깡통 어른을 위한 동화 11
이상희 지음 / 문학동네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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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조용하고 쓸쓸한 글은 처음이다. 분명 고단한 삶을 그린 글인데 처량하거나 황량한 느낌이 들지 않는다. 가난하면 모든 것이 서럽고 아픈데 그 불편 부당한 슬픔을 이상희는 분노로 그려내지 않았다. 처연하고 애잔한 느낌 때문인지 이 책은 좀 아름답기까지 하다. 작가가 시인이라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그려낸 세상은 이 세상이 아닌 듯하다. 그래서 이 책에 '어른을 위한 동화'란 타이틀이 붙어 있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며 다행한 일이다.

아이는 아저씨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갈 요량이었다. 추위도 배고픔도 아저씨와 바꿀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 여정이 아저씨와 마지막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결혼식장에서 허기를 채우던 아이가 잠시 한눈을 판 사이, 깡통을 쓰레기로 여긴 종업원이 아저씨를 채갔다. 그간 몇 번 헤어졌다 만난 적이 있었지만 이번은 느낌이 영 안 좋다고 깡통은 생각한다. 진짜로 마지막이라고 생각한 깡통은 무언으로 외친다. 수도원의 안토니오 신부님을 꼭 찾아가라고.  

이 책의 제목이자 주인공인 '깡통'은 전생에 시인이었다. 그가 시인이었을 때 사람들은 그가 시인인지 아무도 몰랐다. 그는 세상살이가 늘 버겁거나 힘겨운 사람이었다. 직장 내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사랑하는 가족 속에 있을 때 조차도 그는 혼자였다. 아내와 아이들을 애틋해 했지만 가까이 하지 않았다. 그는 밖으로 떠돌때만 숨을 쉴 수 있었고 숲은 그의 유일한 친구였다. 아들의 생일이었던 그 날도 퇴근 후 교외선을 타고 숲에 틀어박혀 있었다. 그 날따라 숲이 이상했다. 갑자기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면서 비는 금새 폭우로 변했다. 허겁지겁 집에 돌아왔다. 그의 셋집은 산사태로 무너져 있었고, 그는 아내와 아이들의 시신을 수습하고는 도망치듯이 교외선을 탔다.

아이는 혼자다. 아이의 이름은 알 수 없다. 아이의 아버지는 알콜 중독으로 거리에서 죽었고, 엄마 또한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떴다. 피붙이라고는 형 하나 뿐인데 형도 아이를 두고 집을 나가 버렸다. 그런 아이에게 깡통이 찾아온다. 아니 아이가 쓰레기장에서 골라온 두 개의 깡통 중 하나가 그 깡통이었다. 깡통은 자신이 말을 할 줄 알고 움직일 수 있다는 걸 안다. 깡통은 아이를 보며 자신의 딸을 떠올린다. 어쩌면 자신이 깡통이 된 것은 이 아이를 통해 다시 사랑을 해보라는 신의 뜻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아이와 깡통은 하나가 된다. 아이에게 이제 깡통은 세상 누구보다 소중한 아저씨이다. 외롭다는 말조차도 사치스러웠던 그들은 서로를 통해 위로와 힘을 얻는다. 그러나 추운 겨울을 아이가 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깡통은 자신이 설계사였을 때 알게 된 수도원을 찾아가기로 마음먹는다. 이 곳에서 아이는 난생 처음 즐거운 식사를 한다. 나직하고 부드러우며 쾌활하고 질서정연한 그 곳에서의 일상은 마치 딴 세상에 있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깡통의 생각은 달랐다. 깡통은 아이에게 자립을 가르치고 싶었다. 깡통은 급한대로 몸을 추수린 아이를 데리고 다시 떠난다.  

시간이 많이도 흘렀다. 아이는 이제 수도원에서 김씨라 불린다. 아이의 귀밑머리에도 흰 머리가 보이기 시작한다. 아이는 아직도 자신의 마음에 큰 구멍이 뚫려 있음을 느끼고 있다. 아저씨와 헤어진 뒤부터 아이는 깡통만 보면 눈이 번쩍 뜨인다. 그러나 아저씨를 찾을 수는 없었다. 아이가 얼마나 아저씨를 그리워하는지는 누구도 모른다. 아이는 아직도 아저씨가 좋아했던 꽃을 찾는다. 그 꽃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마리아에 의하면 무꽃이라 한다. 그 무꽃이 피던 날 아이는 자신도 이제는 꽃을 피울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참 고운 글을 읽었다. 시인이라서 이런 느낌을 줄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한다. 삼인칭 시점의 글인데도 마치 일인칭 시점처럼 느껴진다. 그 사이의 거리가 덤덤한 외피로 드러났음에도 내밀한 고백처럼 내 가슴으로 모든 느낌들이 흘러들었다. 아픈 이야기들이 많았지만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이 차분한 느낌은 '어른을 위한 동화'라는 전체 주제에 잘 맞는 듯하다. 이 살벌한 세상에서 우리를 쉬게하는 것이 유년의 행복한 기억외에 다른 무엇이 있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아름다운 글과 그 글에 맞는 무채색의 수묵화가 글의 여운을 더한다. 모든 좋은 것은 향기를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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