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색 히비스커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황가한 옮김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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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배경은 나이지리아다. 독재 정부가 들어서는 바람에, 학교에서는 폭동이 일어나고, 기름 부족 사태가 발발한다. 가난에 다들 허덕이면서 살아가지만,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는 '캄빌리' 와 '자자'는 그런 고통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대신 그들의 가정에는 가부장적이고, 신앙에 대해 지나치게 독실하고, 강압적이며 폭력적인 아버지가 존재한다. 내가 보기에는 응당 벗어나야 할 것만 같은 그런 상황에서 그들은 계속 피해자인 채로 살아나간다.

"나는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만들고 싶었고, 아버지만큼 공부를 잘하고 싶었다. 아버지가 내 목덜미를 어루만지며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존재라고 말하는 것을 들어야만 했다.(...)하지만 나는 2등을 했다. 실패로 더럽혀졌다.(P54)"

이처럼 캄빌리와 자자는 아버지가 세워놓은 목표치에 늘 도달해야만 하고, 주어진 자신들의 '일과표'에 맞는 삶을 살아야만 한다.

1등이 누구인지 알아낸 아버지 '유진'은 캄빌리에게 "저 애도 머리가 하나지 두 개가 아니잖니. 그런데 왜 쟤가 1등을 하도록 놔뒀지?(p63)" 라고 야단친다. 또한, "하나님은 완벽을 기대하셔. 나한테는 제일 좋은 학교에 보내 주는 아버지가 없었다.(64p)"

아버지는 자신이 가진 결핍을 떨쳐내지 못했다. 그리고 어릴 때 성직자들에게서 받았던 도움에 병적으로 집착한다. 스스로가 결핍 속에서 느껴야만 했던 아픔들을 극복하지 않으면, 그것들이 전부 자식에게로 또 대물림 된다. 유진이 만들어 낸 가정은 부유한지는 몰라도, 더 나아져야 한다는 강박 속에서 행복해지기는 어렵다.

나는 자식들을 폭행하면서, 우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자신이 가진 신앙으로 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듯 그의 자식들도 같은 믿음을 가져야만 하고, 자신이 열심히 공부해서 모든 걸 극복해낸 것처럼 자식들도 우수한 사람이 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그가 가진 강박을. 하지만, 그것이 폭력을 정당화 할 수는 없다. '절대' 어떤 이유에서든지 폭력은 정당화 될 수가 없는 것이다.

벗어날 생각 같은 건 하지 않던 자자와 캄빌리의 삶이 달라진 것은 '은수카'에서 '이페오마' 고모와 함께 지낸 시간들 덕분이었다. "문화적 자의식이 있는 음악가들(p190)"의 음악을 듣고, "때가 되면 아버지가 결정(p165)"할 것이라고만 생각했던 대학과 전공에 대해, 자신과는 달리 각자만의 고민을 하는 사촌들이 있는 곳 은수카. 한 번의 방문만으로 자자와 캄빌리의 삶이 극변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에게 굉장히 큰 영향을 끼친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이페오마 고모와 함께 대학교 캠퍼스 투어를 하고 나오면서 오빠 자자는 사자상 밑의 "인간 존엄성을 회복하기 위하여(p167)"라는 글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자자는 '존엄성'이라는 글자를 보면서, 새삼스럽게 자신이 처한 상황을 깨닫게 된 것 아니었을까. 아버지가 그들을 대하는 방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새롭게 인식하게 된 것은 아니었을까? 그들은 이처럼 자신들과는 다른 삶을 살아가는 사촌들을 지켜보면서, 자신들의 삶 속의 왜곡된 지점을, 그리고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또다른 선택들을 마주하게 된다.

고모가 자자를 오포보의 자자왕-저항자-와 비교한 대목도 흥미롭다. 이후 그는 아버지가 신앙을 강요하는 데에 반항하고, "사생활을 좀 갖고 싶(p236)"다면서, 방 열쇠를 보관하겠다고 요구하기 때문이다. 성지주일 전에 그 말을 들었던 자자와 그 이후에 자신의 알을 깨부수려는 자자를 통해서, '저항자'라는 말이 자자에게 어떤 깊은 울림을 주었는지, 그리고 고모와 사촌들이 그의 인생을 얼마나 송두리째 바꿔 놓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 "아버지가 너희가 여기 며칠 더 있었으면 한대." 그 때 오빠가 어찌나 활짝 웃던지 이때껏 있는 줄도 몰랐던 오빠의 보조개가 보였다.(185p)" 집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자자의 마음이 여실히 느껴져 마음 아팠던 대목이다. 모르고 살았다면 괜찮았을 수도 있지만, 자자가 '다른 선택'에 대해서 알게 된 이상, 그는 '저항자'가 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자자의 여동생인 '캄빌리'는 적극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지만, 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갈구하는 아이다. 할아버지 '파파은누쿠'와 사촌 '아마카'가 보이는 다정한 모습들을 보며, 어쩌면 자신이 애정을 갈구하고 있었다는 걸 깨닫는다.

"그들은 최소한의 단어만 사용하면서도 서로의 말을 이해했다. 두 사람을 보면서 내가 절대 가질 수 없을 뭔가를 향한 갈망을 느꼈다. (p205)" 집에 갇혀서 아버지가 준 일과표만 따르고 살았던 자자와 캄빌리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 어린아이들로서 당연히 받아야 할 부모님의 애정이 부족하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야만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캄빌리는 폭력을 행사하는 아버지를 두고서도, 아버지를 따르려고 노력하고 그 부당함에 대해서 침묵하는 아이였다. 자신에게 비아냥거리는 사촌 '아마카'에게 소리치며 대꾸하자 아마카는 (내가 보기에) 기뻐하는 것 같았다. "너도 그렇게 큰 소리로 말할 수도 있구나, 캄빌리.(p211)" 이후 아마카의 캄빌리에 대한 태도는 완전히 변화한다. 더 이상 아무것도 모르는 캄빌리를 조롱하지도, 비아냥 거리지도 않는다. 나는 아마카가 캄빌리를 비난하던 것은 그저 자신의 사촌이 처한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고, 거기서 빠져나오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분명히 자기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드러내지 않고, 도망치려고만 하지 말고, 현실과 마주하고 그 알을 깨부숴주기를, 아마카는 바랐을 것이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억압받고 있는 자자와 캄빌리는 소설 내내 엄청 적극적으로 아버지에게 대항하지는 않는다. 영성체를 거부하거나, 죽은 파파은누쿠의 그림을 몰래 보관하는 일. 그 뿐이다. 하지만 그들은 분명 정신적으로 성장하고 있었고, 그들이 한 반항은 그들의 최선이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나는 비늘판 몇 개가 빠지고 방충망이 찢어진 창문을 쳐다보며 저 작은 구멍을 찢어서 그리로 빠져나가면 어떻게 될까 생각했다. (p233)" 캄빌리가 창문으로 빠져나갈 생각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그녀가 기특했다. 그래, 그렇게 한걸음씩 벗어나는 거야, 라는 응원을 하면서 소설을 읽었다.

"공포 때문이었다. 공포라는 감정은 익숙했지만 매번(다른 맛과 색깔을 띠는 것처럼) 전과는 다른 공포를 느꼈다.(241p)" 아, 어째서 16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아이가 아버지에게서 극도의 공포를 느끼면서, 불안 속에서 인생을 살아가야만 한단 말인가. 가정폭력을 당하는 어린 아이들이 많다는 사실이, 즉 소설이 전혀 허구가 아니라는 점이 슬프다. 슬프다라는 말로는 전혀 채워지지가 않을 만큼.

캄빌리가 아버지에게 적극적으로 감정을 드러낸 것은 한 번 뿐이었던 것 같다. "은수카에 다녀온 이후로 변했고 모든 것이 예전과 달라질, 원래 상태로 돌아가지 않을 운명(p256)" 이라고 느끼는 캄빌리는 아버지가 파파은누쿠 그림을 조각내어 찢어버리자 그것들을 감싸 안는다.

"원래 그것은 잃어버린 무언가, 내가 가져 본 적도 없고 영원히 가질 수도 없을 무언가를 상징했다.(p256)"

"파파은누쿠의 몸이 그렇게 작은 조각으로 잘려서 냉장고에 보관되는 것을 상상했다. (257p)"

아버지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늘 노력하고, 아픔들에 대해서도 침묵했던 캄빌리가 지키고자 했던 것은 할아버지 뿐만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고모, 사촌들과의 추억들, 아마디 신부에 대한 애정과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던 웃음들, 물질적으로는 부족하지만 다정하고 행복했던 그 시간들. 캄빌리는 조각난 그림을 엎드려 보호하면서 그 모든 것들을 아버지로부터 지켜내고자 했을 것이다.

"결연하네. 바구니에 담긴 달팽이를 몽땅 사서 그 한 마리만 풀어 주고 싶었다.(288p)" 탈출하고자 하는 달팽이를 보면서 연민을 느끼던 캄빌리는, 탈출하는 꿈을 꾸던 그녀와 오빠인 자자가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건 아버지의 죽음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비로소 자유로워진 자자와 캄빌리는 이제 새로운 미래를 꿈꾸게 되었다. "자유의 노래가, 웃음이 되어 나오(356p)"게 만들어준 은수카에 가서 오빠와 함께 지낼 미래를.

소설을 읽는 내내 분통이 터졌다. 책의 배경은 나이지리아지만, 가정폭력이나 가부장제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은 어느곳에나 있다. 피해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여러 단체에서 나서고 있고, 상황은 점점 나아지고 있지만 지금도 어딘가에서 아픔을 겪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잘못된 상황에 처해 있으면서도 캄빌리나 자자처럼 그 상황을 타파할 시도를 하고 있지 않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들이 잘못되었다고, 그들의 선택이니 스스로 책임을 지어야 한다고 말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그들도 자신이 깨닫지 못하면, 누구도 도와줄 수 없다는 걸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그들의 삶에 '은수카' 같은 곳이 나타나주기를, 나로서는 바라는 수밖에 없겠다.

캄빌리와 자자의 내면 묘사가 세심하게 그려진 점이 제일 흥미로웠다. 아무렇지 않게 당하기만 하던 아이들이 조금씩 벗어나고자 마음을 먹을 때 얼마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던지. 아버지가 죽고 나서도, 아버지라는 그림자를 완전히 떨쳐버리기는 힘들겠지만, 캄빌리와 자자가 이제부터라도 원하던 인생을 조금씩 찾아가게 되면 좋겠다. 어딘가에 분명히 존재할 그들의 인생을, 진심으로 응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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