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레프
파울로 코엘료 지음, 오진영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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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물음의 시작

파울로 코엘료가 나를 찾아왔다. '당신의 인생은 안녕하시냐'는 진지한 물음을 안고서 말이다. '당신은 안녕하시냐'는 그의 도발적인 질문이 내 가슴을 강타한다. '그런 한가한 소리가 미친듯이 내달리는 이 시대에 과연 적합하냐'며 되묻고 싶어 고개를 든다. 내 앞에는 자신의 질문에 확신을 가진 자의 눈이 있다. 그 눈은 조그만치의 흔들림도 없다. 단호하지만 자신만만하지 않은 그 눈에, 내 안의 반감이 사라지고 있다. 타인의 생에 간섭하는 듯한 그의 이야기가 거슬리지 않을 것 같다. 그렇기는 커녕 들어보고 싶은 마음이 일기 시작한다. 그는 어떤 글로 나를 흔들 작정인지 그의 책을 펴보기로 한다.

파울로 코엘료는 생의 본질적 문제를 유려한 필체로 그려내는 작가다. 구도자적인 행보와 묵직한 주제의 관조적인 글은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힘이 있다. 그의 근작 '알레프'를 내가 기대하는 이유다.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그의 글이 생의 신비 앞에 홀로 선 내 모습을 적나라게하게 비출 것 같다. 적나라한 내 모습은 내 부끄러움을 드러나게 하기 위함이 아니며 오로지 있는 그대로의 나를 찾기 위한 과정일 것이다. 그래서 더 편해지라고, 그리하여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하라는 코엘료의 배려일 터다. 그 속에 나는 자신을 밀어넣기로 한다.

순례의 여정은 길기만 하고

왜 바쁜지 조차 생각할 겨를이 없는 현대인에게 그의 목가적인 글은 휴식이 된다. 그 휴식은 휴양지에서 보게되는 모조품이 아닌, 대자연의 신비와 절대적 고독을 통해 얻게 되는 평안을 뜻한다. 그 대열에 함께 하고 싶어 나는 지금 그의 책을 읽고 있다. '알레프'. 가장 그다운 글이란다. 그의 글은 구도의 행렬에 섰던 자에게서만 풍겨나오는 기운을 갖고 있다. 그의 문학이 왜 강한 흡인력을 갖고 있는지 직감하게 된다. 그의 글은 구도적 생에 미쳐 기어이 바닥까지 내려간 자의 숨결을 고스란히 담고 있기 때문이다.

생의 의미를 찾는 구도의 길은 숭앙받지 못한다. 그 길에 들어선 자는 손가락질과 비난 어린 시선을 견뎌야 하며 경멸조차도 감수해야 한다. 그래서 쉽게 뛰어들지 못하며, 설사 뛰어든다해도 그 길을 묵묵히 가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자신의 추락을 통해서만이 자신을 비울 수 있다. 그러므로 바닥은 쳐야 한다. 그래야 비울 수 있고 다시 올라올 수 있다. 끝도 모를 바닥에 내동댕이쳐져 피를 흘려 본 사람만이 자신의 소리를 낼 수 있다. 그 시기를 거쳐야 누군가에게 자신을 열 수 있고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영적 여정이 얼마나 험난한지 또한 얼마나 많은 시간을 묶어두는지 코엘료는 알고 있다. 기쁨은 찰나적이며 시간이 지날수록 옅어지는 확신, 그리고 되풀이되는 정체의 시간은 그 여정의 힘겨움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이제 그 여정은 발전이 아닌 퇴보로 뒤바뀌었고 그의 삶은 나른한 일상에 젖어 허우적대기만 한다. 그래서 그는 떠난다. 예전에 나였던 자신을 찾아서. 그 길 속에 답이 있음은 자신의 멘토인 J를 통해, 또한 내면의 소리를 통해서도 이미 알고 있다. 하나 그 길은 결코 만만치 않을 것이며 쉽게 열리지 않을 수도 있다. 어쩌면 그를 통해 나도 지금까지 풀지 못한 숙제를 마무리 하는 결정적 기회를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과거로의 귀환과 씻겨진 상처

그는 자신이 이 생에서 풀어야 할 과제를 이번 여정을 통해 매듭짓기로 마음먹는다. 그에게 제공되는 여행은 시베리아행 열차 횡단이다. 기차를 타고 떠나는 대장정에 그는 자신을 마음껏 흐트러뜨리기로 작정한다. 거기서 만나게 될 운명의 여인을 그는 지금껏 기다려왔다. 하지만 그녀를 보고서도 정작 알아보지 못하는 우를 범한다. 자신이 아프게 한 여덟 명의 여인 중 다섯 번째인 그녀는 힐랄이란 이름의 바이올리니스트다. 행복조차도 기쁨이 되지 못한 삶을 살아온 그녀는 코엘료의 책을 통해 둘이 연결돼 있음을 깨닫는다. 그녀는 오로지 그를 만나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행동하고 그의 곁에 있게 되는 행운을 자신의 손으로 잡는다.

그를 만나기 전부터, 그보다 더 오래 전부터 그를 사랑해 왔음에도 그녀는 지난 생에 있었던 그와의 관계에 대해 석연찮은 느낌을 갖고 있다. 그러나 코엘료는 용서부터 구한다. 힐랄은 그에게 용서를 주며 그가 지난 생의 문을 향해 나가도록 용기를 북돋운다. 그녀를 통해 그는 자신을 용서하게 된다. 사랑하는 소녀를 지키지 못한 과거 어린 수사의 슬픔은 이제 위로받아야 했다. 그 때가 되었다. 그 두렵고 무서운 시간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감당하기엔 그는 너무 어렸다. 어린 수사가 소녀를 지키기란 힘에 부치는 일이었다. 사랑했던 소녀를 이단 사냥의 희생양으로 만들어버린 어린 수사는 자신의 비겁함에 절망하고 영원히 잊지 못할 흔적을 스스로에게 남긴다. 다음 생을 살아도 여전히 남아 있던 흔적은 이제 힐랄의 혼신의 연주와 그 자신의 끝없는 눈물을 통해 씻겨나간다.

오늘, 그리고 인생이란 이름의 기차

인간의 비극은 오늘을 살지 못하는데 있다. 아둔한 우리는 바꿀 수 없는 과거에 머물거나 내 것이 아닌 미래에만 눈을 돌린다. 방기된 삶이 상실보다 더한 아픔을 불러올 수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인생을 허비하는 두려움을 견디지 못하여 자원하듯 두려움에 빠져 사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굴레를 쓴 채 죄수로 살다 생을 마감하는 미련함을 되풀이한다. 생을 오도하는 헛된 꿈에서 벗어나 오늘을 살아야 한다는 코엘료의 말이 반복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는 지금 의미를 되새겨보고 있다. 어쩌면 알레프의 주제는 '현재적 삶의 소중함은 아닐까' 잠시 생각해 본다. 그리고는 숨을 고르고 있다.

코엘료는 우리의 생을 기차역이 아닌 기차로 비유한다. 그 비유는 의미심장하며, 열차 안을 오가며 시간을 통과하는 기차 여행은 현대인의 삶을 상징적으로 그려준다. 기차 안의 사람들은 타인과 대화하지 않으며 자신의 고민거리와 상념에 빠진채 마음의 빗장을 지르고 있다. 두번 다시 만날 일이 없을 거란 생각은 앞 좌석의 사람을 낯선 이로 취급하며, 할 수 없이 객실을 공유해야하는 외인이라는 자조적 판단을 내리게 한다. 아무리 비참하거나 외로운 기분이 들어도, 또는 마침내 얻게된 행복과 가슴을 짓누르는 슬픔을 나누고 싶어도 차라리 침묵을 지키는 편이 더 낫다는 판단을 내리고 만다. 이 시대 안에 발을 딛고 있는 내 얼굴이자 우리의 자화상이다.

알레프

나는 생을 여행하는 여행자며 외국인이다. 그러나 이방인은 아니다. 내가 그리고 우리가 그럴 수 없는 이유는 우리 속에 사랑이 내재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코엘료와 힐랄을 살게 했고, 아내를 잃고 비통에 빠진 통역사 야오에게까지 미쳤으며, 결국엔 나와 우리를 살게 할 것이다. 반복된 생의 저주를 풀게 한 것도, 미래의 소망을 갖게 한 것도 결국은 오늘의 생을 향한 뜨거운 열망에서 비롯됐다. 그 열망은 사랑의 다른 이름이며 탈바꿈한 사랑이었다.

코엘료의 터져나온 눈물은 사랑 안에서만 흐를 수 있었고, 그 눈물은 그의 지난 생과 오늘의 삶을 치유했기에 시간의 시작과 마지막을 관통할 수 있었다. '알레프'와 함께 한 시간 속에 내 생의 아픔도 조금은 봉합되었으리라. 아픔이 사라진 자리를 메웠을 사랑의 온기는 지나간 내 생도, 오늘을 거쳐 내일이 될 내 작은 세상도 한결같이 지나가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내 작은 세상과 이 큰 세상은 중심을 같이하는 동심원처럼 연결되리라. 알레프란 사랑의 이름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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