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색 히비스커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황가한 옮김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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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배경은 나이지리아다. 독재 정부가 들어서는 바람에, 학교에서는 폭동이 일어나고, 기름 부족 사태가 발발한다. 가난에 다들 허덕이면서 살아가지만,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는 '캄빌리' 와 '자자'는 그런 고통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대신 그들의 가정에는 가부장적이고, 신앙에 대해 지나치게 독실하고, 강압적이며 폭력적인 아버지가 존재한다. 내가 보기에는 응당 벗어나야 할 것만 같은 그런 상황에서 그들은 계속 피해자인 채로 살아나간다.

"나는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만들고 싶었고, 아버지만큼 공부를 잘하고 싶었다. 아버지가 내 목덜미를 어루만지며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존재라고 말하는 것을 들어야만 했다.(...)하지만 나는 2등을 했다. 실패로 더럽혀졌다.(P54)"

이처럼 캄빌리와 자자는 아버지가 세워놓은 목표치에 늘 도달해야만 하고, 주어진 자신들의 '일과표'에 맞는 삶을 살아야만 한다.

1등이 누구인지 알아낸 아버지 '유진'은 캄빌리에게 "저 애도 머리가 하나지 두 개가 아니잖니. 그런데 왜 쟤가 1등을 하도록 놔뒀지?(p63)" 라고 야단친다. 또한, "하나님은 완벽을 기대하셔. 나한테는 제일 좋은 학교에 보내 주는 아버지가 없었다.(64p)"

아버지는 자신이 가진 결핍을 떨쳐내지 못했다. 그리고 어릴 때 성직자들에게서 받았던 도움에 병적으로 집착한다. 스스로가 결핍 속에서 느껴야만 했던 아픔들을 극복하지 않으면, 그것들이 전부 자식에게로 또 대물림 된다. 유진이 만들어 낸 가정은 부유한지는 몰라도, 더 나아져야 한다는 강박 속에서 행복해지기는 어렵다.

나는 자식들을 폭행하면서, 우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자신이 가진 신앙으로 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듯 그의 자식들도 같은 믿음을 가져야만 하고, 자신이 열심히 공부해서 모든 걸 극복해낸 것처럼 자식들도 우수한 사람이 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그가 가진 강박을. 하지만, 그것이 폭력을 정당화 할 수는 없다. '절대' 어떤 이유에서든지 폭력은 정당화 될 수가 없는 것이다.

벗어날 생각 같은 건 하지 않던 자자와 캄빌리의 삶이 달라진 것은 '은수카'에서 '이페오마' 고모와 함께 지낸 시간들 덕분이었다. "문화적 자의식이 있는 음악가들(p190)"의 음악을 듣고, "때가 되면 아버지가 결정(p165)"할 것이라고만 생각했던 대학과 전공에 대해, 자신과는 달리 각자만의 고민을 하는 사촌들이 있는 곳 은수카. 한 번의 방문만으로 자자와 캄빌리의 삶이 극변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에게 굉장히 큰 영향을 끼친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이페오마 고모와 함께 대학교 캠퍼스 투어를 하고 나오면서 오빠 자자는 사자상 밑의 "인간 존엄성을 회복하기 위하여(p167)"라는 글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자자는 '존엄성'이라는 글자를 보면서, 새삼스럽게 자신이 처한 상황을 깨닫게 된 것 아니었을까. 아버지가 그들을 대하는 방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새롭게 인식하게 된 것은 아니었을까? 그들은 이처럼 자신들과는 다른 삶을 살아가는 사촌들을 지켜보면서, 자신들의 삶 속의 왜곡된 지점을, 그리고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또다른 선택들을 마주하게 된다.

고모가 자자를 오포보의 자자왕-저항자-와 비교한 대목도 흥미롭다. 이후 그는 아버지가 신앙을 강요하는 데에 반항하고, "사생활을 좀 갖고 싶(p236)"다면서, 방 열쇠를 보관하겠다고 요구하기 때문이다. 성지주일 전에 그 말을 들었던 자자와 그 이후에 자신의 알을 깨부수려는 자자를 통해서, '저항자'라는 말이 자자에게 어떤 깊은 울림을 주었는지, 그리고 고모와 사촌들이 그의 인생을 얼마나 송두리째 바꿔 놓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 "아버지가 너희가 여기 며칠 더 있었으면 한대." 그 때 오빠가 어찌나 활짝 웃던지 이때껏 있는 줄도 몰랐던 오빠의 보조개가 보였다.(185p)" 집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자자의 마음이 여실히 느껴져 마음 아팠던 대목이다. 모르고 살았다면 괜찮았을 수도 있지만, 자자가 '다른 선택'에 대해서 알게 된 이상, 그는 '저항자'가 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자자의 여동생인 '캄빌리'는 적극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지만, 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갈구하는 아이다. 할아버지 '파파은누쿠'와 사촌 '아마카'가 보이는 다정한 모습들을 보며, 어쩌면 자신이 애정을 갈구하고 있었다는 걸 깨닫는다.

"그들은 최소한의 단어만 사용하면서도 서로의 말을 이해했다. 두 사람을 보면서 내가 절대 가질 수 없을 뭔가를 향한 갈망을 느꼈다. (p205)" 집에 갇혀서 아버지가 준 일과표만 따르고 살았던 자자와 캄빌리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 어린아이들로서 당연히 받아야 할 부모님의 애정이 부족하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야만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캄빌리는 폭력을 행사하는 아버지를 두고서도, 아버지를 따르려고 노력하고 그 부당함에 대해서 침묵하는 아이였다. 자신에게 비아냥거리는 사촌 '아마카'에게 소리치며 대꾸하자 아마카는 (내가 보기에) 기뻐하는 것 같았다. "너도 그렇게 큰 소리로 말할 수도 있구나, 캄빌리.(p211)" 이후 아마카의 캄빌리에 대한 태도는 완전히 변화한다. 더 이상 아무것도 모르는 캄빌리를 조롱하지도, 비아냥 거리지도 않는다. 나는 아마카가 캄빌리를 비난하던 것은 그저 자신의 사촌이 처한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고, 거기서 빠져나오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분명히 자기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드러내지 않고, 도망치려고만 하지 말고, 현실과 마주하고 그 알을 깨부숴주기를, 아마카는 바랐을 것이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억압받고 있는 자자와 캄빌리는 소설 내내 엄청 적극적으로 아버지에게 대항하지는 않는다. 영성체를 거부하거나, 죽은 파파은누쿠의 그림을 몰래 보관하는 일. 그 뿐이다. 하지만 그들은 분명 정신적으로 성장하고 있었고, 그들이 한 반항은 그들의 최선이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나는 비늘판 몇 개가 빠지고 방충망이 찢어진 창문을 쳐다보며 저 작은 구멍을 찢어서 그리로 빠져나가면 어떻게 될까 생각했다. (p233)" 캄빌리가 창문으로 빠져나갈 생각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그녀가 기특했다. 그래, 그렇게 한걸음씩 벗어나는 거야, 라는 응원을 하면서 소설을 읽었다.

"공포 때문이었다. 공포라는 감정은 익숙했지만 매번(다른 맛과 색깔을 띠는 것처럼) 전과는 다른 공포를 느꼈다.(241p)" 아, 어째서 16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아이가 아버지에게서 극도의 공포를 느끼면서, 불안 속에서 인생을 살아가야만 한단 말인가. 가정폭력을 당하는 어린 아이들이 많다는 사실이, 즉 소설이 전혀 허구가 아니라는 점이 슬프다. 슬프다라는 말로는 전혀 채워지지가 않을 만큼.

캄빌리가 아버지에게 적극적으로 감정을 드러낸 것은 한 번 뿐이었던 것 같다. "은수카에 다녀온 이후로 변했고 모든 것이 예전과 달라질, 원래 상태로 돌아가지 않을 운명(p256)" 이라고 느끼는 캄빌리는 아버지가 파파은누쿠 그림을 조각내어 찢어버리자 그것들을 감싸 안는다.

"원래 그것은 잃어버린 무언가, 내가 가져 본 적도 없고 영원히 가질 수도 없을 무언가를 상징했다.(p256)"

"파파은누쿠의 몸이 그렇게 작은 조각으로 잘려서 냉장고에 보관되는 것을 상상했다. (257p)"

아버지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늘 노력하고, 아픔들에 대해서도 침묵했던 캄빌리가 지키고자 했던 것은 할아버지 뿐만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고모, 사촌들과의 추억들, 아마디 신부에 대한 애정과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던 웃음들, 물질적으로는 부족하지만 다정하고 행복했던 그 시간들. 캄빌리는 조각난 그림을 엎드려 보호하면서 그 모든 것들을 아버지로부터 지켜내고자 했을 것이다.

"결연하네. 바구니에 담긴 달팽이를 몽땅 사서 그 한 마리만 풀어 주고 싶었다.(288p)" 탈출하고자 하는 달팽이를 보면서 연민을 느끼던 캄빌리는, 탈출하는 꿈을 꾸던 그녀와 오빠인 자자가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건 아버지의 죽음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비로소 자유로워진 자자와 캄빌리는 이제 새로운 미래를 꿈꾸게 되었다. "자유의 노래가, 웃음이 되어 나오(356p)"게 만들어준 은수카에 가서 오빠와 함께 지낼 미래를.

소설을 읽는 내내 분통이 터졌다. 책의 배경은 나이지리아지만, 가정폭력이나 가부장제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은 어느곳에나 있다. 피해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여러 단체에서 나서고 있고, 상황은 점점 나아지고 있지만 지금도 어딘가에서 아픔을 겪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잘못된 상황에 처해 있으면서도 캄빌리나 자자처럼 그 상황을 타파할 시도를 하고 있지 않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들이 잘못되었다고, 그들의 선택이니 스스로 책임을 지어야 한다고 말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그들도 자신이 깨닫지 못하면, 누구도 도와줄 수 없다는 걸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그들의 삶에 '은수카' 같은 곳이 나타나주기를, 나로서는 바라는 수밖에 없겠다.

캄빌리와 자자의 내면 묘사가 세심하게 그려진 점이 제일 흥미로웠다. 아무렇지 않게 당하기만 하던 아이들이 조금씩 벗어나고자 마음을 먹을 때 얼마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던지. 아버지가 죽고 나서도, 아버지라는 그림자를 완전히 떨쳐버리기는 힘들겠지만, 캄빌리와 자자가 이제부터라도 원하던 인생을 조금씩 찾아가게 되면 좋겠다. 어딘가에 분명히 존재할 그들의 인생을, 진심으로 응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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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프롬 - 사랑의 혁명을 꿈꾼 휴머니스트 클래식 클라우드 15
옌스 푀르스터 지음, 장혜경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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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의 거장'을 찾아 떠나는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 15번째 도서는 <에리히 프롬>이다. 이전과 달리 '옌스 푀르스터'라는 외국인 작가가 가이드 역할을 맡았다. 11월부터 '인생 여행단'이라는 '클래식 클라우드' 서포터즈 활동을 하면서 총 3권의 책을 만났다. 그중에서 이번이 가장 흡족하고, 생각할 여지를 많이 준 도서였다. '에리히 프롬'이 '소유', '존재', '자유' 등의 소재를 다룬 저서를 써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에리히 프롬>을 쓴 '옌스 푀르스터'의 문체 덕분인 것도 있다. 그는 무언가에 관해 단언하지 않고, 여러 생각들을 제시한 후 자신의 의견은 이렇다,고 얹어 주었다. 그러니까 판단은 철저히 독자의 몫인 것이다. 독자에게 가르치려 들지 않는 자세는 서문에도 명시되어 있다. "누가 옳고 그른가는 부차적 문제다. 누군가가 수많은 사람에게 중요한 주제를 새로이 고민하게 하여 더 나은 이론이 나올 수 있도록 생각의 문을 열었다는 사실이 훨씬 더 중요하다", 혹은 "연구는 토론을 선도하기 위해 존재하고 이론은 언젠가 반박당하여 더 나은 이론이 생겨날 수 있기 위해 존재한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무엇이 옳다, 고 제시하지 않았으며 '에리히 프롬'의 의견이나 이번 책 자체에도 여러 의견이 제시될 수 있도록 내버려 두었다. 책을 이토록 능동적으로 읽으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에리히 프롬'과 '옌스 푀르스터'에게 빨려 들었다. 실제로 무슨 생각까지 했냐 하면, '옌스 푀르스터'에게 현재 느끼고 있는 개인적 고민들을 털어놓고 싶었다. 감정들을 누군가의 앞에 쏟아내는 일에 서투르지만, 왠지 나를 섣부르게 재단하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들었다. 이렇게 모호한 문체가 누군가에게는 답답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으나, 나는 오히려 스스로 생각을 쥐어짜낼 거리가 생겨서 즐거웠다.

이제 '에리히 프롬'에 대해 집중을 해볼까 한다. '에리히 프롬'은 '사회심리학자'로, <소유나 존재냐>, <자유로부터의 도피> 등의 유명한 저서들을 남겼다. 그는 각 사회마다 '성격'이라는 것이 존재하며, 인간은 자신이 처한 환경이나 사회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사회가 개인을 병들게 하므로 심리학자들도 이 사회의 억압적 구조를 고발하고 바꿀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또한 개인에게도 적극적으로 사회적 과정에 참여할 것을 권유했으며, 개인이 정치에 어떤 영향력을 미치는지 잘 이해하고 있는 자들이 상위 자리를 차지하기를 바라는 학자였다. 나 또한 개인이 취하는 행동들의 원인이 사회 저변에 위치해 있다고 믿기 때문에, 책을 읽는 동안 크게 공감할 수 있었다. 불안하고 억압된 사회에 산다고 해서 모두가 범죄자가 되고, 옳지 않은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옌스 푀르스터'가 지적한 바처럼, '프롬'이 개인의 어릴 적 환경이나 상황을 고려하지 못한 데 대해서는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프로이트'의 사상이 이미 주도하고 있던 때에 이런 혁신적인 생각을 가질 수 있었던 '프롬'에 대해 놀라운 마음이 든다. 그리고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와 같은 문제이긴 하지만, 가정 환경도 사회의 영향을 받아 결정되므로 그의 생각은 옳았던 듯하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이라는 책을 펴내며, '사랑'에 관한 의견을 펼치기도 했다. 그는 사랑이 "자신을 갈고닦는 훈련"이며, 태생적인 외로움을 극복하고 존재의 핵심을 찾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자신을 적극적으로 깨닫는 일"에 그치지 않고, "상대를 적극적으로 깨"달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프롬'의 주장을 따라가다 보면, 사랑하는 상대를 해치는 일은 발생할 수가 없다. 자신이 존재하는 근본적인 이유를 깨닫게 해준 상대를 망가뜨리는 일은 필연적으로 스스로를 해롭게 하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20세기를 살았던 '프롬'이 내 아버지에게서 보이는 가부장적인 태도가 아니라 상호 존중에서 비롯된 사랑을 지향하는 사고방식을 발견할 수 있었다. 대다수의 흐름을 따라가지 않고, 개별적인 사고를 할 수 있다는 점이 위대한 사상가의 자질인가, 싶기도 했다. 나였다면 무의식에 박힌 사회의 스테레오 타입이 주는 영향을 피하지 못하고 좌절하고 말았을 것이다.

'에리히 프롬'과 저자 '옌스 푀르스터'의 고향인 독일은 한국과 닮은 구석이 있었다. 그들도 능률과 성과만을 중시했고, 이것이 '소유'와 '물질주의'에 관한 물음으로 이어졌다. '에리히 프롬'은 소유를 경계했으며, 받으려 하기보다는 주는 삶을 선택하라고 말했다. 그는 여러 사상으로 독자들의 마음을 흔든 저술가답게, "내적 활동(정서적, 지적, 창조적 활동), 자기가 가진 힘의 생산적 소비" "행복의 길이요, 목표"라는 '소유'의 대안을 제시했다.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소유'에 관한 물음은 익숙하고, 끝을 알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소유'나 '물질'에 관한 생각들은 상황에 따라 변하고, 확언을 하기 어렵다. 그러니까 '에리히 프롬'의 말에 동의를 할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 딱 잘라 말하기가 곤란하다. 하지만 물질적으로 빈곤한 현재의 상태로 볼 때, '소유'를 포기하라는 '프롬'의 주장은 설득력을 얻지 못한다. 내려놓을 것이 없는데, 이미 빈손을 더 털어내라는 조언은 내 마음을 휘두르지 못했다. 기본적으로 소비에 크게 관심이 없기 때문에 그의 주장이 와닿지 못했던 이유도 있을 것이다.

'소유', '존재', '자유', '사랑' 등의 주제는 확실히 논란의 여지가 많은 주제들이다. <에리히 프롬>의 저자인 '옌스 푀르스터'는 '프롬'의 인생사와 그가 머무른 장소를 언급할 뿐만이 아니라, 이런 주제들을 표면으로 꺼내 독자들에게 끊임없이 책에 참여할 여지를 제공한다. '에리히 프롬'의 견해에는 공감하는 바가 더 컸지만, 누군가에게는 불편한 요소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옌스 푀르스터'가 언급했듯 옳고 그름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런 생각들을 할 계기를 제공해주었다는 것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그러니 다른 독자들도 <에리히 프롬>과 함께 즐겁게 토론에 참여해주면 좋겠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이번 클래식 클라우드 서포터즈 활동 중에 최고로 꼽고 싶다. 또한 '에리히 프롬'이 말년에 머물렀던 스위스의 '무랄토' 지역에 가고 싶어졌다. '프롬'에 대한 애정도 있지만, 장소 자체에 크게 매력을 느끼기도 했다. "쓸데없는 물건들이 유혹하지 않"고, "그저 숨 쉬고 커피 마시고 공기를 즐기"는 일이 전부이며, "내려놓기가 쉬울"듯하다,는 저자의 표현에 나는 언제 갈지도 알 수 없는 다음 여행의 목적지를 '스위스'의 '무랄토'로 설정해두었다.

#내가뽑은명문장

물질주의자면서 바라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물질적인 게 아니니까. 행복, 관계, 아름다운 인생 같은 걸 바라니 전부 다 가졌으면서도 가진 게 하나도 없다고 느끼는 거지.

그래, 이것으로 내 인생 전체에 걸쳐 가지고 있던 의문이 해결되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정신적이고 감정적인 것들을 물질로 모두 '구매'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된 사람들이 생겨났다. 좋은 대학과 직장에 가면 만사가 해결되리라는 믿음을 가지게 된 내 부모의 세대들처럼(결국 그들이 옳지 않았음을 우리 세대가 온 몸으로 증명해내고 있다), 물질이 만사형통의 해결책이라고 여기게 된 사람들이 안타깝다. 그리고 이 문제의 원인은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해결되지 못하는 사회 구조에 책임이 있다.

불리한 인격 발달은 교육 방식 때문이기도 하지만 구체적인 사회 현상의 탓도 크다.

어릴 때 무언가를 잘못하면 어른들은 늘 부모의 교육 방식을 지적했다. 나로서도 부모의 얼굴에 먹칠하지 않기 위해서 노력을 무진장했다. 어른이 되고서야 부모가 주는 영향력만큼이나 또래 집단과 더 큰 사회가 내 인격 발달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음을 깨달았다. 내 그릇된 행동으로 부모가 책임을 지는 것은 부모가 이른바 내 직속 상관이기 때문이다. 아이 하나가 잘못되면 온 동네에 책임이 있다,던 말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

사격수의 편견 실험은 사회의 스테레오 타입이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매우 확실한 사례이다.(210p)

"의식과 무의식의 불일치"를 강조하는 부분이다. 내가 의식적으로는 인종을 차별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무의식적으로 박힌 사회적인 편견이 행동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예시가 제기되었다. 이는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가난이나 유리천장을 극복해내지 못하리라는 예측만큼이나 나를 무력해지게 만들었다. 이미 내 무의식에 새겨진 사상들은 별 수 없는 것이겠지만, 후대의 아이들에게 올바른 생각을 심어줄 수 있는 좀 더 건강한 사회가 되기를 희망해본다.

시간이 촉박하다. 최근에 한 기후학자가 텔레비전에 나와 말하기를, 20층 건물에서 떨어지는 남자가 2층을 지나며 '아직은 다 괜찮아'라는 농담을 했다고 한다. 이 남 자는 기후변화를 대하는 우리 인류의 모습이다. 되돌릴 수 있을까?(248p)

아, 이만큼 경각심을 들게 만드는 문장이 있었던가. 기후 변화의 심각성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다만 모두 실천이 부족할 뿐이지. 이 문장도 독자들에게 단순한 자극만을 주고, 실천을 이끌어내지는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후 변화에 대한 두려움으로 간담이 서늘해지고, 팔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아파트에서 떨어지는 일에 비유하니까 기후 변화가 더욱 실제적인 위협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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짓기와 거주하기 - 도시를 위한 윤리
리차드 세넷 지음, 김병화 옮김, 임동근 해제 / 김영사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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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건축'이라는 학문이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에 대해 던지는 물음들을 좋아한다. 그래서 '건축' 관련 서적이나 영화라면 일단 관심을 가지고 보는 편이다. '건축'이라는 단어 자체가 주는 어떤 환상을 가지고 있는 것도 <짓기와 거주하기>라는 책을 선택하는 데 한 몫 했을 것이다. <짓기와 거주하기>라는 책에 기대했던 바는 정말 약소했다. 누구든지 '건축'이라는 학문에 다가서기 쉬운 인상을 주고, '도시'라는 소재에 관해 흥미를 유발할 수 있는 내용이기를 바랐다. 하지만 '리처드 세넷'이 써내려간 이 책은 '도시'를 다각도로 조망하고, 그 과정에서 여러 학문을 아우른다. 도시와 관련된 여러 이론과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심리, 그리고 현 도시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성에 이르기까지. 저자 '리처드 세넷'이 가진 지식의 방대한 양을 따라 잡으려면, 꽤 애를 써야만 했다. 내가 그를 따라 잡기에는 아직 너무도 어리고, 부족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곤 했다. 간단하면서도, 또 얕지는 않은 무언가를 기대했던 사람으로서는 좀 당혹스러운 면이 없지 않았다. 그래도 중반부를 넘어가면서 책의 흐름에 적응이 되기 시작했다. 그래도 역시 이번 도서는 '도시계획'이나 '도시'라는 주제에 꾸준히 눈길을 두고 있던 독자들에게 권해야 할 것 같다. 편집 상에서 책의 맨 뒤에 '리뷰'나 '평론'이라는 단어가 아니라, '해제'라는 파트가 삽입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이 책의 난이도를 짐작해볼 수 있겠다.

<짓기와 거주하기>에서 실제 몇몇 도시들이 언급되기도 했는데, 그 중에서 인천에 위치한 '송도'가 등장해서 반가웠다. '리처드 세넷'이 '송도'에 대해 지적한 부분들은 주목할 만 했다. 저자는 도시라는 공간이 지어지는 것에 그치지 않고, 거주하는 사람들과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우리에게는 주인과 노예 관계에서 물러나 버리는 헤겔의 방식이 아니라 환경을 건설하는 상호작용적 열린 방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송도'는 거주하는 사람들이 수동적으로 도시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처방적 스마트 시티는 이런 마비화의 장소"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열린 도시'를 지향해야 하며, 그것은 거주자들에게 어느 정도 자율을 배분함으로써, 혹은 그들과의 소통을 통해 성취될 수 있다는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도시'뿐만이 아니라, 내가 사는 건물만 고려해보더라도 '짓는 자'와 '거주하는 자'의 의견 교환은 절실히 필요해 보인다.

책을 읽는 동안 '도시'라는 거대한 장소가 내게 생각보다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깨달았다. 자유의지에 따라 행한 일이라고 믿었지만, 그저 도시계획에 따라 움직였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한편으로, 현 도시가 "만든 사람의 의도에 한정되지 않"고, "시간 속에 열"린 채로 개선될 수 있도록 거주자들이 적극적으로 관여해야 한다는 사실을 '리처드 세넷'은 일깨우고 있다. 이제껏 도시를 계획하는 사람들의 일이라고만 여겨왔는데, 거주하는 사람들이 도시에 대해서 더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으므로, 그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도시계획가들의 전문적인 지식과 세월의 흐름, 마지막으로 거주자들의 도시에 대한 애정이 하나로 모아질 때, 비로소 하나의 도시가 탄생한다. 도시계획가와 도시 거주자들의 상호 존중과 겸손함을 통해서 '도시'가 만들어져야 함을 알 수 있었던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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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과 정의 - 문학으로 읽는 법, 법으로 바라본 문학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안경환.김성곤 지음 / 비채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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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 한 해 '법'과 '정의'에 대해 성찰하는 책들이 쏟아져 나왔다. <판결과 정의>(창비 출판), <법의 이유>(arte 출판) 등에 이어 영화나 소설을 통해 '법'과 '정의', 그리고 현 사회를 돌아보려는 <폭력과 정의>(비채 출판)가 등장했다. 믿었던 국가에 배신당한 대한민국 국민들이 그만큼 깨어있는 인식을 가지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증거일 테다. '법'이나 '정의'에 대해 살펴보는 일은 분명히 가치 있는 일이고, 언제가 되었든 반드시 거쳐가야 하는 과정이다. 하지만 '법'과 '정의'라는 단어는 접근하기 전부터 다가서기 어렵다는 인식을 준다. 그런 독자들을 위해 <폭력과 정의>가 출판된 것이다. 우리에게도 친숙한 <메이즈 러너>, <캡틴 아메리카>, <괴물>, <왕자와 거지> 등의 작품을 소재로 삼고 있기 때문에 흥미로우면서도, 심도 있게 본래 가지고 있던 법이나 정의, 사회에 대한 생각들이 옳은지 파헤친다. 사실 <폭력과 정의>라는 제목만 들으면 어둡고 어려운 책일 거라고 여겨지기 쉬울 듯하다. 또한 "문학으로 읽는 법, 법으로 바라본 문학"이라는 부제목이 붙었으나, 이 책에는 영화를 소재로 삼은 경우가 훨씬 많다. 게다가 책은 법에 관해서만 다루고 있지 않다. '안경환', '김성곤' 두 작가의 연륜으로 과거부터 이제까지의 사회를 조망하며, 우리가 가진 편견이 과연 절대적 진리인지에 대해서도 묻고 있다. 그러니까 책의 표지만을 보고 <폭력과 정의>를 판단할 수는 없다. 표지에 쓰인 문구들보다 훨씬 포괄적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 '법의 이면'에서는 법 제도와 변호사라는 직업에 관해 살펴보고 있고, 2부 '정의와 편견'은 언제나 논란의 대상이 되는 '정의'와 우리가 가진 '편견', '차별'등의 일상적인 폭력에 관해 논의한다. 3부 '사회와 사람'이라는 장은 하나의 단어로 추출하기가 어렵다. 다만 특징이라고 하자면, 남북한 분단 상황에 대해 주로 서술하고 있다는 점이다. 1부에서 3부에 이르기까지 소설이나 영화를 통해 독자들에게 다양한 시각을 제공하고, 평소 가지고 있던 인식의 틀을 깨주려는 시도가 엿보이는 작품이다. 또한 법이라는 게 문제가 발생했을 때 완전한 구원이 되어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경고를 한다. 때로 "구원은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양극단의 싸움이 아닌, 시스템을 벗어나 외부로 나가는 제3의 길에 있는지도 모른다"라는 것이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동화 <백설공주>에 담긴 여성에 대한 편견을 지적한 부분이다. 배우 '키이라 나이틀리'를 통해서 나는 이미 우리가 익숙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디즈니 동화들이 실은 여성차별적이라는 사실을 주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백설공주>에서 "여성의 아름다움을 판단하는 거울의 목소리가 언제나 남자 목소리로 되어 있다는 점"이나 왕자가 난쟁이들에게 했던 대사-"이 여인을 나에게 주면 내 소중한 소유물로 삼겠소"-도 "여성은 남성의 소유물이라는 암시가 깔려 있는 것"이라고 지적한 부분은 생소했기 때문에 글을 쓰고 있는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았던 것이다. 이전에 왜 꼭 공주들은 왕자가 구해주러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어야만 하냐는 항의는 들어본 적이 있고, 나도 무척 공감했던 기억이 있다. 동화를 읽는 당시만 해도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에 어린아이들이 어른들의 지식을 얼마나 무력하게 수용하는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거울의 목소리가 남성이었다는 점과 왕자가 '소유물'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는 점은 기억조차 나지 않아서 <폭력과 정의>를 읽는 내내 해당 부분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이외에도 <폭력과 정의>에는 여러 장에서 시스템의 틀 안에서 어떠한 이의 제기도 없이 무언가를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독자들에게 일침을 가한다. 더 나아가 아무리 힘없는 약자라도 나라의 최고 법원으로 하여금 법을 바꾸게 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며, 진지한 참여와 토론을 통해 법이나 사회의 오류가 극복될 수 있다는 점을 주지시킨다.

<폭력과 정의>를 통해서 나는 이전에 관람했던 영화나 읽었던 소설들에 대해 색다른 시각을 획득할 수 있었으며, 평소에 가지고 있던 생각들을 절대적 진리로 여기지 않고, 경계할 수 있게 되었다. 각 장마다 내용이 길지 않으므로, 독서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라도 쉽게 완독이 가능하다는 장점 또한 가지고 있는 책이다.

이 영화는 우리가 절대적 진실이라고 믿는 것들이 사실은 얼마나 허구적이며, 또 얼마나 쉽게 조작될 수 있는가를 잘 드러내고 있다.(...)즉 중요한 것은 ‘진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잘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 P165

기드온이 피리를 뿜어내듯 분 나팔 소리에 법이, 정의가, 판사의 양심이 그리고 인간 존엄을 표방하는 헌법정신이 장단을 맞추었던 것이다. 여기에 법제도의 위력이 있다. - P134

이 재판 결과는 인권유린과 인간성의 희생 아래 경제성장 일변도로 달음박질해온 한국 현대사에 대한 심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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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사나이의 크리스마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이우일 그림, 홍은주 옮김 / 비채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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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원, 작년 12월 24일에 도넛 좀 먹었다고 이런 꼴을 당해야 하다니."

2019년도 벌써 며칠 남지 않았고, 특히 크리스마스가 성큼 다가왔다. 종교적인 이벤트지만, 누구에게나 큰 축제로 자리잡은 크리스마스에 딱 걸맞은 책을 소개하려한다. 한국에서도 마니아층이 두터운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의 작품이다. '하루키'가 쓴 글에 <하와이하다>로 나를 홀려버린 '이우일' 작가의 그림이 더해졌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사실 소설마다 성적인 이야기들을 지나치게 많이 삽입해서 책을 읽을 때마다 개인적으로 불편함을 많이 느낀다. 하지만 <1Q84>나 <노르웨이의 숲> 등의 작품에서도 알 수 있듯이, 대단한 필력을 가지고 있는 작가여서 책이 나올 때마다 결국은 사고야 만다.<1Q84>에서도 결말이 어딘가 엉성해서 화가 났지만, 마지막까지 스토리가 박진감이 넘쳐 책을 놓을 수가 없었다. '이우일' 작가의 그림체는 말할 것도 없다. 그의 그림들이 내 부족한 상상력을 채워주었고, 덕분에 책을 더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역시나 그림들이 매력적이어서 책에서 다 오려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양 사나이의 크리스마스>는 일반 동화와 같은 구조를 가진다. 문제가 발생하고, 타인의 도움을 얻어 문제를 해결해 나가며, 마지막에는 생각지도 못한 기쁨을 맞이하게 된다. '양 사나이'라는 남자가 작곡 의뢰를 받았으나, 약속한 크리스마스가 다 되도록 곡을 써내지 못한다. 전전긍긍하던 '양 사나이'에게 '양 박사'가 어떤 해결책을 제공하고(해결책이 무엇인지는 책에서 확인해 보면 좋겠다. 워낙 글이 짧기 때문에 다 공개하기가 꺼려진다), 이를 실행하는 과정에서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는다. 결국엔 문제가 해결되는 것에서 한발 더 나아가 아주 충만한 크리스마스를 보내게 된다는 내용이다. 이는 어릴 때 읽었던 동화들에서 자주 보던 흐름이다.

책과는 상관없는 내용이지만, 물론 현실에서는 나를 적극적으로 도와주려는 이도 드물고, 결말이 꼭 좋으리라는 법은 없다. 그러고보니까 동화책에서는 왜 끝끝내 실패할 수도 있다는 걸, 인생은 원래 그런 법이라는 걸 알려주지 않았을까? 하긴 어릴 때 주인공이 좌절을 겪는 모습을 보고야 말았다면, 그 트라우마가 꽤 오래갔을 것 같다. '주인공'이라는 타이틀이 붙은 사람은 꼭 성공해서 언젠가는 내 인생도 그렇게 되리라는 점을 보여주어야 했으니까.

<양 사나이의 크리스마스>는 어른이나 아이 상관없이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혹시라도 크리스마스를 기념하기 위한 마땅한 선물을 찾지 못했다면, 이 책을 구매해도 좋겠다. '이우일' 작가의 그림이 삽입되었다는 것만으로도 구매할 이유가 충분하다. 아, 그리고 초판 한정 카드도 들어있으니 책과 함께 오랜만에 편지를 써 선물하는 것도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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