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에 휘날리는 비닐 시트
모리 에토 지음, 김난주 옮김 / 시공사 / 2007년 1월
평점 :
품절


 

일본 소설은 읽고 나면 항시 여운이 남는다.
따뜻함과 애잔함이 동시에 담겨진 글 속에 있다 나오면, 잠시 가만히 있게 된다.
그 잔상들을 오래 기억하고 싶어서이다.
책을 읽은 후 느껴지는 내 안의 충만함, 그런 기분을 느끼고 싶어 일본 소설을 읽는지도 모르겠다.

일본 작가들 특유의 잔잔히 말하는 방식이 나는 마음에 든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그 방식이 나는 편안하다.
발이 고운 체에 거른 것 같은 찌꺼기가 남지 않은 그 담백한 정서가 나는 좋다.  

그러나 그런 문체보다 더한 것이 일본 소설 속엔 있다.
마치 없는 것처럼 그리지만 활화산 같이 뜨거운 삶에의 열망이 책 속엔 가득 담겨 있다.

너무 뜨거워 차갑게 가라앉혀야만 되는 열망을 자신의 숙명으로 받아들이고는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걸어가는 일본식 生에의 여로를 나는 좋아한다.
묵묵히 가기 위해서 오로지 그 자신에 의해 식혀져야할 열정과
초월적이리만큼 담담한 생을 향한 순응적 인생관이 나는 좋다.  
그런데 이 좋아한다는 느낌이 나를 불편하게 할 때가 있다.
왜 우리의 젊은 작가에게서는 이런 정서적 편안함을 못느낄까 라는 생각에서다.
우리의 젊은 작가들에게서 정서적 동질감을 못 느낀다는 사실이 나는 못내 송구스럽다.
소리는 큰 것 같은데 읽고 나면 큰 소리만큼 느껴지지 않는 작은 울림이 아쉽고
정서의 결이 세밀하지 못함이 안타깝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내 안의 일본 편향적인 취향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좀 곤혹스럽다.

누구도 강제하지 않았지만 이런 나름의 부담을 안고 나는 일본 소설을 읽는다.
그러나 부담 만큼의 설레임이 있다.

'바람에 휘날리는 비닐 시트'는 모리 에토라는 작가의 글이다.
그녀의 글을 이번에 처음 만났다.
이 책은 2006년도 나오키상 수상작이기도 하다.
책 속엔 표제작 '바람에 휘날리는 비닐 시트'를 포함해 6편이 단편이 실려있다.

6편의 단편에는 하나같이 자신의 길을 가는 사람들의 사연이 담겨져 있다.
쉬운 삶이 어디 있겠으며 그 노정의 고단함을 어떻게 다 말로 표현할 수 있으랴만
모리 에토는 청승 떨지 않고 담담하게 그려낸다.
그래서 고달픔은 처량함이 되지 않았고 질곡 또한 생의 긴 여정의 동반자로 표현된다.
그런 삶이 이 책엔 그려져 있다.
그래서 나는 한편 한편을 재미있게 읽었고 책을 덮고 난 지금 소중하게 가슴으로 품고 있다.

표제작인 '바람에 휘날리는 비닐 시트'는 작가의 역량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NGO에서 활동하던 전남편의 죽음을 개인적 슬픔으로 묻지 않고 시야를 확장한 후
자신의 삶으로 온전히 껴안은 아내의 더 커진 사랑을 모리 에토는 서정적으로 그려냈다.
슬픔도 힘이 될 수 있다는 말을 실제로 만들어 버리는 힘을 그녀는 가지고 있었다.
끝내 파국으로 끝나고만 안타까운 사랑과, 남이지만 남일 수 없는 전남편을 향한 사랑을
울부짖음으로 그리지 않았고 그래서 그 사랑은 더 애잔하다.

누군지도 모르는 이름 모를 소녀를 위해 목숨을 버린 한 남자의 생을 비극적으로 그리지 않은
작가의 시선은 참으로 깊고 푸르다.
살았으면 더 많은 일을 했을 한 인간의 죽음을 상실에 머물게 하지 않은 것은 죽음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한다.
비닐 봉지처럼 가치 없게 매겨지는 사람들을 위해 살았던 한 사람의 죽은 몸은
굳어버린 몸으로도 사랑을 전하는 도구가 되었다.

모리 에토는 죽음을 애석함과 비통함으로 그리지 않는 대신 다른 의미로 채색했다.
어쩌면 우리가 죽음을 통해 더 많은 일을 할지도 모른다고.
평생을 다해도 못할 일을 우리가 단회의 죽음으로 완성할지도 모른다고.
그 죽음의 새로운 의미와 더 넓어진 사랑의 확산을 이 책은 내가 원하던 방식으로,
아니 그보다 더 멋진 그림으로 구현해 냈다.

저 멀리 있을 누군가에게 내 마음을 나누고 싶다는 생각을 나는 지금 하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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