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쉬운 마음 글쓰기 - 일기, 독서록으로 아이와 씨름하는 엄마들의 필독서
이임숙 지음 / 부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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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학기 부터 서울시 교육청의 재능 기부자가 되어 딸 아이의 학교에서 1, 2 학년 학생들의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다. 어린 친구들이라 각기 차이도 있는데다 학년이 벌어져 내심 쉽지 않겠다 생각했다. 첫 수업 준비를 그간의 경험으로 미뤄보아 결코 적지 않게 했는데도 어린 친구들은 금새 해치운다. '각자 낱말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 보고 싶어 그러니 조용히 써 보라' 권유했다. 물론 예를 들기 위해 몇 개를 같이 했는데 재미있었는지 어린 친구들은 신나서 소리 높여 말한다. 그 말을 생각 못한 다른 친구들은 '옳다구나' 싶은지 들은대로 열심히 쓰고 있다.

'에고, 이 시도는 실패구나' 싶었다. 준비한 유인물은 2장에 불과했지만 시간이 모자라야 정상인데 오히려 남았다. 5학년 언니 오빠들도 시간이 모자라 쩔쩔 맸는데 어린 친구들이 어찌 그리 빨리 끝마쳤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시간이 3분 정도 남았고 그 시간은 생각외로 길었다. 수업을 마치고, 가면서 먹으라고 나눠준 요플레를 어린 친구들은 '좋네, 싫네' 하면서 받고, '역시 글쓰기는 싫다'며 가면서 말하는 친구도 있었다.

정신이 없었다. 분명히 재미있게 했는데 뭔지 모르게 낙심이 됐다. 원래 계획은 학생들의 수준을 파악한 후 책을 읽고 독후감을 써보게 할 작정이었다. 비록 힘들긴 하지만 단 몇 줄이라도 독후감을 쓰는 것이 아이들에게 도움이 된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우울했다. 그리고는 아이들이 쓴 글을 읽지 않고 구석에 밀어두었다. 괜히 신청했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그런데 다음 차 수업을 위해 아이들의 글을 보며 나는 놀라고 말았다. 아이들의 글이 너무 귀엽고 예뻤다. 함께 했기 때문에 같은 말들이 반복되긴 했지만 각자 자신의 생각을 열심히 적어놓고는 옆에 그림도 그려 넣었다. 12명의 글을 읽으며 속상했던 마음이 확 풀리는 기분이었다. 아이들의 글을 읽으며 나는 크게 깨달았다. 사람은 겉으로 보여지는 것이 다가 아니며, 겉으로 드러나는 느낌만으로 사람을 판단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착각이었는지를 말이다.

글은 진실로 말과 달랐다. 까불대며 단 몇분도 가만히 있지 않던 아이의 마음을 글로 읽으며, 만약 내가 아이의 글을 읽지 않았다면 어떤 판단을 내렸을지를 생각하게 됐다. 그랬다면 나는 수업 태도나 인상만으로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글이 아니었다면 결코 몰랐을 아이의 마음을 알게 됐다. 아이들의 글에 내 느낌을 덧붙이며 나는 신이 났다. 쓰면서 나는 아이들의 마음을 깊게 느끼고 있었다.

글이란 그런 것이다. 말로는 다 못할 마음을 전하는 것, 그리하여 읽는 이의 마음까지 온기를 가져다 주는 것이 글이다. 그런데 말처럼 쉽지 않다는 어려움이 있다. 얼마나 쉽지 않은지 아이들은 글쓰기를 싫어하고 내심 두려워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아이들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쓰기 힘들어서 싫어하는 것이지 결코 글쓰기 자체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그 진지하고도 절박한 내 물음에 대한 답이 이임숙 선생의 '참 쉬운 마음 글쓰기'에 있었다.

그녀의 책엔 아이들과 오랜 시간을 함께 한 사람에게서만 나오는 연륜이 묻어났다. 또한 아이들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표현이 있었다. 신뢰가 갔다. 글쓰기에 관련된 책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자칫하면 많은 책 중의 하나로 전락할 위험도 있는 것이 글쓰기 관련 책이다.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책을 냈을 때는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서문을 다시 읽기로 했다. 서문에는 종이만 보면 괴로워하던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자신이 글쓰기를 어려워했기에 아이들의 고민은 곧 어린 그녀의 고민이었으며, 그 고민을 안고 아이들을 가르쳤기에 그녀의 책은 단순한 지침서가 아닌 아이들을 살리는 글쓰기에 관한 고백록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막상 현실로 돌아가면 또 다른 막막함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글쓰기란 선한 의도와 좋은 목적만으로 합당한 결과를 낼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갖게 되는 어려움 말이다. 구체적인 방법과 세밀한 스킬이 있어야만 적합한 결과를 이끌어 낼 수 있는데, 이 또한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선한 의도로 글쓰기를 가르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그만으로는 부족하기에 '아이들이 자신의 마음을 글로 쓰게 하라'는 그녀의 조언은 심도있게 다가온다. 현장에서 아이들과 부딪히며 피드백을 하고 그런 과정을 통해 직접적으로 좋은 결과를 이끌어냈기에 그녀의 사례담은 힘있는 것이다.

그녀의 글을 통해 나 자신이 지금껏 지극히 피상적이고 당연한 질문을 해왔던 것은 아닌가 자문해 본다. 더 고민하기 싫어 단편적인 질문에 머물렀던 것은 아닌지, 아이 자신의 감정만으로도 많은 질문을 할 수 있고 글도 쓸 수 있었는데 더 나아가지 못했던 것은 아닌지 스스로 반성해 본다. 그러나 자책보다 기쁨이 앞서는 것은 그녀의 교수법과 그 결과를 현장에서 아이들과 함께 누려보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서 글쓰는 아이들의 얼굴이 찡그림이 아닌 해맑은 웃음으로 바뀌는 것을 보았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덧붙여 글쓰기를 통해 아이들이 자신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갖기를 바라서이기도 하다.

공부나 학습을 위해서가 아닌 아이들 자신을 위한 글쓰기 지침서를 만나게 돼 기쁘다. 아이들이 글이란 멋진 친구를 좋아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나 또한 기대 가득하다. 글쓰기가 자신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이라는 것을 아이들이 알 수 있도록 지도해보고 싶다. 지금 내 마음은 아이들 곁으로 달려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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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레프
파울로 코엘료 지음, 오진영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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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물음의 시작

파울로 코엘료가 나를 찾아왔다. '당신의 인생은 안녕하시냐'는 진지한 물음을 안고서 말이다. '당신은 안녕하시냐'는 그의 도발적인 질문이 내 가슴을 강타한다. '그런 한가한 소리가 미친듯이 내달리는 이 시대에 과연 적합하냐'며 되묻고 싶어 고개를 든다. 내 앞에는 자신의 질문에 확신을 가진 자의 눈이 있다. 그 눈은 조그만치의 흔들림도 없다. 단호하지만 자신만만하지 않은 그 눈에, 내 안의 반감이 사라지고 있다. 타인의 생에 간섭하는 듯한 그의 이야기가 거슬리지 않을 것 같다. 그렇기는 커녕 들어보고 싶은 마음이 일기 시작한다. 그는 어떤 글로 나를 흔들 작정인지 그의 책을 펴보기로 한다.

파울로 코엘료는 생의 본질적 문제를 유려한 필체로 그려내는 작가다. 구도자적인 행보와 묵직한 주제의 관조적인 글은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힘이 있다. 그의 근작 '알레프'를 내가 기대하는 이유다.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그의 글이 생의 신비 앞에 홀로 선 내 모습을 적나라게하게 비출 것 같다. 적나라한 내 모습은 내 부끄러움을 드러나게 하기 위함이 아니며 오로지 있는 그대로의 나를 찾기 위한 과정일 것이다. 그래서 더 편해지라고, 그리하여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하라는 코엘료의 배려일 터다. 그 속에 나는 자신을 밀어넣기로 한다.

순례의 여정은 길기만 하고

왜 바쁜지 조차 생각할 겨를이 없는 현대인에게 그의 목가적인 글은 휴식이 된다. 그 휴식은 휴양지에서 보게되는 모조품이 아닌, 대자연의 신비와 절대적 고독을 통해 얻게 되는 평안을 뜻한다. 그 대열에 함께 하고 싶어 나는 지금 그의 책을 읽고 있다. '알레프'. 가장 그다운 글이란다. 그의 글은 구도의 행렬에 섰던 자에게서만 풍겨나오는 기운을 갖고 있다. 그의 문학이 왜 강한 흡인력을 갖고 있는지 직감하게 된다. 그의 글은 구도적 생에 미쳐 기어이 바닥까지 내려간 자의 숨결을 고스란히 담고 있기 때문이다.

생의 의미를 찾는 구도의 길은 숭앙받지 못한다. 그 길에 들어선 자는 손가락질과 비난 어린 시선을 견뎌야 하며 경멸조차도 감수해야 한다. 그래서 쉽게 뛰어들지 못하며, 설사 뛰어든다해도 그 길을 묵묵히 가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자신의 추락을 통해서만이 자신을 비울 수 있다. 그러므로 바닥은 쳐야 한다. 그래야 비울 수 있고 다시 올라올 수 있다. 끝도 모를 바닥에 내동댕이쳐져 피를 흘려 본 사람만이 자신의 소리를 낼 수 있다. 그 시기를 거쳐야 누군가에게 자신을 열 수 있고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영적 여정이 얼마나 험난한지 또한 얼마나 많은 시간을 묶어두는지 코엘료는 알고 있다. 기쁨은 찰나적이며 시간이 지날수록 옅어지는 확신, 그리고 되풀이되는 정체의 시간은 그 여정의 힘겨움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이제 그 여정은 발전이 아닌 퇴보로 뒤바뀌었고 그의 삶은 나른한 일상에 젖어 허우적대기만 한다. 그래서 그는 떠난다. 예전에 나였던 자신을 찾아서. 그 길 속에 답이 있음은 자신의 멘토인 J를 통해, 또한 내면의 소리를 통해서도 이미 알고 있다. 하나 그 길은 결코 만만치 않을 것이며 쉽게 열리지 않을 수도 있다. 어쩌면 그를 통해 나도 지금까지 풀지 못한 숙제를 마무리 하는 결정적 기회를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과거로의 귀환과 씻겨진 상처

그는 자신이 이 생에서 풀어야 할 과제를 이번 여정을 통해 매듭짓기로 마음먹는다. 그에게 제공되는 여행은 시베리아행 열차 횡단이다. 기차를 타고 떠나는 대장정에 그는 자신을 마음껏 흐트러뜨리기로 작정한다. 거기서 만나게 될 운명의 여인을 그는 지금껏 기다려왔다. 하지만 그녀를 보고서도 정작 알아보지 못하는 우를 범한다. 자신이 아프게 한 여덟 명의 여인 중 다섯 번째인 그녀는 힐랄이란 이름의 바이올리니스트다. 행복조차도 기쁨이 되지 못한 삶을 살아온 그녀는 코엘료의 책을 통해 둘이 연결돼 있음을 깨닫는다. 그녀는 오로지 그를 만나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행동하고 그의 곁에 있게 되는 행운을 자신의 손으로 잡는다.

그를 만나기 전부터, 그보다 더 오래 전부터 그를 사랑해 왔음에도 그녀는 지난 생에 있었던 그와의 관계에 대해 석연찮은 느낌을 갖고 있다. 그러나 코엘료는 용서부터 구한다. 힐랄은 그에게 용서를 주며 그가 지난 생의 문을 향해 나가도록 용기를 북돋운다. 그녀를 통해 그는 자신을 용서하게 된다. 사랑하는 소녀를 지키지 못한 과거 어린 수사의 슬픔은 이제 위로받아야 했다. 그 때가 되었다. 그 두렵고 무서운 시간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감당하기엔 그는 너무 어렸다. 어린 수사가 소녀를 지키기란 힘에 부치는 일이었다. 사랑했던 소녀를 이단 사냥의 희생양으로 만들어버린 어린 수사는 자신의 비겁함에 절망하고 영원히 잊지 못할 흔적을 스스로에게 남긴다. 다음 생을 살아도 여전히 남아 있던 흔적은 이제 힐랄의 혼신의 연주와 그 자신의 끝없는 눈물을 통해 씻겨나간다.

오늘, 그리고 인생이란 이름의 기차

인간의 비극은 오늘을 살지 못하는데 있다. 아둔한 우리는 바꿀 수 없는 과거에 머물거나 내 것이 아닌 미래에만 눈을 돌린다. 방기된 삶이 상실보다 더한 아픔을 불러올 수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인생을 허비하는 두려움을 견디지 못하여 자원하듯 두려움에 빠져 사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굴레를 쓴 채 죄수로 살다 생을 마감하는 미련함을 되풀이한다. 생을 오도하는 헛된 꿈에서 벗어나 오늘을 살아야 한다는 코엘료의 말이 반복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는 지금 의미를 되새겨보고 있다. 어쩌면 알레프의 주제는 '현재적 삶의 소중함은 아닐까' 잠시 생각해 본다. 그리고는 숨을 고르고 있다.

코엘료는 우리의 생을 기차역이 아닌 기차로 비유한다. 그 비유는 의미심장하며, 열차 안을 오가며 시간을 통과하는 기차 여행은 현대인의 삶을 상징적으로 그려준다. 기차 안의 사람들은 타인과 대화하지 않으며 자신의 고민거리와 상념에 빠진채 마음의 빗장을 지르고 있다. 두번 다시 만날 일이 없을 거란 생각은 앞 좌석의 사람을 낯선 이로 취급하며, 할 수 없이 객실을 공유해야하는 외인이라는 자조적 판단을 내리게 한다. 아무리 비참하거나 외로운 기분이 들어도, 또는 마침내 얻게된 행복과 가슴을 짓누르는 슬픔을 나누고 싶어도 차라리 침묵을 지키는 편이 더 낫다는 판단을 내리고 만다. 이 시대 안에 발을 딛고 있는 내 얼굴이자 우리의 자화상이다.

알레프

나는 생을 여행하는 여행자며 외국인이다. 그러나 이방인은 아니다. 내가 그리고 우리가 그럴 수 없는 이유는 우리 속에 사랑이 내재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코엘료와 힐랄을 살게 했고, 아내를 잃고 비통에 빠진 통역사 야오에게까지 미쳤으며, 결국엔 나와 우리를 살게 할 것이다. 반복된 생의 저주를 풀게 한 것도, 미래의 소망을 갖게 한 것도 결국은 오늘의 생을 향한 뜨거운 열망에서 비롯됐다. 그 열망은 사랑의 다른 이름이며 탈바꿈한 사랑이었다.

코엘료의 터져나온 눈물은 사랑 안에서만 흐를 수 있었고, 그 눈물은 그의 지난 생과 오늘의 삶을 치유했기에 시간의 시작과 마지막을 관통할 수 있었다. '알레프'와 함께 한 시간 속에 내 생의 아픔도 조금은 봉합되었으리라. 아픔이 사라진 자리를 메웠을 사랑의 온기는 지나간 내 생도, 오늘을 거쳐 내일이 될 내 작은 세상도 한결같이 지나가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내 작은 세상과 이 큰 세상은 중심을 같이하는 동심원처럼 연결되리라. 알레프란 사랑의 이름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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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치마 사다코
은미희 지음 / 네오픽션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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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옹호할 마음은 없다. 그러나 이해할 수는 있을 것 같다. 조선 땅에서의 그녀의 삶이 얼마나 비루했는지 충분히 알았으니 말이다. 그러기에 인간적으로 안됐다는 마음도 든다. 하지만 이해에서 단 한 걸음이라도 더 나아갈 수는 없다. 그녀로 인해 죽은 사람들과, 그녀의 해악에 피해 입은 사람들을 생각하면 어쩌면 이마저도 과분할지 모른다 . 인간적으로는 측은하지만 역사적으로는 재고의 여지도 없는 여인, 그녀에 관한 글을 읽었다.

그녀의 이름은 배정자. 사람들은 그녀를 매국노라 불렀다. 그녀는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하며 평생을 욕망을 따라 살았다. 흔들릴 법도 하련만 생의 처절함을 먼저 배운 그녀에게 조국애는 처음부터 기대하지도 말았어야 했다. 조선은 그녀에게 오로지 아픔만을 준 나라였다. 아버지를 죽인 나라, 결국엔 어머니마저 눈을 멀게 만든 나라, 한끼를 위해 어머니가 자신의 몸마저 자신의 것이기를 포기해야 했던 나라. 조선 땅은 단지 생존을 위한 처절한 전쟁터로만 기억될 뿐이었다.

당시 조선은 일촉즉발의 위기 속에 강대국의 눈치만 살피며 숨죽여 지내야했던 나라였다. 자국의 왕후가 일본의 무사에게 처참히 도륙된 후, 숨이 끊어지기도 전에 불에 태워진 참변을 당했음에도, 변변한 항의조차 못하는 실정에 있었다. 심약한 왕은 자신을 도와줄 사람만 찾을 뿐 스스로 방책을 강구할 여력도 없었다. 그런 풍전등화의 시대에 배정자는 이토 히로부미의 수양딸이라는 이름을 달고 궁궐을 제 집 드나들듯 드나들며 일본을 위한 음모를 착착 진행하고 있었다.

결국 조선에서의 모든 일은 이토 히로부미의 계획대로 되었고, 배정자는 미천한 기생에서 왕에게도 댓거리를 하는 막후 조정자가 되어 천하를 주물렀다. 배정자의 행보는 이토 히로부미가 죽은 후에도 거침없이 이어졌다. 이제는 홀로서기를 위해서라도 일본에 더 충성해야 했다. 그녀는 만주에서 첩자로도 활약했고, 대동아 전쟁의 승리를 위해서는 노구의 몸으로 위안부를 모집하는데 앞장서기까지 했다. 세상을 뜨는 그 날까지 배정자는 오로지 일본과 자신의 욕망만을 위해 살았다.

매국노라 불렸던 실존 인물의 삶을 다룬 글이었기에 이 책이 처음부터 편할 수 없었다. 식민 치하의 아픔은 어떤 도움도 필요없이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역사에 앞장 섰던 부정적 인물의 삶을 굳이 읽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읽는 동안 회의가 들었다. 그러나 역사의 엄중한 평가를 받았음에도 그녀가 실존했음은 사실이라는 데에 관심이 갔다. 그녀가 왜 그런 삶을 살게 됐는지, 맹목적이리 만치 경도된 일본 사랑은 어디서 왔는지 한번 쯤은 알아볼 필요도 있다 싶었다. 왜 그렇게 이토 히로부미를 잊지 못했는지도 더불어 궁금했다. 이토 히로부미야말로 우리에겐 원흉이지 않은가.

이런 생각을 하고 바라보았더니 책이 새롭게 보였다. 위인의 삶도 소중하지만 간악했던 한 여인의 삶을 주목해 보는 것도 의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부분의 가치 판단이 자신의 주관적 경험에 기인하는 경우가 많음을 생각한다면 배정자의 행위가 이해되는 면이 없진 않았다. 젊은 나이에 반역의 죄로 생명을 뺏긴 아버지와 그 충격으로 눈까지 멀게 되고 결국엔 생사도 알 수 없게 된 엄마, 뿔뿔이 흩어진 형제, 그리고 그녀 자신의 기막힌 삶등이 가엽긴 했다.

그러나 측은하다는 이유만으로 그녀의 행위가 덮혀질 순 없다. 그녀가 끼친 해악은 상상을 초월했고 도를 넘었기 때문이다. 역사는 이미 그녀를 향해 엄중한 선고를 내렸다. 그러므로 그녀는 죽었어도 그 굴레에서 영원히 자유롭지 못하다. 당신은 그녀에게 어떤 선고를 내리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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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에 휘날리는 비닐 시트
모리 에토 지음, 김난주 옮김 / 시공사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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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소설은 읽고 나면 항시 여운이 남는다.
따뜻함과 애잔함이 동시에 담겨진 글 속에 있다 나오면, 잠시 가만히 있게 된다.
그 잔상들을 오래 기억하고 싶어서이다.
책을 읽은 후 느껴지는 내 안의 충만함, 그런 기분을 느끼고 싶어 일본 소설을 읽는지도 모르겠다.

일본 작가들 특유의 잔잔히 말하는 방식이 나는 마음에 든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그 방식이 나는 편안하다.
발이 고운 체에 거른 것 같은 찌꺼기가 남지 않은 그 담백한 정서가 나는 좋다.  

그러나 그런 문체보다 더한 것이 일본 소설 속엔 있다.
마치 없는 것처럼 그리지만 활화산 같이 뜨거운 삶에의 열망이 책 속엔 가득 담겨 있다.

너무 뜨거워 차갑게 가라앉혀야만 되는 열망을 자신의 숙명으로 받아들이고는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걸어가는 일본식 生에의 여로를 나는 좋아한다.
묵묵히 가기 위해서 오로지 그 자신에 의해 식혀져야할 열정과
초월적이리만큼 담담한 생을 향한 순응적 인생관이 나는 좋다.  
그런데 이 좋아한다는 느낌이 나를 불편하게 할 때가 있다.
왜 우리의 젊은 작가에게서는 이런 정서적 편안함을 못느낄까 라는 생각에서다.
우리의 젊은 작가들에게서 정서적 동질감을 못 느낀다는 사실이 나는 못내 송구스럽다.
소리는 큰 것 같은데 읽고 나면 큰 소리만큼 느껴지지 않는 작은 울림이 아쉽고
정서의 결이 세밀하지 못함이 안타깝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내 안의 일본 편향적인 취향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좀 곤혹스럽다.

누구도 강제하지 않았지만 이런 나름의 부담을 안고 나는 일본 소설을 읽는다.
그러나 부담 만큼의 설레임이 있다.

'바람에 휘날리는 비닐 시트'는 모리 에토라는 작가의 글이다.
그녀의 글을 이번에 처음 만났다.
이 책은 2006년도 나오키상 수상작이기도 하다.
책 속엔 표제작 '바람에 휘날리는 비닐 시트'를 포함해 6편이 단편이 실려있다.

6편의 단편에는 하나같이 자신의 길을 가는 사람들의 사연이 담겨져 있다.
쉬운 삶이 어디 있겠으며 그 노정의 고단함을 어떻게 다 말로 표현할 수 있으랴만
모리 에토는 청승 떨지 않고 담담하게 그려낸다.
그래서 고달픔은 처량함이 되지 않았고 질곡 또한 생의 긴 여정의 동반자로 표현된다.
그런 삶이 이 책엔 그려져 있다.
그래서 나는 한편 한편을 재미있게 읽었고 책을 덮고 난 지금 소중하게 가슴으로 품고 있다.

표제작인 '바람에 휘날리는 비닐 시트'는 작가의 역량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NGO에서 활동하던 전남편의 죽음을 개인적 슬픔으로 묻지 않고 시야를 확장한 후
자신의 삶으로 온전히 껴안은 아내의 더 커진 사랑을 모리 에토는 서정적으로 그려냈다.
슬픔도 힘이 될 수 있다는 말을 실제로 만들어 버리는 힘을 그녀는 가지고 있었다.
끝내 파국으로 끝나고만 안타까운 사랑과, 남이지만 남일 수 없는 전남편을 향한 사랑을
울부짖음으로 그리지 않았고 그래서 그 사랑은 더 애잔하다.

누군지도 모르는 이름 모를 소녀를 위해 목숨을 버린 한 남자의 생을 비극적으로 그리지 않은
작가의 시선은 참으로 깊고 푸르다.
살았으면 더 많은 일을 했을 한 인간의 죽음을 상실에 머물게 하지 않은 것은 죽음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한다.
비닐 봉지처럼 가치 없게 매겨지는 사람들을 위해 살았던 한 사람의 죽은 몸은
굳어버린 몸으로도 사랑을 전하는 도구가 되었다.

모리 에토는 죽음을 애석함과 비통함으로 그리지 않는 대신 다른 의미로 채색했다.
어쩌면 우리가 죽음을 통해 더 많은 일을 할지도 모른다고.
평생을 다해도 못할 일을 우리가 단회의 죽음으로 완성할지도 모른다고.
그 죽음의 새로운 의미와 더 넓어진 사랑의 확산을 이 책은 내가 원하던 방식으로,
아니 그보다 더 멋진 그림으로 구현해 냈다.

저 멀리 있을 누군가에게 내 마음을 나누고 싶다는 생각을 나는 지금 하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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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통 어른을 위한 동화 11
이상희 지음 / 문학동네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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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조용하고 쓸쓸한 글은 처음이다. 분명 고단한 삶을 그린 글인데 처량하거나 황량한 느낌이 들지 않는다. 가난하면 모든 것이 서럽고 아픈데 그 불편 부당한 슬픔을 이상희는 분노로 그려내지 않았다. 처연하고 애잔한 느낌 때문인지 이 책은 좀 아름답기까지 하다. 작가가 시인이라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그려낸 세상은 이 세상이 아닌 듯하다. 그래서 이 책에 '어른을 위한 동화'란 타이틀이 붙어 있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며 다행한 일이다.

아이는 아저씨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갈 요량이었다. 추위도 배고픔도 아저씨와 바꿀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 여정이 아저씨와 마지막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결혼식장에서 허기를 채우던 아이가 잠시 한눈을 판 사이, 깡통을 쓰레기로 여긴 종업원이 아저씨를 채갔다. 그간 몇 번 헤어졌다 만난 적이 있었지만 이번은 느낌이 영 안 좋다고 깡통은 생각한다. 진짜로 마지막이라고 생각한 깡통은 무언으로 외친다. 수도원의 안토니오 신부님을 꼭 찾아가라고.  

이 책의 제목이자 주인공인 '깡통'은 전생에 시인이었다. 그가 시인이었을 때 사람들은 그가 시인인지 아무도 몰랐다. 그는 세상살이가 늘 버겁거나 힘겨운 사람이었다. 직장 내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사랑하는 가족 속에 있을 때 조차도 그는 혼자였다. 아내와 아이들을 애틋해 했지만 가까이 하지 않았다. 그는 밖으로 떠돌때만 숨을 쉴 수 있었고 숲은 그의 유일한 친구였다. 아들의 생일이었던 그 날도 퇴근 후 교외선을 타고 숲에 틀어박혀 있었다. 그 날따라 숲이 이상했다. 갑자기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면서 비는 금새 폭우로 변했다. 허겁지겁 집에 돌아왔다. 그의 셋집은 산사태로 무너져 있었고, 그는 아내와 아이들의 시신을 수습하고는 도망치듯이 교외선을 탔다.

아이는 혼자다. 아이의 이름은 알 수 없다. 아이의 아버지는 알콜 중독으로 거리에서 죽었고, 엄마 또한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떴다. 피붙이라고는 형 하나 뿐인데 형도 아이를 두고 집을 나가 버렸다. 그런 아이에게 깡통이 찾아온다. 아니 아이가 쓰레기장에서 골라온 두 개의 깡통 중 하나가 그 깡통이었다. 깡통은 자신이 말을 할 줄 알고 움직일 수 있다는 걸 안다. 깡통은 아이를 보며 자신의 딸을 떠올린다. 어쩌면 자신이 깡통이 된 것은 이 아이를 통해 다시 사랑을 해보라는 신의 뜻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아이와 깡통은 하나가 된다. 아이에게 이제 깡통은 세상 누구보다 소중한 아저씨이다. 외롭다는 말조차도 사치스러웠던 그들은 서로를 통해 위로와 힘을 얻는다. 그러나 추운 겨울을 아이가 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깡통은 자신이 설계사였을 때 알게 된 수도원을 찾아가기로 마음먹는다. 이 곳에서 아이는 난생 처음 즐거운 식사를 한다. 나직하고 부드러우며 쾌활하고 질서정연한 그 곳에서의 일상은 마치 딴 세상에 있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깡통의 생각은 달랐다. 깡통은 아이에게 자립을 가르치고 싶었다. 깡통은 급한대로 몸을 추수린 아이를 데리고 다시 떠난다.  

시간이 많이도 흘렀다. 아이는 이제 수도원에서 김씨라 불린다. 아이의 귀밑머리에도 흰 머리가 보이기 시작한다. 아이는 아직도 자신의 마음에 큰 구멍이 뚫려 있음을 느끼고 있다. 아저씨와 헤어진 뒤부터 아이는 깡통만 보면 눈이 번쩍 뜨인다. 그러나 아저씨를 찾을 수는 없었다. 아이가 얼마나 아저씨를 그리워하는지는 누구도 모른다. 아이는 아직도 아저씨가 좋아했던 꽃을 찾는다. 그 꽃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마리아에 의하면 무꽃이라 한다. 그 무꽃이 피던 날 아이는 자신도 이제는 꽃을 피울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참 고운 글을 읽었다. 시인이라서 이런 느낌을 줄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한다. 삼인칭 시점의 글인데도 마치 일인칭 시점처럼 느껴진다. 그 사이의 거리가 덤덤한 외피로 드러났음에도 내밀한 고백처럼 내 가슴으로 모든 느낌들이 흘러들었다. 아픈 이야기들이 많았지만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이 차분한 느낌은 '어른을 위한 동화'라는 전체 주제에 잘 맞는 듯하다. 이 살벌한 세상에서 우리를 쉬게하는 것이 유년의 행복한 기억외에 다른 무엇이 있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아름다운 글과 그 글에 맞는 무채색의 수묵화가 글의 여운을 더한다. 모든 좋은 것은 향기를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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