누나‘가 있었기 때문이고, ‘나의 외투‘를 껴안아 주던 ‘너의 외투‘가 있었기 때문이다. 일그러진 웃음은 ˝네가 듣고 싶은 말을˝ 여전히 어렵사리 골라내는 중이고, 영영 찾아내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네가 듣고 싶은 말을 내가 할 수 있을 때까지(「정물화를 그리는 동안」)˝ 살아가는 것이 아이가 삶을 이어갈 수 있는 이유가 되어줄 것이다.

˝울음이 늘어나면서
사방에서 수많은 새들이 울고 있었지만
고개를 돌릴 때마다 새는 없었다˝

「긴긴」

아이는 과거에만 머무르지 않고, 지금 여기에서 당장 옆 사람의 얼굴에서도 보이는 것 같다. 울고 있는 아이는 여기저기에서 봇물처럼 쏟아져 나온다. 아이를 보듬으려고 손을 내밀면 어느새 아이는 또 해사하게 웃는다. 이렇게 울고 불며 내달리다 보면 어느새 우리의 이름이 지워지는 순간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그때에는 ˝멀어지는 기억과 흔적 나도 나를 잊기 위해 노력해야겠지 남은 뼈는 곱게 갈릴 것이고 저 강물은 언제나 잔잔히 흐르겠지만(「강물에 남은 발자국마저 떠내려가고」)˝. 함께 죽음을 나아가는 우리는 언젠가 또 한 번 마주치게 될 것이다. 그 과정 속에서 어른이 된 아이는 우울하면서도 불쌍하지 않다. 자신의 이야기를 쓰는 것으로 누군가를 행복하게 만들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배반당하면서도 그들에 대한 믿음을 져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이가 가진 뿌리 깊은 외로움은 또 나의 것이기도 하므로 나는 ‘누나‘의 마음이 된다. 아무것도 무섭지 않다고 말하는 아들 같은 아이의 손을 멀거니 바라보고 서 있다. ˝그래도 놓아주어야 하는 것은, 그냥 놓아주자/ 그곳에선 안전하기를/ 뒤에서 바라봐 주자(「일시 정지」)˝. 이건 누구 한 명의 이야기가 아니다. 과거에 붙들려 있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그래, 이제는 그게 무엇이 되었든 ˝그냥 놓아주자/ 그곳에선 안전하기를/ 뒤에서 바라봐 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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